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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의 미술이나 문학이나, 떠오르는 신세대 작가의 작품들을 보자면 참 당황스러울 만큼 편집증적이랄까 신경병적이랄까, 지나치게 덧바른 수식 탓에 그 의미마저 파악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다. 마치 자폐증 환자처럼 사소한 무언가에 과잉 열중 한다든지, 예민하고 비뚤어진 신경을 따갑게 건드리기 위해 철저히 '감각'에 호소하는 것들이 너무 흔하다. '본질'이라거나 '의미' 같은 내적인 어휘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요사이의 문학과 미술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개성은 지니지 못한 뻔한 상품들이 되는 것이다. 마치 일부러 '깊이'를 거부하는 듯 표피적인 감각에 치우친 채로.
아쿠타가와상 심사평에서 볼 수 있듯이, '그저 분위기 뿐인 비현실감이나 자폐나 파괴 충동, 그리고 종말의식 같은 단조로움'에 독자들 역시 싫증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트랜드에 반하여, 중세 유럽의 종교와 철학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내용을 차치 하더라도, <일식>은 근래 보기 드물게 스토리텔링에 충실하며 육중한 무게감과 깊이를 지닌 남다른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주제 역시 표면적인 감각에 의지하지 않고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과 사색을 이야기로 유도해내는 센스 또한 보통이 아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누군가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문체와 분위기가 참신하고, 더불어 치밀하게 공부해가며 의도했다는 비범한 문장력과 어휘력 역시 당황스러울 만큼 독특하다.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이 소설속의 어휘들 덕에, 이미 머릿속에서 한참 전에 잊혀져가는 한자에 대해서도 새삼 자극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당황스러움은 결코 부담감이나 불쾌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젊은 신인작가의 데뷔작이라기엔 소설 자체의 색다름과 때아닌 무게감, 깊이감에 절로 박수를 치고 싶을 만큼 충분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더우기 책 말미에 보태진 작가의 인터뷰는 또 다른 즐거움과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신인 작가의 인터뷰라는 것이 결코 간단하지도, 만만하지도 않으면서 이토록 담대하고 확고한 주관으로 명철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감탄스럽다. 또 이 작가가 나와 두달 차이 밖에 나지 않는 동갑내기라는 사실에서도 감탄과 존경이 우러난다. 이미 99년도에 작성되었다는 작가와의 인터뷰 부분을 따로 보관하고 싶을 만큼 나 자신에게 귀감이 되는 글이었다. 완성도가 한층 높다는 그의 다음 작품 <일월 이야기>를 꼭 읽어봐야겠다는 명랑한 호기심이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