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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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세사르 바예호


인생이라는 게 항상 내 뜻대로 흘러가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생각대로 희망대로 그 방향 그대로 모든 일들이 착착 순조롭게 진행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이별의 순간도, 가슴 저미는 슬픔도, 숨조차 쉬기 힘든 고통과 절망도 맛봐야 할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마찰로 빚어진 이런 감정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극에 달하면 몸속에 들어있던 모든 에너지가 손끝 발끝으로 빠져나가고 살아갈 힘조차 남겨두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숨조차 쉬기 힘들 때, 시간이 약이라고 말하는 그런 상황을 짧지만 가슴에 와 닿는 시를 읽고 또 읽고 또 읽으며 지나 보냈다. 요즘에도 가끔씩 마음이 어수선하거나 힘들 때 나는 시를 읽는다. 시는 처음 마음을 다잡고 집중해서 글을 읽기에도, 끝까지 집중해서 글을 읽어나가기에도 소설이나 에세이에 비해 효과적인 것 같아서 마음에 드는 시를 반복해서 읽는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시구를 되뇌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풀어지고 멋진 시만 남게 된다.

 

 

 

이번에 만난 세사르 바예호의 시선집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은 이미 1998년에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시선집이 20년이 지나 개정 보정판으로 나온 것이라 한다. 그 당시에는 수록하지 못했던 시들도 몇 편 함께 수록되어 있다고 하니 세사르 바예호의 작품세계를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길 바란다.

"이번 시선집에서는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초판본에 수록된 시 외에, 바예호의 시 중에서 평론가들이 많이 언급한 시를 추가해서 옮겼다. 초판본에 수록된 시들은 좀 더 가독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수정했으며, 새로 번역한 시들 역시 원시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번역 냄새가 나지 않게 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을 가장 생생하게 그린 시집으로 평가받는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에 수록된 시 전편을 옮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 "책머리에 ㅣ 바예호를 다시 소개하면서" 중에서

 

 

 

책에는 총 122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
『검은 전령』에 수록되지 않은 시 2편과  검은 전령』에 수록된 시 43편, 『트릴세』에 수록된 시 36편과  트릴세초기 본에 수록되지 않은 시 2,  인간의 노래에 수록된 시 24, 그리고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에 수록된 시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책의 마지막에 옮긴이 주와 해설 그리고 세사르 바예호 연보가 있어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만약 나처럼 세사르 바예호를 처음 만났다면 이 부분부터 읽어보고 그의 시를 읽는 것을 추천한다.

바예호의 시는 다소 어둡고 슬픈 느낌이 드는데, 그가 성장한 배경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고 몸이 약했으며 살면서 3명의 가족(형 미겔, 누나 마리아, 엄마)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했고, 환영을 보기도 했으며, 자신의 죽음도 알아차렸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그의 삶이 불우하다 보니 작품에도 삶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과 죽음,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신의 부재 등이 표현되어 있다. 시인으로서 그는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하거나 고향의 말투(스페인어+케추아어)를 그대로 작품에 반영하는 등의 새로운 시도도 하였다.


세사르 바예호의 작품 중 사랑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 몇 편을 감상해보자.


9월

9월 그날 밤, 당신은 내게
너무나 다정했다, 아플 정도로!
다른 건 모르겠어, 그런데 당신이
다정해서는 안 되었어, 안 되었지.

그날 밤, 내가 이해하기 어렵고, 폭군 같았고,
아팠고, 슬픈 걸 보자 당신은 울었지.
다른 건 모르겠어, 그런데
내가 왜 슬펐는지, 왜 그리 슬펐는지 몰라.

9월의 그 사랑스러운 밤에만,
당신의 눈은 하느님과는 멀리 떨어진
막달레나 눈이었고, 나도 당신에게 다정했었지!

9월의 오후였지, 그날, 자동차에서
당신의 뜨거운 몸에
12월 오늘밤 흘리는 눈물샘의 씨앗을 심었지.



먼 걸음

아버지는 주무신다. 아버지의 단아한 얼굴은
평온한 마음을 드러낸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다정해서…
아버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나일 게다.

집 안에는 정적이 흐른다. 기도를 드린다.
오늘은 자식들 소식이 없다.
아버지는 일어나, 이집트로 떠나는 피난을 생각하시고
안절부절못하신다. 피가 멎는 이별.
지금, 그리고 가까이 계시건만…
아버지께 멀리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일 게다.

어머니는 텃밭에서 왔다갔다 하신다.
이미 맛이 간 맛을 보아가면서.
어머니는 지금 너무도 부드럽고
날개, 큰 날개처럼 가볍고, 사랑스러우시다.

조용한 집 안에는 외로움이 흐른다.
소식도 없고, 푸르름도 없고, 어린애도 없다.

이 오후에 깨어진 것이 있다면,
아래로 내려와 삐걱대는 것이 있다면,
그건 휘어진 하얀 두 개의 옛 길*.
내 마음은 그 길로 발을 달린다.

* 허리가 휘어진 늙으신 부모를 가리킨다.

 

 

 

아직 그의 삶과 정신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정말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에 충실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통해 들여다본 삶, 사랑과 이별,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 그가 느끼는 것들이 고스란히 시를 통해 전해졌다.

"어느 날 문득 영혼의 지하갱도에 갇혀 혼자 헤매는 기분이 든다면 바예호를 읽어보세요.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은 / 회한의 웅덩이가 되어" 눈에 고이는 듯한 기분을 알고 있는 시인입니다. - 진은영(시인)

우리는 대부분의 예술에 넌덜머리가 난다. 바예호는 예술가로서 쓰지 않는다. 그는 한 인간으로 쓴다. - 찰스 부코스키(미국 시인, 소설가)

 

 

 

아직 우리에게 많이 익숙하지 않은 남미 시인 세사르 바예호이지만, 그는 이미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시인들의 찬사를 받는 페루 최고의 시인이자 체 게바라의 유품 '녹색 노트'에 가장 많이 필사되어 있는 시인이었다. 페루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인생을 들여다보며 같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공유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의 시가 당신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이라 자명한다. 우리 모두는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이기에.

 

 

 


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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