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의 전설, 크레이지 호스
마리 산도스 지음, 김이숙 옮김 / 휴머니스트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단 한 사람의 요구에 의해서도 역사는 새로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역사주의의 근본 이념이다. 따라서 새로운 역사주의가 쓰는 '역사들'은 기존의 역사가 보여주는 타자성의 억압이라는 이미지의 반대편에 타자성과의 공존과 화해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최근 소수 민족의 흥망과 성쇠를 다룬 역사서가 하나의 '붐'을 이루면서 출간되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들'에 어떤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낭만화'라는 위험이 그것이다.

그것은, 소수 민족을 미개하다거나 교육받지 못했다고 배제하는 문명국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그 미개하고 무식한 소수 민족이 창조하고 또 영위하고 있었다고 믿는 낭만주의 정신에서 기인한다. 타자성과의 진정한 만남은 여기서 사실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낭만화된 역사들은 대개 역사 기술의 대상을 자기 투영물로 삼아 타자성의 자의적 왜곡이라는, 이번에는 보다 교묘한 또 다른 억압의 이미지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떠올려 보면 그 점은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니까 소수 민족의 흥망과 성쇠를 살피면서 보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이루고 있던 그들의 쇠망에 가슴아파하고 그들의 문화를 미화하는 식의 '역사들'과 그 역사들에 대한 감상적 접근은 '역사의 낭만화'라는 새로운 역사주의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디언의 전설, 크레이지 호스>라는 책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은 미국 인디언의 멸망사를 '크레이지 호스'라는 한 영웅적인 인디언 추장을 통해 그려간다는 점에서 일단 타자성을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낭만화된 역사들의 일부라는 혐의가 있어 보인다. 물론 역사의 낭만화라는 위험을 이 책이 완전히 비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타의 '미국 인디언 멸망사'들과 다르게 거기에는 인디언의 문화적 세목들이 풍부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점은 역자도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는데, 실제로 멸망의 드라마틱한 전개가 아닌 문화적 세목들의 풍부한 제시는 타자성에 대한 참된 이해에 필수적인 토대가 된다.

'드라마틱한 스케일'이 아닌 '문화적 세목' 속에서 타자성과의 진정한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를 버리고 '너'에 투신하는 심각한 모험 없이 타자의 진정한 면모를 이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닌가? <인디언의 전설, 크레이지 호스>에는 분명 '미국 인디언'이 살지 않고 온전히 '인디언 그 자신들'만이 산다. 이 책은 인디언에 관한 책이기도 하지만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에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책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그런 만큼, 매우 엉뚱하게 들릴 테지만, 이 책은 실연당한 사람들이나 실연시킨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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