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흔들리는 때가 있다. 내가 가끔씩 삶에 방향성을 잃을 때, 그런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건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이었다. 완벽하다 못해 세기에 몇 나올까 말까한 위인의 이야기보다는 서툴지만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서툴지만 살아갈 수 있어'라는 묘한 안도감을 얻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지금 슬럼프다. 가끔은 문제도 알고,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아도 도저히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때도 있는 법이다. 아니, 실은 그런 때가 좀 많은 것 같기도 하다. 다들 직장을 찾는 시기에 아르바이트로 외국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도 되나 싶기도 하고, 내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다 잃어버렸고, 폭염이란 말에 걸맞게 죽여주게 더운 날씨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있다. 그렇게 완전히 축 쳐진 오후에 책을 펼치면서, 다섯 장만에 '아, 이거 너무 와 닿는다' 라면서 몰입하게 될 줄은 몰랐다. 20대 여자 특유의 감수성이 그런걸까. 정말 이해하고, 와 닿아서 적어서 보관하고픈 구절들이 한장을 넘기기도 전에 계속 쏟아져서 받아 적는 것도 포기하고 한 편씩, 한 편씩 계속 읽었다.

 

여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여러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옳고, 그르다는 말없이, 삶에 있어 여러번 찾아오는 평범한 전환기를 묘사하고 있는 이 단편들은 다 읽고 나면 '그래서 어떻게 된건데?'라는 말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생이 그렇다. 기승전결을 따라가 어느 순간에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계속 이어질 뿐이다. 죽을만큼 아프고, 슬퍼도 아무렇지도 않게 또 다음날이 오고, 반대로 아무일 없이도 다음날은 또 온다.

 

그냥 그렇게 작가의 욕심대로 진솔한 일상만 담다보면 재미를 놓치기 마련인데, 각각의 이야기들은 그 매력을 가지고 독자를 끌어당긴다. 일상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흥미있는 소재를 끌어들이고 삶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노련한 이야기 전달방식은 솜씨 좋은 이야기꾼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든다.

 

대중성에 대한 증명은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여타의 문학상들이 문학성에 중점을 둬, 무슨무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이 오히려 재미없는 작품이란 공공연한 후문이 돌고 있지만, 나오키상은 대중문학을 대상으로 하여 일반 대중인 독자들이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은 읽을만하다'는 확신을 심어 주고 있다. 나 역시 소설의 제목이나 작가보다도 '나오키상 수상'이란 글자가 먼저 들어왔으니 말이다.

 

이전 수상작인 가네시로 가즈키의 'GO'나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와 같은 작품이 가지는 유쾌함이 잊혀지지 않고, 그 다음 수상작을 기대하게 한다. 유쾌함만이 아니라 따뜻한 감동을 담은 아사다 지로의 '지하철'과 섬세하고 조용한 에쿠니 가오리의 '울 준비는 되어 있다'도 이 상을 수상하여 단순 재미만이 아닌 깊이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런 이전 작품들의 성향에 비추어 모리 에토의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에 대해 평하자면 따뜻한 감동을 담고 있는 책이다. 거기에 덧붙여 조용한 강인함을 가진 책.

 

이 책의 여섯 개의 단편에서 연관성 없는 다양한 직업과 상황을 자연스럽게 묘사해내는 것에서 현대의 일본문학이 가진 가벼움을 넘어설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섬세한 여성으로 글을 이끌어나가다가, 갑자기 직장과 야간학교를 병행하는 굳건한 남자고학생으로 변하고 나이 40의 이미 사고관이 굳어버린 출판사의 사원이 되어 젋은 영업사원을 못미덥게 보는 눈으로 변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분명히 의구심이 들게 될 것이다. 과연 같은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이 맞나? 라고. 그렇게 말할 정도로 각 상황에 자연스럽고 또 사회 그 분야만의 깊이를 가지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무라카미 나오키,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일본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에게서 매너리즘을 느끼는 것은 나뿐일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며, 전달하는 방식도 작가의 특색이 묻어난다. 하지만 짧은 주기로 계속 나오는 소설은 조금 달라진 설정 이외에 뭐가 바뀌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작가를 흠모해서 기다리는 팬들에게는 신간이 기쁨이겠지만, 신간의 유효기간이 지나고나면 '그 작가는 원래 그래'라는 말에 묻어가는 단행본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번 단편집을 읽으며 느낀 것은 아사다 지로의 다양한 책들이었다. 철도원과 같은 따뜻한 감동에서 창궁의 묘성과 같은 진중한 역사물, 파리로 가다와 같은 개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층은 이게 과연 같은 작가가 쓴 책인가 싶을 정도다.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다양하게 글을 쓴다는건 말은 쉬운 일이지만, 작가의 폭넓은 시야와 역량이 받혀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자신이 아는 만큼밖에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모리 에토도 분명 그런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아동문학만을 쓰다가, 그 틀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분명 하나의 세계를 개척한 일이다. 앞으로 어떤 작품이, 어떤 장르로 나올지가 기대되는 작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