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얼어붙은 바다
이언 맥과이어 지음, 정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평점 :

『얼어붙은 바다』
이언 맥과이어 장편소설
정병선 옮김
몇 주 전 한파가 찾아왔던 올겨울, 마음까지 얼어붙게 할 책이 한 권 도착했다. 『얼어붙은 바다』라는 제목의 책. 작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책 소개글을 보고 이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포경선의 항해를 소재로 한 해양소설, 극한의 상황에서 대립하는 두 인간의 모습을 그린 강렬한 스릴러" 어릴 적 보았던 영화 "가을의 전설" 중 한 장면이 떠오르며 소설 속 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책은 어둡고 습하며 더럽고 거칠다가, 고약한 체취와 함께 피비린내와 바다 비린내가 점점 더해지더니, 죽음으로 내모는 끝없는 혹한과 혼란이 가중되며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최악의 상황에서 찾아든 평화로운 시간은 이야기의 2막을 알리는 듯했고 마치 태풍전야 같던 그 시간이 지나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지막 결전의 혈투(사실 혈투라고 하기엔 너무 싱거웠지만)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승자가 누릴 것이라 생각했던 혹은 내가 너무나도 갈망했던 따스함과 안락함을 이제 좀 느껴보겠구나 싶은 찰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와, 뭐지?'……"대박!"
긴장하며 읽었던 이야기가 이렇게 끝이 나버렸다는 것이 처음엔 아쉬웠고 허무했지만, 저자가 이야기를 진행시켰던 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의 구성력에 탄복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으로 봤을 때는 출항 전 도입부가 좀 지루한 편이지만 도입부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를 통해 주인공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이번 항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배의 출항과 함께 이야기의 흐름은 빠르게 전개되는데, 무엇보다 앞으로 어떤 내용이 이어질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끈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참 좋았다. 저자는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들을 여기저기에 두어 책을 읽으면서 독자로 하여금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책에 빠져들게끔 내용을 구성하고 있었다. 저자가 던져놓은 이런저런 실마리를 이용해 다음 이야기를 떠올리며 책을 읽어나갔는데 이런 과정이 책을 읽는데 흥미를 더해주었다. 예를 들면 책의 초반에 선박의 섬너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고 계획해도 그에게 닥친 불운을 막아내지 못하고 지금의 처지에 놓이게 된 상황에 대한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평생을 살아오면서도 막지 못했던 계속된 불운을 과연 그는 이번 항해로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을까? 섬너가 볼런티어호에 승선하기로 결정하며 했던 모든 생각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책을 덮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항하기 전 브라운리와 백스터가 나눈 대화에서도 우린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다.
"「아서, 일을 개판으로 만들어서는 안 돼. 우리가 뭘 하는지 잊지 말라고. 이건 자존심 문제가 아냐. 자제나, 나나 모두 말일세. 그 망할 놈의 고래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브라운리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단조롭고 음울한 링커셔의 해안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가 육지를 한 번도 좋아했던 적이 없음이 떠올랐다. 확고하고도 자명한, 그 자체로 너무나 분명한 사실."
고래잡이배가 고래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번 출항에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고, 뱃사람이 육지를 언급하는 것은 결국 배를 더 이상 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 그들 앞에 벌어질 일이 '설마 배를 좌초시키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대목이다. 이전에 좌초된 배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인 브라운리가 이 일에 적격이라는 것까지 더하면 그들이 꾸미는 일이 어떤 것인지 대충 감이 잡힌다. 그리고 배는 고래들이 남쪽으로 이동을 하는 기간임에도 계속 북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리 오래가지 않아 캠벨과 브라운리의 대화를 통해 밝혀진다. 이야기의 후반부는 앞에서 나온 속도감과 스릴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듯싶다. 하지만 이 또한 이미 그들의 종말을 예언했던 꿈 이야기를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저자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사건사고들을 여기저기 포진해놓고 또 그 사이를 연결해주는 끈을 이어놓아 궁금증을 잃지 않게 해주었다. 정말 최고!!!
『얼어붙은 바다』는 등장인물들의 개성도 뚜렷하고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 싫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책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저자가 가장 공들인 인물은 단연 작살수 헨리 드랙스와 선박의 패트릭 섬너일 것이다. 드랙스는 악마라고 불렸고 과거 식인종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말도 있었다. 여기저기 그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상황과 행동들이 나오는데, 그가 먹고 자고 성교하고 살인하는데 생각 따위는 필요치 않았으며 그는 전적으로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헨리 드랙스는 철저히 매 순간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포경선 볼런티어호에 승선하기 전에도 그는 살인과 성폭행을 서슴지 않았고, 역시 배에서도 이런 그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상략) 드랙스가 깜둥이 소년의 머리채를 붙잡고, 가격했다. 그렇게 아이를 주먹으로 때리는 행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 그의 행동은 신속했고, 주저함이나 죄책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중략) 그가 세상을 이해하고 붙드는 방식은, 뭐랄까, 뼈다귀를 문 개 같았다. 그는 모호한 것이 없었다. 어떤 것도 드랙스의 맹렬하고 험악한 욕구에서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었다. (하략)"
"(상략) 그를 전진시키는 주체는 갈증이었다. 이 목마름은 맹목적이고, 또 필연적으로 작동했다. 오늘 밤 그는 살인을 할 것이다. 하지만 드랙스의 마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살해 행위는 아니었다. 분노보다는 갈증이 더 깊이 자리했다. 분노는 신속하고 예리하지만, 갈증은 시간을 길게 끌며 오래 지속된다. 분노에는 항상 끝이 있다. 피범벅의 피날레 말이다. 하지만, 갈증은 바닥을 알 수 없고, 무한하다."
드랙스의 극악무도한 모습은 승선 이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한결같은 드랙스의 모습은 언제나 숨김이 없었고 변하지 않았으며 단순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그대로 까발려져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들에 대해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끊임없이 살인을 일삼았기에, 드랙스의 모습은 거칠고 잔인하고 흉악했으며 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그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고 본능적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이에 비해 선박의가 된 섬너는 과거에 얽매여 있는 사람이었다. 인도와는 다를 것이라 생각하며 배에 오른 섬너는 뜻하지 않게 동료들에게 과거를 들키게 되고 계속해서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나 어린 시절 열악한 상황에서 구조된 것이나 군의관으로 인도에서 겪어야 했던 일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며 그를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악운과 불행으로 얼룩진 그의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나타나길 원했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이력이 필요했다.
"(상략)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쓸 터였다. 잠도 푹 자고 말이다. 섬너는 선장이 호출하면 가서 대화 상대도 되어 줘야 했다. 볼런티어호 승선 여행은 대체로 보아, 안락할 터였다. 어쩌면 다소 지루한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광란의 인도 전선에서, 더위와 추잡함, 잔혹한 만행, 지독한 악취에서 빠져나온 섬너. 그에게는 바로 이런 여행이 필요했다. 그린란드에서 고래를 잡는 일이 어떻든 간에, 설마, 인도와는 전혀 다르리라는 것이, 섬너의 판단이었다."
의사라는 직업 자체가 많은 학식을 요구하기에 그가 배에 탄 유일한 지식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약에 의존해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안락함을 찾길 원하며 상황이 좋지 않은 순간이면 언제나 생각하고 행동하길 멈추고 곧바로 약을 찾았다. 그에게 이제 그만 그 고통들을 내려놓으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섬너가 과거를 사는 모습을 보면 '자신을 힘들게 하는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아닌 회피만을 하다 보니 결국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얽매여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는 난파된 후 약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을 때 더 또렷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만약 약이 남아있었다면 그는 또다시 그 힘든 상황을 약에 의존해 회피하려 들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섬너가 살아남기 위해 곰을 추격했던 장면이다. 숨겨진 음모가 서서히 드러난 것처럼 인간의 참모습 역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선장이 죽고, 구조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그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믿음과 단결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결국 그들에게 남은 것은 비난과 와해, 무기력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섬너는 살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하고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그는 혼자 곰을 발견하고 추격하기 시작한다. 섬너는 살아남기 위해 곰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너무 멀리 와버려서 곰을 죽인다 해도 살아남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순간 곰과 섬너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데 이것이 서로에게 잡히지 않기 위한 거리이면서도 홀로 남은 눈밭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걷는 거리 같아 보이기도 했다. 계속되는 일정한 흐름을 누군가가 깨는 순간 둘이 관계는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곰은 사라졌다 나타났고 섬너는 곰을 향해 총을 쐈다. 그리고 마침내 섬너는 곰을 차지하게 된다. 배에서 돌봐줬던 아기 곰이 떠올랐고, 곰은 역해서 고기로 먹지 못하고 가죽만 쓸모 있다던 동료의 말도 떠올랐으며, 이 항해가 어떻게 끝이 나는지를 예언했던 꿈 이야기도 떠올랐다. 곰을 추격하면서 그에서 숨겨져 있던 삶에 대한 열망과 집착이 결국 그를 살린 것이 아니었을까. 이후 곰 가죽을 벗고 세상으로 나온 섬너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상략)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과연 세상이 넓긴 넓군, 섬너가 중얼거렸다. 섬너는 그 넓디넓은 세상에서 기억해 줄 가치가 없는 작은 입자에 불과했다. 그저 실종되고 잊히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누구도 이런 생각을 반기지 않을 테지만, 지금의 섬너는 만족스럽다. 그의 계획은 이 세상으로 소산해 소멸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라야 다시금 부상해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섬너의 판단이었다."
"그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욕조에 들어가듯, 제 몸을 낮추고 구부려, 줄무늬가 있는 진홍색 공동에 들어갔다. 다음으로 절단한 뼈를 이빨처럼 개구부에 올렸다. 사후 경직이 일어난 곰의 근육이 수축하고 펴지는 게 느껴졌다. 갓 도살한 짐승의 산뜻하게 젖은 내가 났다. 미약하다고는 해도 남은 온기가 놀라웠다. 섬너가 남는 복부 공간에 장화를 집어넣고, 죽은 곰의 살집을 외투라도 되는 양 주변으로 단단하게 끌어당겼다. 여전히 바람이 울부짖었지만, 그래도 이제 한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관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식물 채집 상자와 같은 어둠 속에 섬너가 있었다. (중략) 문장을 입 밖에 내려 해도, 만신창이가 된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말과 단어가 아니라 야만인의 불완전한 원시적 꿀꿀거림과 경련하는 헐떡거림이었다."

오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피와 바다의 끈적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너무나도 사실적인 묘사가 여과 없이 그대로 전해져 몇 번이나 몸을 씻고 싶었다. 게다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고스란히 전해져 수시로 옷깃을 여미고 따듯한 차를 마시며 난로에 몸을 점점 가까이하고 책을 읽었다. 이 이야기는 98%가 좆나 거칠고 더럽고 개추우며 치열한 힘든 싸움(이렇게 강한 단어로 표현을 해야 그나마 좀 느낌이 살 것 같다)이었는데, 책을 덮고 나니 욕지거리나 흉악한 것들보다는 전반전인 스토리 구성과 각 인물들의 특징 그리고 선과 악, 생과 사, 인간과 자연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인간과 인간의 싸움, 인간과 자연의 싸움 그리고 인간 자신의 내면과의 싸움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시간이 흘러도 내게 그 내용과 느낌을 그대로 떠올리게 할 만큼 강렬하게 남아버렸다. BBC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된다고 하니 책에 나온 내용들을 어떻게 각색해서 표현했을지도 많이 기대된다.
내가 만약 이 잔혹한 상황에 놓였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브라운리처럼 피를 마시고 살을 먹었을까? 드랙스처럼 살인을 저질렀을까? 섬너처럼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눈밭을 내달렸을까? 아니면 다른 이들처럼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사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는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을 때는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물론 책에서처럼 극한의 상황에 처할 일은 많지 않겠지만,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가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부디 현명하고 선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
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