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기 좋은 방
신이현 지음 / 살림 / 199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대기만성은 흔히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이 말의 출전이 노자인 만큼 여기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알다시피, 그 말은 공자라면 모를까 노자의 가르침에는 전적으로 위배되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성어는 원래 대기만성이 아닌 대기면성이었음이 밝혀졌다 한다. 그 말을 풀이해보자면 '큰 그릇은 이루어짐을 면한다' 혹은 '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 보인다'는 의미이다. 아하! 그제서야 아귀가 들어맞는다. 장자의 붕,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 니체의 어린아이 등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든 위대한 영혼들이 꿈꾸어온 것은 너무도 거대한 것이어서 그것은 흔히 아무것도 아닌 듯 보였다.

신이현의 처녀작인 <숨어있기 좋은 방>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나는 겉표지에 쓰여진 '경쾌한 정신, 니체적 질문으로 가득 찬 소설'이라는 문구가 과장이 아님을 알았고 한국에서 이런 소설이 쓰여졌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흥분했다.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의 틀 속에 갇힌, 혹은 나약한 감상을 대단한 고뇌인 양 주절대는 나약한 소설들에 넌더리가 나 있던 참에 발견한 이 소설에 나는 즉각 빠져들어갔다.

신이현은 우리 나라 문단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작가적 허영에서 승리한, 혹은 '거꾸로 된 허영'을 실천하는 작가이다. 당연히, 그녀의 작품은 희극의 형식을 띤다. 쿤데라의 말을 빌리자면 비극은 우리에게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멋진 환상을 줌으로써 위안을 제공하지만 희극은 이보다 훨씬 혹독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까닭이다. 얼핏 보면 단순한 패배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윤이금이라는 주인공의 무위 속에는, 그리하여 결코 희극적이지 않은 결연한 의지가 숨어있는 것이다.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위의 시는 최승자의 '악순환'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이다. 거기에 딱 한 문장만 보태보자.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야.'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글은 대기만성을 부르짖는 이 세상에 포위된 채 대기면성을 꿈꾸는 낯설고 매혹적인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된다. 그러나 차라리 나무라면 무하유향(無何有鄕)―무위무작(無爲無作)의 절대 자유의 경지. 장자가 추구한 무위자연의 이상향을 뜻한다고도 한다―의 광막한 들판에서 도끼날에 찍히지 않은 채 편안히 대기면성을 즐길 수 있겠으나 인간은 그럴 수가 없으니,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그러한 인간 조건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이다.

'나는 아직도 서른이 되지 못했고 그것은 여전히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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