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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집행관
김보영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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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엔 그닥 관심 없는 독자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겉표지에 쓰인 소개글을 보고 별 생각없이 빌렸다가...550페이지를 단숨에 읽었다. 이 정도로 재미있고 박력 있는 책을 얼마만에 보는지.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책은 줄거리의 복잡함이 읽기의 즐거움과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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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세상을 날다
전국지리교사모임 지음 / 서해문집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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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리뷰를 안 쓰는데, 딱 하나 있는 리뷰가 너무 혹평이더라.  

책 살까 말까 고민하면서 리뷰 참고하시는 분들 많을 텐데, 다른 의견도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다.   

일단 제목이나 표지를 봐도 알 수 있겠지만 깊이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책은 아니다. 지리에 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이게 뭐야? 이런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거 모르는 사람, 있다. 좀더 전문적인 정보를 원하는 분이라면 그에 걸맞는 책들을 읽으면 될 것이고, 이 책의 타겟(이라고 생각되는) 아이들, 그리고 나같은 지리 무식쟁이 성인에게는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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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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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최고다. 별이 다섯 개뿐인 게 아쉬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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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기 좋은 방
신이현 지음 / 살림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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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만성은 흔히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이 말의 출전이 노자인 만큼 여기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알다시피, 그 말은 공자라면 모를까 노자의 가르침에는 전적으로 위배되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성어는 원래 대기만성이 아닌 대기면성이었음이 밝혀졌다 한다. 그 말을 풀이해보자면 '큰 그릇은 이루어짐을 면한다' 혹은 '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 보인다'는 의미이다. 아하! 그제서야 아귀가 들어맞는다. 장자의 붕,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 니체의 어린아이 등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든 위대한 영혼들이 꿈꾸어온 것은 너무도 거대한 것이어서 그것은 흔히 아무것도 아닌 듯 보였다.

신이현의 처녀작인 <숨어있기 좋은 방>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나는 겉표지에 쓰여진 '경쾌한 정신, 니체적 질문으로 가득 찬 소설'이라는 문구가 과장이 아님을 알았고 한국에서 이런 소설이 쓰여졌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흥분했다.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의 틀 속에 갇힌, 혹은 나약한 감상을 대단한 고뇌인 양 주절대는 나약한 소설들에 넌더리가 나 있던 참에 발견한 이 소설에 나는 즉각 빠져들어갔다.

신이현은 우리 나라 문단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작가적 허영에서 승리한, 혹은 '거꾸로 된 허영'을 실천하는 작가이다. 당연히, 그녀의 작품은 희극의 형식을 띤다. 쿤데라의 말을 빌리자면 비극은 우리에게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멋진 환상을 줌으로써 위안을 제공하지만 희극은 이보다 훨씬 혹독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까닭이다. 얼핏 보면 단순한 패배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윤이금이라는 주인공의 무위 속에는, 그리하여 결코 희극적이지 않은 결연한 의지가 숨어있는 것이다.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위의 시는 최승자의 '악순환'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이다. 거기에 딱 한 문장만 보태보자.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야.'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글은 대기만성을 부르짖는 이 세상에 포위된 채 대기면성을 꿈꾸는 낯설고 매혹적인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된다. 그러나 차라리 나무라면 무하유향(無何有鄕)―무위무작(無爲無作)의 절대 자유의 경지. 장자가 추구한 무위자연의 이상향을 뜻한다고도 한다―의 광막한 들판에서 도끼날에 찍히지 않은 채 편안히 대기면성을 즐길 수 있겠으나 인간은 그럴 수가 없으니,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그러한 인간 조건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이다.

'나는 아직도 서른이 되지 못했고 그것은 여전히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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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라덱이 들려주는 이야기 (구) 문지 스펙트럼 1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영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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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란 어떤 존재일까? 그는 무언가 획기적인 것을 '발명'한 사람인가? 물론 그런 부분도 있을 것이다. 문체라든가 구성이라든가 하는 기술적인 문제에서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더욱 근본적인 위대성은 그가 어떤 것을 '발견'해냈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카프카 이전에도 '카프카적' 상황들은 늘 존재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러한 상황들을 하나의 뿌리로 연결시킬 수 있게 된 것은 카프카 이후이다. 바로 이것이 첫 문장에 대한 어렴풋한 대답이 아닐까.

처음에 그를 읽었을 때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첫번째 느낌은 그가 문학적 분위기--그닥 좋지 않은 의미에서의--에서 멀찌감치 비켜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나는 그처럼 어리둥절할 만큼 멋부리지 않은, 동시에 완벽하게 독창적인 문장을 본 적이 없다. 쿤데라가 '까만색의 기이한 아름다움'이라 표현한 그런 낯선 아름다움 역시.

카프카 이후로 거대 서사는 끝났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후, 내가 쓰고 있는 서평보다도 훨씬 짤막짤막한 글들이 실려 있는 '오드라덱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게 되었고 나는 카프카 이후에 모든 우화 역시 끝났음을 느꼈다.

'진정한 길은 공중 드높이 쳐진 게 아니라 땅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쳐진 줄 위로 나 있다. 그것은 지나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해서 있는 길인 듯 보인다.'

그가 말하려는 것을 위해서 이 두 문장 이상의 말이 필요할까?

그는 참으로 침묵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적게 말하면 할수록 그 파장은 더욱더 넓고 깊어진다. 잠언, 혹은 우화라는 것은 한 순간 강한 충격을 줄 순 있지만 곧 더 정연한 다른 논리에 의해 잊혀지기 쉬운 것이나, 그의 글은 그러한 허망한 불꽃놀이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 작은 책의 행간마다에서 자라나는, 글자들을 압도하는 침묵 때문이다. 그는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다. 진리란 공유되거나 발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는 다만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뿐이고, 그것에 대답하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들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실, 그의 책이 '침묵의 서'이자 '질문의 서'라는 것에 카프카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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