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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평점 :
죽는 순간, 스스로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긴 할까? 여기 본인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아나톨 피숑, 그는 사후 세계에서 심판을 받는 피고인이다. <심판>은 판사 가브리엘, 검사 베르트랑 그리고 피숑의 수호천사이자 변호인인 카롤린이 피숑의 이전 생을 두고 벌이는 <심판>에 관한 이야기이다.
카롤린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적인 죽음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단어는 단언컨대 '삶의 형'이라는 단어였다. 판사 가브리엘은 피숑의 생을 두고 열린 심판에서 '삶의 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내린다. 어쩌면 우리의 생이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천국에서 우린 이번 생을 놓고 심판받는다는 것, 그리고 '삶의 형'에 처해지게 되면 또다시 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삶 뒤에 붙은 '형'이라는 단어가 삶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삶을 다시 살아가는 것은 또 얼마나 막막할지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불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인데, 그만의 작법이 느껴지는 것이 신기했다.
카롤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입장에서 보면 멍청이야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를 절대로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음을 담은 문장이라 밑줄을 그었다.
가브리엘 삶이란 건 나란히 놓인 숫자 두 개로 요약되는 게 아닐까요.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태어나서, 울고, 웃고, 먹고, 싸고, 움직이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얘기하고, 듣고, 걷고, 앉고, 눕고, 그러다…… 죽는 거예요. 각자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고 믿지만 실은 누구나 정확히 똑같죠.
베르트랑 어떤 일이 어려워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아나톨 삶이…… 두려워요.
삶이란 것이 누구에게나 사실은 두렵다는 것. 물론 아름답고, 경이롭고, 신비로운 순간도 있지만 삶의 여정엔 불안하고, 아득하고, 불완전한 순간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한 번의 생을 살아본다 한들 — 실제로 아나톨, 그는 훨씬 많은 생을 살아보았지만, 삶은 여전히 두렵다는 것. 어쨌거나, 이 책에 완벽한 생은 등장하지 않는다. 피숑이 '삶의 형'에 처해진 이후, 다시 태어나게 될 가정을 고를 때, 선택지에 있는 가정들 또한 하나같이 완벽해 보이진 않다. 문득 드는 물음은 판사 가브리엘, 검사 베르트랑, 그리고 변호인 카롤린은 어떤 모범적인 생을 살았길래 환생의 윤회에서 벗어난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물론 가브리엘의 전생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 너머로 독자에게 인간, 삶, 생과 사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생각해볼 거리를 던진다. 그의 책 말미엔 옮긴이의 말이 있는데, 옮긴이가 인용한 베르베르의 전작 <죽음> 속 대사가 그의 작품관을 대변한다.
좋은 책은 결국 한마디의 멋진 농담 같은 거 아니겠니
열린 책들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적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