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쫑쫑 > 2010년 11월 8일 연극 <세 자매 산장> 후기^^

   

 


  내게 지난 시절의 추억은 앞날의 푸르름을 위한 좋은 거름이 된다. 어머니께서 밥 숟가락 위로 올려주시던 고등어 자반의 고소한 냄새, 아버지의 바바리코트 옷깃에서 느껴지던 바깥 공기의 서늘함. 20세기 끝자락에 대한 막연한 향수(鄕愁)는, 추억이란 이름의 향수(香水)로 내 몸 사이사이 묻어있다. 과거를 이미 ‘지나온 날들’에 불과하다 치부할 수 있지만 나 같은 과거 회귀형 인물들에게 과거는 ‘지나갈 날들’의 방향성을 잡아주는 나침반이 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과거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과거는 끔찍한 악몽이며 발목을 조이는 족쇄일 뿐이다. 연극 <세 자매 산장>의 주인공들에게 과거는 이와 같다.

 연극은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간첩단 사건인 ‘동백림 사건’을 그 골자로 한다. 이 사건은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분된 당시의 한반도 상황과 인간 존엄성 존중보다 이데올로기의 강요를 자행하던 정부의 국가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를 보여준다. 40여년이 지난 이후에도 세 자매는 이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에게 독일 베를린은 여전히 ‘동백림’으로만 존재한다. 그들은 현재에 살며 과거를 향해가고 있다.

 동백림 숲 어딘가에 살고 있을 오빠를 찾기 위해 서령은 산장을 꾸려나간다. 은령은 언제든지 동백림으로 떠나갈 수 있게 여행용 트렁크를 모아오고 채령은 종환의 품에서 ‘유럽 냄새’를 맡으며 그 곳에서의 행복한 삶을 꿈꾼다. 이 세 자매에게 아무도 오지 않는 산장은 그들을 담아두는 여행용 가방에 불과했다. 자연스럽게 자행된 이 속박 아래에서 그들은 내일을 망각하며 동백림으로 계속해서 회귀해 간다.

 존재 이전에 하나의 ‘신념’이 되버린 오빠는 더 이상 그 존재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들에게 ‘동백림’이란 장소도 알맹이 없는 하나의 모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유산으로 물려받아 40 여 년간 지켜온 산장 부지도 결국 남의 땅이었다. 연극 내내 흔들리던 종소리처럼, 그들의 삶도 결국 모양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이 연극을 보기 전 ‘동백림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연극을 보며 그들의 슬픔에 직접적으로 동감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연극이 끝난 뒤, 초일류국가를 꿈꾸는 대한민국 아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저 먼 타국 어딘가에서 사라져간 사람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이런 연극을 통해 그들은 부활하며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우리의 슬픈 현대사를 당당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의무라 생각한다.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모른 척 지나가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연극은 끝나서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내 가슴만큼은 어느 때 보다 뜨거워졌다. 이 데워진 가슴을 더욱 뜨겁게 하기 위해 발걸음을 도서관 쪽으로 돌린다.







좋은 작품 볼 수 있게 해주신 알라딘. 감사합니다!! 자주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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