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위의 불길 1 - 휴고상 수상작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8
버너 빈지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은하계 외곽에서 '사악한 힘'이 탄생해 한 행성의 인류 정착지를 파괴한다. 정착지에서 탈출한 지구인 가족은 은하계 안쪽 잘 알려지지 않은 한 행성에 불시착한다. 부모는 전부 원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누나와 동생은 서로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적대하는 두 세력에 의해 흩어진다. 한편, 또다른 외곽 행성에서 한 인간 여성이 어린 동생이 보낸 구조요청 전파를 수신한다. 그녀는 그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우주선을 출발시키지만 사악한 힘에 의해 그녀의 고향 행성이 파괴당하고, 심지어 그 사악한 힘이 조종하는 함대에 쫒기는 신세가 된다.


...라는 줄거리는 아무리 들어 봐도 새로울 건 없는데 뭐가 경이적이라는 거임? 전형적인 스페이스 오페라 식 우주 활극인데?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떤가?


이 은하계는 실제로는 네 개의 권역(zone)으로 나뉘어 있다. 네 권역의 물리학 법칙은 각기 다르게 동작하는데, 대표적으로 속도의 제한이 있다. 은하계 외곽 권역으로 나갈 수록 빛과 물질이 빛의 속도 상수 (c=299 792 458 m/s) 를 초과하는 것이 가능하고, 세 번째의 권역인 '역외권(The Beyond)'에서는 대략 1광년(빛이 1년 동안 갈 수 있는. 은하계 지름이 10만 광년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대충의 스케일을 이와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의 거리를 한두 시간 내에 돌파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속도 제한 해제는 역외권과 그보다 더 바깥 권역인 '초월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 권역인 '저속권(The Slow Zone)'은 빛의 속도 상수가 속도의 제한이 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물리학 법칙에 의해 돌아간다. 인류는 아주 오래 전 저속권에 속한 지구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역외권에 가까웠던 '뇨라'라는 행성에 도달한 후에, 드디어 역외권으로 진입해 은하계 문명 네트워크에 합류했다. (인류가 쓰는 언어가 '삼노르스크어'라는 걸로 보아, 뇨라 쪽으로 탈출한 인류는 아마도 북유럽 계통일 듯.) 이 시점에 이미 지구와 뇨라는 역사 속의 장소이다.


역외권 문명은 은하계의 수만 가지 지성체 문명들이 자유롭게 교역하고 지식을 교환하는 체제이다. 인류는 뇨라를 떠나 이 문명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지내온 지 수십 수백 만 년이 되었다. 역외권 문명들은 웬만해서는 저속권에 가려고 하지 않는데, 물리학 법칙 속도 제한으로 인해 한 번 저속권에 떨어지면 우주선 속도가 안 나와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저속권에 속한 문명은 그 속도 제한 때문에 고립된 상태로 흥망을 되풀이하다 쇠퇴하며, 역외권 에서처럼 수많은 문명이 참여하여 교역과 교류를 하는 네트워크를 이루지 못한다. 저속권과 역외권의 경계면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며, 경계면 자체가 계속 유동하는 '폭풍'이 일어난다. 역외권을 항해하는 우주선이 폭풍에 휘말려 저속권 깊숙히 떨어지게 된다면 다시 역외권으로 돌아올 때까지 몇십~몇백 년이 걸릴 지도 모를 일이다.


저속권의 더 아래이자 은하계의 중심에는 '무사고 심부(The Unthinking Depth)'가 있는데, 여기서는 물리학 법칙에 따른 속도 제한이 더 심각하다. 여기에서는 우주선은 아예 항행 불능 상태에 빠져버린다. '무사고'라는 이름에서 보듯, 이 물리학적 속도의 제한은 지능의 최고한도도 정해버린다. 이는 뇌나 인공지능의 구조에 따라 정보통신의 속도도 제한이 되기 때문이다. 무사고 심부에서는 모든 지능의 사고는 극단적으로 느려지며, 유인원 이하의 지능을 가진 생물들만이 존재하게 된다. 컴퓨터 또한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 저속권은 상황이 좀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공지능을 만들지는 못한다.


은하계 지도. 중심부부터 '무사고 심부', '저속권', '역외권', '초월계'


역외권의 문명이 그렇게 흥할 수 있는 이유도 나노테크놀로지, 생물-기계 인터페이스, 인공지능 등 온갖 기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AI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며, 또 초광속 통신도 가능하기 때문에 온갖 지능을 가진 생물들끼리의 인터넷 같은 통신 네트워크가 활성화된다. 어짜피 여기서 하는 이야기들은 21세기 지구에서 이루어지는 디시인사이드 같은 커뮤질과 다를 바 없긴 하지만.


그리고 문제의 네 번째 권역, '초월계(The Transcend)'. 여기에서 물리학 법칙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허용하며, 이 권역에 진입한 생물이나 인공지능은 아예 초월적인 집단 지능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렇게 초월화를 거친 지능을 역외권 주민들은 '신선(powers)'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하계에 대한 관심을 잃고 자기들만의 세계에만 몰두한다. 그들은 역외권 주민들조차 마법처럼 보이는 기술들을 구현하는데, 그 기계제품들은 역외권에 떨어지면 고가에 거래된다. '사악한 힘'이라고 아까 언급한 '역병' 또한 여기서 발생했다.




극한의 설정덕후라면, 이정도 설정을 줄줄이 읖는 것 만으로도 이 소설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이롭고 장엄한 은하계에서 얼마나 많고 얼마나 재미있는 스토리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설정놀음이 이게 끝이 아니라는 점이 이 소설의 무서운 점이다. (그러니까 더 말해 보자면, 인간 가족이 불시착한 하위 역외권의 외진 행성의 원주민은 개나 늑대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인데, 이들은 심지어 4~8마리의 개체들이 집단을 이뤄 서로간의 음파통신을 통해 지능을 공유하여 하나의 지성을 이루는 생물이다. 게다가 등장하는 어떤 생물은 식물인데 수레 같은 것을 타고 지능을 얻었고, 어떤 생물은...)


개를 닮은 집단 외계 생물, 다인족(Tines) - 그림 저작자 불명


내게는 결말은 좀 약간 아쉽게 느껴졌는데, 장엄하고 우주적인 설정력에 비해 결말은 등장인물들과 그 주변 사회의 작은 파급력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말까지 다 읽어본 독자들에게 나의 이 주장은 논쟁적이다. 주변 사회의 작은 파급력뿐이라니? 내가 읽어본 바로는 전혀 아니던데? 하지만 내 말씀은 '그 우주적인 스케일의 설정에 비해 작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악한 힘'을 처치하는 데 너무 많은 희생이 이루어져, 도대체 이 결말이 어떤 정의관을 가지고 있는지 좀 아리송했다. 하지만 난 설정만으로 매우 만족이기 때문에, 결말 따윈 이 소설의 큰 단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은이 '버너 빈지'는 특이점주의자이다. 특이점주의의 성경인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를 읽어본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는 인류가 영혼을 디지털화해서 우주공간에 업로드하는 다소 황당무계한 미래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버너 빈지의 논픽션 저작을 읽어본 적은 없기 때문에 그 또한 이런 관점에 동의하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초월계로 올라간 지능이 신선이 된다'는 설정이 이와 비슷한 점이 있기에, 이정도만으로 특이점주의와의 관련성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정도의 연결성 만으로는 특이점주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리는 건 좀 어려워서, 배경지식 없이 이 소설만 읽고 버너 빈지가 특이점주의자인 것을 유추해 내긴 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특이점주의'는 이 소설을 읽는 데 주요한 키워드는 아니다.


극한의 설정딸에 힘겹게 적응하는 일이 아마 소설 초반 진도에 있어서 독자의 지난한 과제가 될 것인데, 아무래도 나 같은 설정덕후만인 이 소설의 가치를 인정할 것이다. 배경은 엄연히 스페이스 오페라지만, 설정의 하드함에 따라 이 장르는 '하드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이름붙여졌다. 장대한 배경의 '스페이스 오페라'에, 극한으로 하드한 설정이 덧붙여지니 경이로운 세계관의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진짜로 이정도까지 하드한 설정을 가진 SF소설도 애초에 희귀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과정은 나에게는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사실 내가 수많은 SF를 읽는 이유 또한 희귀할 정도로 어떤 경지에 이른 하드함을 담은 소설을 찾아내 즐기기 위해서이다. "원래 SF는 이렇단 말입니다!"를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한국 SF 장르의 흥행에 발맞춰 이정도로 하드함이 갖춰진 소설도 좀 나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겠지? 절판된 소설이라 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애초에 절판된 이유는 안팔렸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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