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아, 마음에 쏙 드는 멋진 소설이다.
이렇게 흡족할 줄 몰랐는데 제대로 왕건이를 건졌다.

읽는 내내 등줄기에 한기가 스물거리는 것만 같아서 자꾸만 이불을 끌어다 덮어야 했지만
메마르고 음산한 와중에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해서
불쾌하기는 커녕 마치 주인공과 함께 탐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여느 도시나 풍경에 비해 20세기 초반의 스페인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하다.
그 곳의 모습이 어떤지 과거도 현재도 알지 못할 뿐더러
더더욱이 시대적 상황을 등에 지고있는 당시의 정경을 알 리가 없다.
그저 문장의 느낌을 곱씹어가며 떠올린다는 것이
안개가 짙게 깔린 어스름의 풍경,
혹은 웅장하면서도 동시에 아기자기한 저택과 건물들-
그런 정도라 이미 눈에 익숙해진 영국이나 다른 유럽의 이미지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풍경'이나 '정경' 외에도 전쟁이라든가 정치적인 상황이라든가 하는 배경을 모르다보니
아무래도 상상력에 제한이 생겨서 많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표현이 넘쳐나서
단순한 이미지 뿐만 아니라 여러 인물들의 심정이랄까 정황이랄까 하는 것들이
끝없이 내 안에 떠오르고 그려지고를 반복하는 덕에
글자를 읽은 것이 아니라 아주 멋진 영화 한 편을 보고난 것처럼 배가 부르다.

미사여구로 치장하지 않고도 모든 느낌을 충분히 연상케 만드는 문장력,
글자를 읽으면서 곧장 눈 앞에 살아있는 필름이 지나가는 것만 같은 시각적인 표현력,
다른 생각 할 틈 없이 그저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치밀한 짜임새,
잘 엮인 이야기에 충분히 녹아들어있는 드라마틱한 내용.
'소설'로서 갖춰야 하는 여러가지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는 '이야기 다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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