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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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혀
권정현 장편소설


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칼과 혀, 오랜만에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만났다. 이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말 일본이 패망하기 전 만주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야마다 오토조 사령관과 중국인 요리사 첸, 그리고 청진이 고향인 조선인 길순 세 사람이 각각 1인칭 시점으로 전쟁 앞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생을, 운명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각각 인물들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면, 야마다 오토조 사령관은 전쟁에는 관심이 없고, 전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자신의 유년기 시절을 떠올리길 좋아하고 어머니를 항상 그리워하는 인물이다. 그가 첸을 죽이지 않고 요리를 바칠 것을 요구하는 것이나, 극락사의 불상과 길순에게서 숨은 얼굴을 찾으려 애쓰는 것 모두 어머니를 떠올리기 위함이었다. 상당한 미식가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어머니가 해주셨던 분고규의 맛을 다시 맛보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 맛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을 찾아 끊임없이 요리를 먹어치웠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그 시절을 계속해서 떠올리는데 이것은 힘겨운 현재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고, 가장 따듯하고 포근한 존재인 어머니를 계속 마음속에 그린다는 것은 사령관으로서 그는 가장 힘 있는 존재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전쟁에 원론적으로 반대해왔다. 국경을 넘어가 소비에트군을 적발해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런 일들이 집무실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며 내 유년의 꿈들을 헤아릴 시간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청진에서 만주까지 가게 된 길순, 그녀는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갔고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결국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고문과 위안부로서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런 괴로운 삶이 아니라 오빠였다. 오빠로부터 도망가고 싶지만 오빠를 떠날 수 없음이 정신적으로 그녀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혹독한 시련과 역경을 거치며 어린 나이에 이미 인생을 달관한 듯한 그녀의 태도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하루 두번 주어지는 식사를 남김없이 먹어치웠어. 기운을 내야 해. 나를 가두고 있는 저 사내들의 울타리, 저길 넘어가는 건 결국 내 의지여야 하니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지. 남쪽에서 머물던 시절, 이런 식의 고문을 자주 경험했기 때문인지도 몰라. 그들은 내가 사내들을 거부할 때마다 좁은 방에 가두어 놓고 몸을 매달거나 압박하며 복종을 강요했어. 가끔 등에 채찍을 가할 때도 있었는데,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등에 닿을 때마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했어. 그러곤 속으로 중얼거렸어. 이건 사실이 아니야.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꿈에서 깨어나면 나는 다시 저 햇살 속으로 고무신을 신고 나설 수 있어. 아주 소박하게, 봄에 도취해, 그냥 저 봄 속으로 봄의 이름이 되어 걸어보는 거야."

길순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위안부 할머님들이 떠올랐다.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길순과 같은 꿈을 꾸었을까. 결국 길순은 봄은 아니지만 햇살 속으로 눈부신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첸은 요리로 장교들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장교식당에 들어가지만 결국 야마다 사령관을 위한 음식을 바치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요리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야마다를 보며 자신의 요리에 길들여졌다고 생각하지만, 야마다는 그 생각까지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쥐어준 칼이 도마라는 치열한 전장을 거쳐 도로 자신들의 심장을 겨눌 줄 그들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생선을 손질할 때 쓰는 데바보초와 그것을 얇게 떠내는 사시미보초, 야채를 다듬는 투박한 우수바와 초밥을 자르는 우시기리, 심지어 장어를 절단할 때 쓰는 사키에 이르기까지, 목표는 오로지 하나다. 펄떡이는 생명을 끊어놓는 것."

 

 

 

 

책은 1부와 2부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야마다 사령관과 요리사 첸이 서로를 알아가는 상황이 주를 이뤘다면 2부에서는 요리를 둔 첸과 야마다의 격렬한 싸움이 시작된다. 1부에서 첸의 고독한 싸움으로 그는 혀를 잃게 되고, 2부에서 야마다 역시 혀를 잃고 만다. 요리를 두고 벌어지는 칼과 혀의 대결은 마치 한중일 세 나라가 핏빛의 만주 땅(도마) 위에서 칼과 혀로 싸우고 투쟁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제목인 """"라는 것은 중의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고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피로 얼룩진 눈앞의 저 낡은 도마를. 수많은 영혼들이 칼날에 베여 안간힘을 쓰며 제 죽음을 밀어내던 저 분노의 순간들을. 대륙으로 폭풍처럼 짓쳐들어오는 제국주의자들의 총검과 피바람, 죽어가는 자들의 한숨이 압착된 저 도마를 말이다. 나는 도마 위에 엎드려 처분을 기다리다 누군가의 혀를 만족시킬 재료들이나 다름없다. 내가 과연 저 날카로운 광풍의 칼날을 비껴갈 수 있을까?"

살아 움직이는 식재료의 숨통을 끊기 직전 재료는 있는 힘을 다해 발악하지만 결국 요리사의 힘과 칼에 제압당하고 피를 흘리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서 보면 지배자의 칼은 무력이고 힘이며, 피지배자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 혹은 있는 힘을 다하지만 결국 무력에 의해 진압당하고 처절하게 피 흘리며 죽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도마 앞의 요리사는 지배자이고, 칼은 지배자의 힘을, 도마는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의 땅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또한 첸은 아버지로부터 이족요리와 광둥요리를 배웠고, 일본식당에 들어가 일본 음식을 배웠으며 길순에게 한국 음식을 배우기도 했다. 그의 요리는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결국 도마 위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다양한 요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로 남았을 첸과 야마다. 이 둘은 참 많이 닮았다. 어릴 적 닭의 공격을 당한 것도 그렇고 요리에 대한 경외심도 그렇고. 첸과 야마다의 싸움은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그 누구도 승리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끝이 난다. 이것은 전쟁이 남기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했다. 서로에게 아픔과 시련만을 가져다줄 뿐 진정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것.

"(상략) 나는 여전히 말하고 싶다. 이제 우리의 내기는 끝이 났다고. 나는 무엇도 요리하지 않았고 당신은 무엇도 먹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외로웠을 뿐이라고. 나는 요리를 했고 당신은 접시를 비웠다. 불과 싸우던 나의 시간도, 맵거나 짜거나 달콤하거나 시었을 온갖 요리의 맛들도, 우리를 아프게 했던, 시대가 만들어낸 순간의 고통일 뿐이라고. 한 접시의 요리가 깨끗이 비워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증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사실 처음 이 책의 내용을 접한 것은 책 표지를 선정하는 투표를 할 때였다. 역사와 요리를 어떻게 연결지었을지 내용이 참 궁금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1인칭 시점의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내용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고, 개성 넘치는 인물들(실제 야마다 오토조는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의 대사 한 마디 한마디는 마음에 와닿았고 울림이 있었다. 내용 전개 역시 빠르게 진행되어 지루할 틈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에 나오는 요리들은 하나같이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는데 특히나 마지막 첸이 야마다를 위해 준비한 요리가 쉐창인 것을 보고 작가의 구성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마다에게 점심 한 끼를 대접하는 길순과 밥을 먹고 길순을 바라보는 야마다의 모습까지 긴 여운이 남는 책이었다.

책을 덮으며 내게 드는 생각은 "대의"라 말하며 전쟁을 일으키고, "대의"라 말하며 투쟁하지만 결국 피바람 앞에서 사람들은 점점 정신을 잃고 미친 상태가 되어간다는 것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서로에게 칼을 겨눠왔고, 앞으로도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다면 우리는 계속 그런 위험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한중일 세 나라의 역사를 다룬 이야기지만, 그저 과거의 이야기로만 치부해버릴 수는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주어진 의자에 앉으며 천천히 그들을 눈으로 훑는다. 나는 진정 궁금하다. 전쟁을 앞둔 자들, 죽음을 앞둔 자들, 그들의 애국심과 용기, 위기 앞의 질서, 솔직함, 우리 머릿속을 지배하는 저 복잡한 생각들은 다 무어란 말인가. 누가 우리를 이곳에 앉혀놓았는가. 누가 제복을 입히고 제멋대로 고안한 견장과 훈장을 내리고 명령을 내리고 규칙을 세웠는가.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숨어버렸는가. 그것을 끝까지 이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들은 왜 숨지 않고 끝까지 체면을 차리고 있는가."

 

 

 

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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