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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느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의 모퉁이를 몇 개인가 돌고 난 뒤에 사내는 대문 앞에 전등이 켜져 있는 집 앞에서 멈췄다. 나와 안은 사내로부터 열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사내가 벨을 눌렀다. 잠시 후에 대문이 열리고, 사내가 대문 앞에 선 사람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아저씨를 뵙고 싶은데요."

"주무시는데요."

"그럼 아주머니는?"

"주무시는데요."

"꼭 뵈어야겠는데요."

"기다려 보세요."

대문이 다시 닫혔다. 안이 달려가서 사내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냥 가시죠?"

"괜찮습니다. 받아야 할 돈이니까요."

안이 다시 먼저 서 있던 곳으로 걸어왔다. 대문이 열렸다.

"밤 늦게 죄송합니다." 

사내가 대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누구시죠?" 

대문은 잠에 취한 여자의 음성을 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너무 늦게 찾아와서 실은"

"누구시죠? 술 취하신 것 같은데……."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하고, 사내는 비명 같은 높은 소리로 외쳤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이번엔 사내는 문 기둥에 두 손을 짚고 앞으로 뻗은 자기 팔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월부 책값..."

사내는 계속해서 흐느꼈다.

"내일 낮에 오세요."

대문이 탕 닫혔다.

사내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사내는 가끔 '여보'라고 중얼거리며 오랫동안 울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열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그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 그가 우리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왔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서 거리로 나왔다. 적막한 거리에는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김승옥은 1964년 겨울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제는 40년도 더 지난 1978년 여름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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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가 나에게 물었다. 삶에서 괴로움이 덜해진다면,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나는 엄청난 독서가도 아니면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가끔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지만, 대답한 후에 공허해진 이유를 나는 스스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 출근을 하고, 상사와 동료와 뭔가를 전해야 하는 대상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조금이라도 윤택해지리라는 헛된 희망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간외 근무를 하면서, 형제에게 대신 목돈 대출을 해 주고 나서 대출금을 떼일까 걱정하면서, 그런 일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내 삶에서 괴로움이 덜해지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생계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을 두세 시가 넘도록 꾸역꾸역 하면서 생각이 들었다. 그런 괴로움이 덜해진다면, 무엇을 더 읽고 더 쓸 수 있을까.

그렇게 읽는 시간이 확보되더라도, 그렇게 쓰는 글의 농도와 밀도는 훨씬 나아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일까.

스트레스와 괴로움과 슬픔이 글의 농도를 높인다는 것. 구양수가 말한 '시 궁이후 공'.

누구나 다 피곤하고 괴롭고 슬퍼서 틈틈이 졸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혼자서 운다. 그런 것이 인생이라고, 나는 언젠가 나보다 나이가 어린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생활에 찌들어서 살고, 그 찌든 얼룩이 배어나오는 글. 그게 진정한 글이라고 말하려면, 오늘을 또 견뎌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 '알파'가 될 확률은 그리 높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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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안개는 우리 동네 집들을

가라앉혔다 아득한 곳에서 술 취한 남자들이 누군가를

불러댔고 누구일까, 누구일까 나무들은 설익은 열매를

자꾸 떨어뜨렸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서리 맞은

친구들은 우수수 떨어지며 결혼했지만 당분간 아이 낳을

생각을 못했다 거리에는 흰 뼈가 드러난 손가락, 아직

깨꽃이 웃고 있을까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불란서문화관

여직원은 우리에겐 불친절했지만 불란서 사람만 보면

꼬리를 쳤고 꼬리를 칠 때마다 내 꼬리도 따라 흔들렸다

왜 이래, 언제 마음 편할래? 그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와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향에

내려가 땅 부치는 사람의 양식 절반을 합법적으로 강탈

했고 나는 미안했고 미안한 것만으로 나날을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해 가을이 깊어갈 때

젓가락만큼 자란 들국화는

내 코를 끌어 당겨 죽음의 냄새를 뿜어댔지만

나는 그리 취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게 삶이 아니므로,

아니므로 그해 가을이 남겨 놓은 우리는 서로 쳐다봤지

단단한 물건이었을 뿐이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아도

다른 하늘이 덮치고 겹쳤다

이 조개껍질은 어떻게 산 위로 올라왔을까?

 

                                                                                              ;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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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은 6월 3일부터 여름이다.

추위가 가면 술 취한 사내들은 겨우내 담아뒀던 울분을 토하듯 소리를 지른다. 춥지 않아서 빨리 어딘가로 들어가 몸을 녹여야 한다는 부담이 없으므로 성대가 찢어지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듯, 그 소리는 오래 계속된다.

수도(修道)에 실패한 사내는 동안거(冬安居)의 스트레스를 풀려는 듯, 불립문자의 깨달음을 얻은 사내는 그 깨달음을 언어로 세워 보려는 듯, 여름이 오면 술 취한 사내들은 '할(喝)!'과 같은 소리를 섞어서 어리석은 주민들의 성찰 없는 삶을 꾸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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