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 - 페미니즘의 관점
김동진 외 지음, 김동진 기획 / 학이시습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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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렇게 성실하게 만든 책이라니. 이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품이 들어갔을지 생각하니 페이지를 아껴 읽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교육’에 대한 이들의 고민이 진지하고 깊이 있다. 각각의 저자들이 던지는 문제의식마다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지만, 그중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만든 문장을 한국문학 연구자 민지 님의 글에서 만났다. “대화는 무조건 ‘좋은’ 것일까?”(79쪽)


나에게도 대화에 대한 ‘환상’이 있다. 마음을 열고 경청하며 역지사지하다 보면 ‘해결점’ 혹은 ‘통하는 지점’을 찾게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물꼬가 트이면서 의도치 않게 서로의 마음자리에 닿았던 대화의 경험들이 한 번, 두 번 쌓이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정해야 했다. 그런 경험은 정말 ‘한 번, 두 번’이었음을. 대부분의 대화는 뻔하고, 지루하고, 제자리를 맴돌고,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고, 소모적이었음을.


생각해봐야 했다. 나는 주로 ‘누구’와 ‘어디’서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는가. 좋은 대화는 그저 어쩌다 운 좋게 얻어걸리는 경험인가. 나는 좋은 대화를 위해 얼마나 준비를 했던가. 나에게 좋았던 대화가 상대방에게도 좋았을까. 내 기존의 생각을 강화시키는 말만을 좇지는 않았나. 상대방의 틀 안에서 입맛에 맞는 말만을 하지는 않았나.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자고 하면서 우리는 정말 자유로웠나.


이 책이 이야기하는 ‘교육’은 “정해진 답을 주입하고 외우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자기 삶의 페미니즘 이슈를 스스로 성찰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피드백을 주고받음으로써 자신이 속한 사회를 페미니즘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교육”(머리말)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의사소통할 수 있는 신뢰로운 관계, 평등한 관계, 열린 대화의 장,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 상대방에게 영향을 받겠다고 하는 부드럽고 낮은 마음이 필요하다. 대화는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지만, 페미니즘 교육은 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대화에 대한 환상은 버리지 않되,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어정쩡한 태도에서 벗어나, 좋은 대화를 위해 준비하고 더 많이 대화하고 더 자주 실패하고 바라건대 그러면서 더 자주 좋은 대화를 경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유진 님은 “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평등한 관계 맺음이 되어 있어야 한다”(162쪽)고 말했다. 내 말과 내 삶의 괴리감, 내 말과 우리 관계의 괴리감, 좋고 아름다운 말들이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소외시킨다면, 그 말은 그냥 허공에 흩어지고 말 것이며 흩어져 사라지면 오히려 다행인데 상대방의 마음에 불쾌함과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런데 평등을 이야기하기 위해 평등한 관계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면, 어느 세월에 평등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 우리의 엉망진창을 우리 자신이 익히 아는바, 유진 님의 말을 반대로 적용해본다면 ‘불평등한’ 관계일지라도 우리의 ‘불평등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화를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덮으며 두 가지 메모를 했다. 타성에 젖지 말자. 내 삶에 등장하는 사람은 제각각 다른 존재들이며, 자주 익숙하게 만나는 사람도 매일매일 다른 맥락으로 나에게 온다. 정형화된 관계의 틀로 사람을 뻔하게 대하지 말자. 그것이 일차적인 나의 ‘준비’가 될 것이다. 또 하나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자. 어떤 사람이 기억에 남는가? 진짜 좋았던 사람과 진짜 별로였던 사람. 최악은 면하자는 것이다.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려다가, 임팩트를 남기려다가, 말실수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페미니즘 이슈는 특히나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나의 전략은 ‘다시는 저 사람하고 얘기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상대방이 뒤돌아서서 ‘흠, 내가 저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했지?’ 하고 떠오르는 게 없는 사람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


계몽이 아닌 내가 속한 공간과 관계를 바꿔 가는 일. 우리의 현실이 아직 미미할지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성찰하고 고민하고 행동하는 저자들의 움직임에서 희망을 본다. 이 책을 읽은 우리들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 희망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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