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특별판)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 서혜영 옮김


이 책의 제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지난여름 저자의 신간 『야행』이 나왔을 때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이후 10년간의 집대성"이라는 책 소개글을 보았고 저자를 알고 있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너무나도 재밌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야행』을 통해 소름 끼치는 공포감에 휩싸이면서도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시간을 가졌던 만큼 저자의 10년 전 작품에 관심이 갔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책은 크게 4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심해어들
편리주의자 가라사대
나쁜 감기 사랑 감기


사실 처음에는 단편 모음인가 싶었다. 첫 장의 내용을 통해 그와 그녀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되었음에도 두 번째 장에서 "그녀는 대학 클럽의 후배이며, 나는 남몰래 그녀를 사모하고 있다."라는 문구가 나와있어서 새로운 커플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그게 아님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 책의 각 장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지나며 각 계절마다 벌어졌던 사건들을 담고 있었는데 그 사건들이란 것이 결국은 짝사랑하는 검은 머리 아가씨와 그녀에게 '최눈알 작전(최대한 그녀의 눈앞에서 알짱거리기 작전)'을 쓰며 해자를 메워가는 작업을 하는 선배의 이야기이다. 봄은 기야마치와 본토초에서, 여름은 시모가모 신사 헌책시장에서, 가을은 대학 축제에서 그리고 대학 생활 내내 끊임없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만들며 얼굴도장을 열심히도 찍어댔다. 하지만 그때마다 "선배, 또 만나네요"라는 인사를 건네는 그녀는 둔해도 너무 둔한 것이 아닐까. 겨울이 되어 지독한 감기에 걸린 지인들을 병문안 다니며 그녀는 그동안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며 언제나 뒤에 서있었던 선배의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여전히 "그녀를 위해서"였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짝사랑하는 그녀의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남자와 그의 관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여자, 선후배의 이야기. 이렇게만 보면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 같아 보이지만, 이 이야기를 색다르고 매력적이게 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가득 채워져 있어 한 번 책을 펴면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야행』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저자의 구성력과 상상력이 정말 뛰어난 것 같다.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는 인물의 특징을 잘 살렸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사람인지 요괴인지 모를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텐구 히구치는 날아다니고, 이백 씨는 사람인지 요괴인지조차 알 수 없는 막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헌책시장에서 만난 꼬마 역시 헌책시장의 신이라 불릴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처음에 형님은 『셜록 홈즈 전집』을 봤어. 저자인 코난 도일은 SF라 할 『잃어버린 세계』를 썼는데 그건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영향을 받은 거였어. 그 베른이 『아드리아 해의 복수』를 쓴 건 알렉산더 뒤마를 존경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일본에서 번안한 것이 《요로즈초호》 주간을 했던 구로이와 루이코인데, 그는 『메이지 바벨탑』이라는 소설에서 작중 인물로 등장해. 그 소설을 쓴 야마다 후타로가 『전중파암시장 일기』 속에서 '우작'이라는 단 한마디 말로 참수시킨 소설이 『귀화』인데 그걸 쓴 것이 요코미소 세이시. 그는 젊은 날 잡지 《신청년》의 편집장이었는데 그와 손을 잡고 《신청년》의 편집에 관여한 편집자가 『안드로규노스의 후예』를 쓴 와타나베 온. 그는 업무상 방문한 고베에서 타고있던 자동차가 전철과 충돌하여 죽게 되지. 그 죽음을 「춘한」이라는 글로 추도한 것이 와타나베에게서 원고를 의뢰받았던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 다니자키를 잡지에서 비판해 문학 전쟁을 전개한 것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인데 아쿠타가와는 논쟁 몇 개월 후에 자살을 해. 그 자살 전후의 모습을 모티브로 우치다 켄이 『중산모자』를 썼고 그 우치다의 글을 칭찬한 것이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가 스물두 살 때 만나서 '나는 당신이 싫다' 하고 맞대놓고 말한 상대가 다자이 오사무. 다자이는 자살하기 일 년 전에 한 남자를 위해 추도문을 써서 '너는, 잘했다'라고 했어. 다자이에게서 추도사를 받은 남자는 결핵으로 죽은 오다 사쿠노스케야. 봐봐, 저기 그의 전집을 읽는 사람이 있어."

소설의 전체 흐름에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것이 아님에도 문장 하나하나 대화 하나하나에 저자는 공을 들였고 그런 작은 부분들이 모여 탄탄한 소설이 되었다. 헌책시장에서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수많은 작가와 작품들. 그중에서도 작가와 작품에 숨겨진 뒷이야기를 연결하여 책과 책, 사람과 사람을 잇는 부분은 참 인상적이었고 모리미 도미히코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던 부분이기도 하다.


책을 읽었는데 마치 웰메이드 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 영화를 한 편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청춘 남녀의 사랑을 그린 로맨스이지만 판타지 요소가 가득하고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도 모두 특징이 뚜렷해서인지  줄 한 줄 읽어내려갈수록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졌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몇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며 마치 책을 읽는 동시에 애니메이션이 상영되는 것 같았다. 마침 지난 3월 말에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개봉됐는데 인물들이 어떻게 묘사되었을지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또한 책을 읽는 동안 '아 나도 그때 그랬었지'라든지 '난 이랬었는데' 하며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 시절이 계속 끊임없이 떠올랐다. 1학년 때 나의 모습과 친구들 그리고 선배들의 모습도 그려보았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는 이성에 대한 관심보다는 억압받았던 고등학교를 떠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좋았고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밴드부활동도 하고 일본어도 배우고 친구들과 미친 듯이 수다도 떨고 멍 때리고 앉아 있기도 하고 말 그대로 그냥 그 시간을 즐겼던 것 같다. 나에겐 이런 것들이 캠퍼스의 낭만이었다. 어찌 보면 여주인공도 하고 싶은 게 많고 그걸 즐길 수 있는 시간이 그저 행복한 여학생이어서 선배의 관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자 여주인공의 반응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책을 읽은 게 참 오랜만인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사르르 번졌지만, 덮었을 때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벚꽃이 흩날리는 이 봄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풋풋한 사랑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봄바람 난 처녀처럼 내 마음도 싱숭생숭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야행』은 아직도 그 제목만 떠올려도 등골이 오싹해지는데, 어떻게 한 작가가 이렇게도 전혀 다른 장르의 소설을 짜임새 있게 잘 펴낼 수가 있을까. 이러니 저자의 다음 작품을 기다릴 수밖에. 차기작에서는 어떤 이야기로 독자들을 탄복시킬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제20회 야마모토슈고로상"을 수상하고 서점대상 2위에 오른 원작과 이런 탄탄한 원작을 바탕으로 "제28회 오타와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장편부분 그랑프리"와 "제41회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수상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책으로 즐기는 것과 영상으로 즐기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어떻게 표현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내가 머릿속에 그린 것들과는 얼마나 차이가 날지 비교해보고 싶기도 하고. 조만간 영화관을 찾아야겠다.





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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