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첫 문장 -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세계문학의 명장면
윤성근 지음 / MY(흐름출판)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문장은 한 세계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을 최고의 자리에 두고자 하는 것은 쓰는 이의 본능이 아닐까 한다. 나는 평이한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작품도 좋아하는 편인데(굳이 따지자면 첫 문장에 비중을 두는 편은 아니다), 출발점에 대한 욕망(?)을 덜어내는 것 또한 최고의 첫 문장을 쓰는 일만큼 역량을 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어떤 첫 문장이든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다(어쩌다 보니 시작부터 저자의 생각에 반하는 글을 쓰고 있다. 웃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첫 문장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첫 문장 덕분에 머릿속에 오랫동안 각인되어 있는 작품이 여럿 있으니 말이다. 그중 두 가지를 꼽자면 《설국》과 《좀머 씨 이야기》가 있다. 《설국》의 첫 문장은 문학적으로 최고의 첫 문장이자 번역가에게는 시련의 첫 문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나 또한 번역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라면 이 문장을 어떻게 옮길까 끙끙 앓기도 했다.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설국이었다. 밤의 끝자락은 이미 하얘졌다. (범우사)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민음사)

현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雪)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문예출판사)

(...)

- 번역본의 수만큼 다양한《설국》의 첫 문장

 

 

이 작품의 첫 문장은 독자를 설국으로 이끄는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는 동시에 아름다움을 충실히 드러내고 있다. 수많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긴 터널 중 가장 완벽하게 제 역할을 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설국》의 터널은 독자를 소설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이 첫 문장을 읽고서 독자는 자신이 이미 터널을 지나 설국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좀머 씨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오래 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 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내 키는 겨우 1미터를 빠듯하게 넘겼고, 내 신발은 28호였으며, 나는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 정말로 날 수 있었다.

- 《좀머 씨 이야기》의 첫 문장

 


일본어 번역을 하고 있는 게 의아할 만큼 나는 20대 초반에는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중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늘 내 상상의 중심에 있었다. 어떻게 보면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짝사랑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법한데, 나는 《향수》보다 호흡이 짧은 《비둘기》 《콘트라베이스》 《깊이에의 강요》 등의 작품에 그의 상상력이 더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좀머 씨 이야기》의 첫 문장은 이보다 경쾌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특유의 리듬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문장을 떠올릴 때면 우산을 들고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웃음이 나기도 한다(사실 나는 어렸을 적에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날아다닐 준비를 하곤 했다. 어쩌면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이 문장을 더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수다스럽게 글을 쓰다 보니, 앞에서 '나는 첫 문장에 그리 비중을 두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쩌면 나는 누구보다 첫 문장을 중시하는 독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웃음). 사실, 《내가 사랑하는 첫 문장》의 주제가 주제인 만큼 저자가 이 책을 어떻게 시작했을지 많이 궁금했는데, '여러분은 지금 이 책의 첫 문장을 읽었습니다'라는 산뜻한 문장으로 저자는 독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산뜻한 출발을 위해 저자가 얼마나 고심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살포시 웃음이 났다.


 

 

 

첫 문장은 신이 내린 선물이다 -p15


 

그리 무겁지도 그리 가볍지도 않은 저자의 첫 문장 덕분에 나는 이 책을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적당한 무게감을 가진 첫 문장을 찾고자 한 저자의 노력이 통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의 저자는 현재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헌책방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그가 읽은 책만 파는 헌책방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사랑한 첫 문장》을 읽다 보니 읽고 싶은 책 리스트가 급격하게 늘었다. 독자에게 책을 소개하는 일에 천부적인 그의 능력이 이 작품에도 발휘된 모양이다(웃음). 조만간 저자가 운영한다는 헌책방에도 들러볼까 한다. 그가 어떤 첫 문장으로 손님을 맞이할지 궁금하기도 하니 말이다.

http://blog.naver.com/nahh1290/220437344699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이상 《날개》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 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부엉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그 일은 잘못 걸려온 전화로 시작되었다.

- 폴 오스터 《뉴욕 3부작》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