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안의 낯선 자들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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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라는 심리가 어떻게 어떻게 자신의 신념과 소망과는 정반대인 행동을 하도록 몰아가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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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 페미니즘이 계급에 대해 말할 때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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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여기서 자유는 세속적인 조건에서 초탈하는 것이 아니라 돈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돈이 많아서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자본가가 잠도 아끼며 노동자를 착취하는 여러 방법을 궁리한 결과로 발전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자유’를 얻는 일은 당연히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돈이 ‘자동으로 들어오는 구조’를 만들면 돈 벌 시간에 더 즐거운 일,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다고 유혹하는 광고들은 실제로 IT 업종의 사람들이 파이어족이 되고, 유튜버가 부자가 되는 현실 속에서 자본도 생산수단도 없는 사람들을 혹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장사 미끼가 된다.


과거 미국의 아메리칸드림이나 기업가정신처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자기계발 담론이 계급의식을 지우고 있다. 고대로부터 가난한 자와 연대하는 사람은 있어왔고 복지국가의 출현이 무임승차 담론을 일찍이 형성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혐오가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 ‘가난은 질병이다’라는 말이 유명 투자 전문가의 입에서 버젓이 흘러나오고, 자수성가 한 이가 착한 척 그만하고 ‘악인이 돼라’고 말하는 책이 베스트셀러 상위에 올라온다.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 어떻게 해서든 사다리를 올라타고자 하는 사람들을 타깃으로 하는 자기계발 담론, 투자 담론을 재생산하는 이들은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해 돈을 번다.



평소에 느낀 이러한 불편한 감정, 혹은 분노가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를 집어들게 했다. 이 책은 페미니즘 이론가인 벨 훅스가 2000년에 출간한 책 <Where we stand>의 한국어판으로, 2008년에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출판사를 바꿔 다시 나왔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라는 질문형 문장으로 제목을 바꾸었을 때, 독자에게 끌어내고자 하는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자리’는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가르는 사회 내의 자리, 즉 계급이다. 그리고 이 계급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구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행동과 기본적인 전제, 행동거지에 관해 배운 것, 자신과 남에게 기대하는 것, 미래에 대한 생각,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식,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등 온갖 것과 관련”(192)되는 것이라는 리타 메이 브라운의 설명을 빌려, 계급 문제에 더욱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벨 훅스는 말한다.


벨 훅스는 그 자신이 계급적 배경의 급격한 변화를 겪은 이로서, 1950년대 미국 켄터키주의 흑인 격리 지역에서 태어나 “한 사람이 벌어오는 노동 소득으로 아이 일곱, 어른 둘이 생활하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자랐고, 지역의 여자대학에 진학했다가 뛰어난 학업 능력 덕분에 캘리포니아주의 스탠퍼드대학교에 입학한다. 스탠퍼드대학교는 설립 때부터 “평등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가치를 중요시했던 곳이었기에 벨 훅스는 이상적인 대학생활을 꿈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동계급 사람들의 삶에 대해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동급생들, 노동계급을 무시하는 “부르주아 흑인 엘리트”들을 보며 혼란을 겪는다. 결국 대학생활을 견디게 해준 건 자신이 소중히 여긴 정신적 유산, “근면과 정직, 출신에 얽매이지 않고 모두를 존중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내 위치를 다시 살펴”보는 일, 즉 계급 의식을 갖는 것이었다고 회상한다(77).



자기 고백적 서사를 따라 나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면, 나는 울산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계기로 서울로 상경해 이곳에 살고 있다.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서로의 집안 사정은 잘 모르고 지냈다. 거대 공업도시이기에 많은 아버지들이 공장에서 일한 까닭도 있다. 나의 아버지도 공장 노동자였지만 현대자동차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 2000년 이후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이사하는 이웃이 생가기면서 동네 안에서도 계급이 나뉘는 광경을 목격하긴 했지만 계급 격차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계기는 대학교에서였다. 1학년 때는 그저 성인으로서 만끽하는 대학생활에 취해 어느 누구 할 것없이 모두 어울려 놀았지만 점차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들을 느꼈고, 미대라는 조건 때문인지 학회, 사회운동단체, 중앙 동아리 같은 것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바쁘게, 하지만 공허한 상태로 서둘러 학부를 마쳤다. 이때의 시간은 감정적으로도 응어리를 남겼다. 당시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부모님, 노동계급의 아버지를 부끄러워했고, 계급적 성장을 꿈꿨으며, 그 성공을 과시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학부를 졸업하고 내가 나름의 역할을 할 곳을 기웃거리면서 깨달았다. 나는 그러기엔 계급적 배경이 다른 데다가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 부에 대한 열망이 크지가 않다는 걸.


이후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소비주의에 관심이 있던 나는 잠시 들불같이 일어난 페미니즘 이슈에 흥분한 한편, 내가 운동에 몸담는다면 빈곤운동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교 때부터 막연히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가, 부를 과시하는 세상이 거북스러웠다. 더욱이 이렇게 양극화가 심해지는 서울에서의 경험 때문에 그러한 부대낌은 더 심해졌다. 2005년 청계천 노동자의 내몰림, 2009년 용산참사, 2011년 포이동 화재, 2014년 송파구의 세 모녀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이어진 생활고로 인한 자살 등, 내가 서울에서 살면서 보고 들은 안타까운 죽음들에는 가난이 있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한두번 연대 장소에 가거나 정기 후원금으로 운동단체에 마음을 보태는 일에 그쳤지만, 정말 근본적인 변화는 빈곤운동, 계급운동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일 수는 없지만 벨 훅스의 말처럼 “이상을 꿈꾸는 운동이라면 무엇보다 노동계급과 빈곤층 여자들이 처한 구체적인 조건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202)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이 무색하게 점점 더 부자를 선망하는 사람들, 그런 욕망을 부추기는 미디어가 도처에 있다. “다양한 계급 특권을 가진 사람이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이 가졌으므로 자신은 가난하다는 투로 말하는 소리”가 온갖 매체를 통해 들리고 “계급 특권이 없는 사람들은 부자와 동일한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리라 믿기 때문에 부자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동조하면서 스스로 착취 대상으로 전락”(144)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갈수록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물질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각 개인의 책임이라고 믿게 되었”고, “계급 배경에 상관없이 각자 자신의 경제적 번영을 좇으라고 권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 가난한 사람과 연대하기란 쉽지 않”게 되었다.(93)


현재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더욱 암담하다. 임금 체불에 대한 노동계급의 시위와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대해 경제 활동을 방해한다느니, 시민들의 발목을 잡는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정치인들의 말은 사회에 던지는 강력한 시그널이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처지와 시설에 갇히거나 목숨을 걸고 이동해야 하는 장애인을 무시하고 고립시켜도 된다는 메시지를 준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이들에 관한 관심 부족은 무엇보다 좌파가 이런 현실을 무시한 채 권력자의 비리만 신경쓸 때 더욱 심해진다”(94)는 벨 훅스의 진단은 지금 한국의 상황과 꼭 들어맞는다. 그나마 진보적인 의제, 사회적인 약자에게 집중하던 정당들은 거대 양당의 싸움에 밀려 점점 영향력을 잃어 정당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은 “가난을 만들어내는 조건을 없애려고 애쓰지 않는다.”(235) 그러기는커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계급을 공고화하는 제도들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만들고 있다.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를 읽으며 자본가-노동자, 금수저-흙수저, 건물주-임차인 등 범람하는 이분법적 언어들을 넘어서 더 많은 위치를 포함하는 계급의식을 생각했다. 벨 훅스가 에세이의 형식으로 성장 배경, 라이프스타일, 인종, 페미니즘 내 차이, 절대적 빈곤층과의 관계, 부동산의 소유 문제와 자신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이야기했듯이, 우리 역시 자신이 가진 모든 특권을 돌아봐야 하고, 또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점검해야 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어쩌면 특권층에 속하는 교수이지만 스스로 흑인, 페미니스트, 노동계급 출신, 여성으로서 그 어떤 조건도 놓치지 않고 계급에 대한 담론을 만들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가치가 있다. 우리는 하나의 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계급 의식은 인종, 성별, 젠더, 교육 수준, 거주 지역 등과 교차하며 서로 다르게 경험된다. “계급은 돈 이상의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할 때까지,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특히 빈곤층과 가난한 사람이 겪는 문제가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계속해서 약탈적인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상황에서 권력을 쥐지 않은 그외 우리는 계급을 초월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287)


변화에 우선되어야 할 것은 나의 자리를 인지하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끌어안는 일이다. 계급, 여성, 장애, 젠더, 가족, 인종,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사회와의 연결고리로서 내포되어 있다. 계급의 사다리에 올라타 있는 듯 여겨지더라도, 계급에서 초월한 평화로운 상태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도, “이 사회는 결코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22)며 “다양한 계급을 넘나드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무척 어렵다”는 현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현실 인식이 선행되어야 나의 자리를 생각하고, 이 사회를 변화시킬 방법을 실질적으로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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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아래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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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해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해인은 서울 근교(로 추정되는) 지역, 젊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동네의 중고물품 가게 '해동중고'에서 일한다. 초중고를 같이 다닌 우경과 해인은 서로의 집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해인의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밤 산책을 하고, 어디 멀리 다녀온 날에는 서로 마중을 나오는 다정한 연인 사이다. 해인의 주변에는 해동중고의 단골인 장미와, 어느 모임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은 유진씨, 초등학교 동창이자 우경과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맡기도 한 성규가 있다. 또, 해동중고의 사장님과, 알바생, 가게 옆 공터에 자주 오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환희, 엄마와 친해 이모라고 부르는 이웃도 있다. 이러한 인물들과 해인의 만남과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지는 가운데 훌쩍 일 년이 지난다.  아직 눈이 내리는 3월에 시작해 그해 연말에 끝이 나는 소설. 그 안엔 별다른 사건이랄 것도 없다. 길지 않은 대화도, 평화롭게 흘러간다.


“우경이 더없이 좋다고 느낄 때마다 왜인지 그날의 우경이 천천히 떠오르곤 한다.

우리는 누구도 그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적이 없다.”(51)


하지만 이 소설은 커다란 사건을 수면 아래 깔고 있다. 해인과 우경은 “베트남에서 그애를 잃고 한국으로 돌아와 모든 일상을 잃어버렸을 때”(60) 한 번 이별을 했었다. 하지만 우연히 둘이 자주 갔던 미용실에서 만난 후 다시 가까이에서 서로 챙기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이들이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 소설 안에서는 알 수 없다. 독자로서는 자식을 잃었나보다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잃었다는 ‘그애’가 어린 아이인지, 유산을 한 것일지, 어쩌면 정말 오랜 시간 함께했던 반려동물을 잃어버린 건 아니었을지, 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무튼 그애를 잃은 그때, 우경의 반응은 해인에게 상처를 남긴 듯하다. 우경이 좋다고 느낄 때마다 왜인지 그날의 우경이 떠오른다. 우경이 실수를 한 걸까, 그것도 모르겠다. 해인은 한국으로 돌아와 일상을 잃을 만큼 크게 아팠다. 그는 그저 이전과 무관한 일을 찾아 중고물품 가게도 흘러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해동중고라는 장소는 도무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던 그에게 버려진 물건을 깨끗히 닦아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는 회복의 의미를 넌지시 심어주었는지도.  

이제 둘은 다시 만나 손을 잡고 걷는다. 그날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은 채. “저절로 되는 것은 없지만 억지도 되는 것도 없더라고요.” 유진씨의 말이다. 아마 해인은 이 말과 모양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여러가지 문장을 그동안 숱하게 생각하며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과 아직 남아 있는 것들 사이에서 일상을 찾아갔겠지.

이렇듯 잔잔한 일상은 우경의 한 마디 말에 파문이 인다. 일 때문에 베트남에 가게 됐고, 같이 가자는 말. 어쩌면 다시 꺼낸 구애의 말일 텐데, 해인은 우경의 제안을 거절한다. 성규가 춘천에 대해 “갈 수 있는데 안 가는 거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처럼, 해인은 베트남에 갈 수가 없다. 이 말을 통해 아직 그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멀쩡히 일을 하다가도 무너져 우는 날이 계속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인은 이전과 같지 않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변해 있었다(176)”는 것을 안다. 이제는 “남들처럼 텔레비전에서 본 방법을 메모해두었다가 장을 보고, 맛은 없지만 몸에 좋다는 주스를 만들어 먹고, 누군가와 복숭아를 따러 가자는 약속을 하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83)음을 느낀다. 해인은 이런 일상을 조용히 돌아보며 “혼자서는 어려웠겠지.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고,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83)” 베트남에 다시 갈 만큼은 아니지만 엄마, 유진, 성규, 장미, 환희와 맛있는 것을 챙겨 먹고 웃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만큼, 조금 ‘모자’라지만 ‘소중’한, 괜찮은 일상을 산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아주 가까운 사람의 슬픔을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이 아픔이 얼마나 클지 가늠도 할 수 없어서, 그냥 술잔을 앞에 두고 잠자코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을 때도 나에겐 막막한 일인 건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 그 사람의 눈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운 날에는 누군가를 생각하겠구나, 마음이 아프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하며 손이며 등으로 작은 온기를 나누고자 했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서로 더욱 구체적으로 공감할 수 있겠지만, 어떤 슬픔을 안고 있겠거니, 그 감정의 물결이 한동안 잠잠했다가 가끔은 속절없이 세지기도 하겠거니, 내가 보지 않을 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툭 하고 떨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조금 더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내 머릿속에서 모두 순한 눈을 가졌다.


“나는 우리가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왔구나, 그걸 알게 되었어.

안다고 생각될 때, 더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 두려웠는데 모르겠다고 말하면 두려움이 조금 옅어지곤 했던 것 같아.

그런 채로 살아왔고 이런 채로 살 것 같아.

무언가를 단언하는 게 너무나도 두렵지만.”(195)


우경이 해인에게 보낸 (이 소설에서의) 마지막 메일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나 역시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왔”다(이 글에서도 그렇다). 어쩌면 나는 이 등장인물이 나처럼 눌변이라, 그리고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아서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 역시 소설로서 좋은 것인지, 탁월한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이들의 담백한 미련을, 모자람을, 말줄임표를, 싱겁게 가서 싱겁게 오는 여행을,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는 메일을 오래 생각했고,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는 찰랑찰랑 감정이 일었다. 한 번 더 수저를 쥐어주고 싶고, 찻잔을 기울이고 싶고, 문자 한 통 더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도 그들만의 감정의 흔들림을 겪고 있겠지. 때로는 외롭겠지, 하고.

혼자서는 일상이 성립되지 않는데, 우리는 홀로 너무 오롯이 충만하려고 분투해온 것은 아닐까? 이 기회를 놓쳐도 괜찮아요, 자기 걱정을 하는 건 나쁘지 않아요, 이별을 했어도 결국엔 괜찮아요, 라고 담담하고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이 책의 사람들처럼 고요한 눈과 귀와 입을 가진 이들에게, 내게 모두 말해주지 않아도 좋지만 그래도 내가 언제든 들어줄 수 있다는 작은 사인을 보내고 싶다. 그저 괜찮다는 말을 서로 주고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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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솜에게 반하면 - 제10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6
허진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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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솜에게 반하면>은 청소년 소설로, 탐정 수첩을 들고 다니며 해결해야 할 사건과 그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적는 열네 살 서율무, 검은 옷을 입고 다니며 말이 없으며 ‘마녀의 딸’이라는 으스스한 별명을 가진 같은 반 독고솜, 그리고 늘 반의 중심에서 ‘여왕’이라 불리며 일을 주도하는 반장 단태희가 주인공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독고솜이 주변 사물을 공중부양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내릴 수 있는 마녀라는 것. 이것은 그에 관한 소문만 무성한 독고솜에게 편견 없이 다가간 서율무만이 알게 된 비밀이고, 이 비밀을 계기로 둘은 친한 친구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반 영미가 하굣길에 괴한에게 봉변을 당하고,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한다. 그후 영미를 도우려는 태희와 율무의 두 마음이 서로 맞선다. 태희는 할머니와 사는 영미의 가난한 처지를 돕겠다는 이유로 반 친구들로부터 돈을 모으려 하고, 율무는 그런 방법보다는 어딘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같은 영미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독고솜의 능력을 빌린다. 그 과정에서 영미의 단짝 지민의 존재, 모금한 돈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소동, 새롭게 밝혀지는 비밀 등으로 이야기가 꽤나 복잡하게 전개된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너무 흔하면서도 다루기 어려운 ‘미워하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주’라는 초월적인 장치를 통해 신중하게 마련된 응징을 가능하게 한다. 독고솜은 모계로 마녀의 피를 물려받아, 사람들에게 익명으로 사연을 받아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 상대에게 저주를 내리는 일을 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관계에서 독고솜은 은밀한 조율자가 된다. 하지만 그의 저주는 단순히 사람을 벌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 저주는 고양이에게 해코지하는 사람에게 ‘고양이의 보은(쥐를 물어다 준다)’을 내리고, 자녀를 학대한 부모에게 벌을 주기보다는 그 아이들이 학대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등, 간접적인 방법이다. “저주받은 사람 말고 다른 사람들이 영향을 너무 크게 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저주의 힘이 미치는 범위를 따”진다. 사건이 해결되어가는 과정에서 독고솜은 단태희에게도 작은 ‘저주’를 내린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시간을 주는 것으로.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순식간에, 내 마음이 안으로 침잠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누구와도 어울리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 속에서 자기를 잘 따르던 박선희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자신이 배신당하고 소외당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이러한 연결감은 율무와 솜이가 기질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이 소설에서 중요한 테마 중 하나다. 


평소 잘 읽지 않던 장르(청소년 소설)임에도 “한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건 아닐까?”라는 띠지 카피에 이끌려 읽었다. 이 질문은 언뜻 성인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는 질문인 것만 같다. 각기 다른 삶을 지향하고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명확해서 그러한 사람끼리 무리를 형성해가는 것이 순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이 단순한 질문에 반응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에게 잘해주는지 같이 어울리기에 괜찮은 친구인지를 따져가며 친구를 사귀던 나의 청소년기를 떠올렸고, 그때 이런 소설을 읽지 않았던 걸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이라고 그때와 많이 다를까? 30세가 훌쩍 지나고도 내가 어떻게 보일지, 저 사람은 어떤 삶을 누리고 있는지만 생각하는 것은 어릴 때보다 더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고 상대방에 대한 판단을 미뤄두고 온전히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감각을 되살리기에 빠르거나 늦는 때는 없다고, 지금이라도 이 소설을 읽어서, 서율무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탐정은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일에 마음을 쓴다. 마음을 써서 살펴보고, 기록하고 기억한다. 필요할 때는 발로 뛰어다닌다.” “좋은 탐정”이 되고 싶은 율무가 내린 탐정의 정의다. 좋은 사람에 대한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상황과 마음을 더 많이 생각하는 ‘좋은 탐정’이 나쁜 사람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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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의 우주 - 사변적 실재론과 화이트헤드 카이로스총서 79
스티븐 샤비로 지음, 안호성 옮김 / 갈무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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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내게 철학의 재미와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해준 유일한 철학자이다. 화이트헤드의 책을 읽게 된 것은 그가 수학자, 과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점에서 이 세계를 보다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철학이 내게 이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어렵다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엄밀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일부 철학들이 불필요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데 반해 그 메시지만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주체이자 객체인 ‘현실적 존재(계기)’는 “복합적이고도 상호 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과정과 실재』, 78쪽)이라는 물리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균형 감각을 늘 유지하는 기술 덕분에 그의 철학을 일상에서도 종종 떠올릴 수 있었다.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에 대한 해석이 사고를 지배하는 시대에,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여건과 생성의 과정을 사유한다는 그의 철학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화이트헤드의 간접적 영향으로 그레이엄 하먼의 책을 읽고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 등의 철학적 조류를 멀리서나마 접했다. 하지만 이 새롭게 떠오르는 철학적 논의들 사이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전혀 구별하지 못했고, 어렴풋이 근대 철학에 대해, 특히 그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철학적 조류로 느슨하게 한데 묶어서 생각하곤 했다. 그러던 차였기에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 발간 소식이 무척 반가웠다. 그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사변적 실재론’과 (그보다 덜하게는) ‘신유물론’이라 분류할 수 있는 철학적 조류를 통하여 새롭게 바라보고자”(17) 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서양의 근대적 합리성의 핵심 전제였던 인간중심주의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17). 그렇기에 오늘날 기후위기, 인류세의 종말 등 정복과 착취에 기반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엄청난 부작용에 고통받는 존재들을 사유하는 대안적 철학으로서 주목을 받는다. 계속해서 샤비로가 정리한 바를 옮기면, 사변적 실재론은 퀑탱 메이아수, 그레이엄 하먼, 레이 브라시에,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에 의해 도입되었으며, 이들은 ‘상관주의’, “주체와의 관계를 떠나서 객체 ‘그 자체’는 파악할 수 없다”는 학설을 거부하고 형이상학적 사변을 통해 실재론을 복권시키고자 한다는 공통점으로 묶인다. 신유물자들은 제인 베넷, 로지 브라이도티, 엘리자베스 그로츠 등이 대표적인데, ‘상관주의’에 집중하지는 않지만 브뤼노 라투르의 영향을 받아 비인간 존재의 생명력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이 책이 쓰인 취지를 생각하면 샤비로의 섬세한 분석을 따라가며 그것을 정리하며 읽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내게는 어려웠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를 통해서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을 본다기보다는 칸트, 화이트헤드를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며 그의 ‘사변적 미학’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나는 칸트의 텍스트를 온전히 읽어본 적이 없기에 인용된 부분만을 더듬어가며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철학자들의 학설을 통해 상관주의를 극복하고 범심론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 보였지만,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이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중에 내포하고 있는 칸트 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분량상(?)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까닭에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철학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나 같은 초보적인 독자에게 이 책이 적합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물들의 우주』는 내가 늘 언저리에 머물면서도 언젠가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던 ‘미학’을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영감을 주는 책이었다. 샤비로는 이 책의 1장 「자기향유와 관심」에서부터 “어떤 넓은 의미에서 아름다운 사물의 체계는, 그게 아름다운 한에서 그 존재가 정당화된다” “우주의 목적론은 아름다움의 산출을 겨냥하고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중요하게 다루며 ‘미학’을 사변적 형이상학의 중심에 놓는다. 특히, 샤비로가 행한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화이트헤드의 비교가 꽤 명쾌하게 다가온다. “화이트헤드와 레비나스 모두 우리의 경험이 원초적이고 물리적이고 신체적이며, 체화된 것”(53)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레비나스는 소박한 자기가 “극단적인 외부성, 타자, 얼굴”(54)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주체성으로, 윤리적인 의무를 짊어진 주체성으로 대체된다며 ‘윤리’를 강조하는 데 반해, 화이트헤드의 개념으로 모든 존재를 뜻하는 ‘현실적 계기’는 자신의 본성상 “자율적이고 자기-생성적인 결단”(60)은 지속적인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 또는 타자로부터의 윤리적 요구” 안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현실적 계기는 자신에게 내재한 미적 결단을 통해서 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를 외부에서 찾기보다는 점진적인 경험의 축적과 무수한 결단의 실행에서 찾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화이트헤드에게 “아름다움의 정의는, “경험의 다양한 항목들이 서로에 대해 내적으로 순응하는 것(AI, 265)”이라고 한다. 샤비로는 이를 두고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치가 아니라, 다양한 존재의 다양한 가치가 자신을 최대화하며 강도를 올리면서도, 서로를 도태시킴이 없이 함께하기 위해 투쟁하는 방식들에 대한 요약적인 문구”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따르면 이 다양한 존재에는 인간, 비인간 동물, 생명 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포함된다. 인간의 사고 활동과는 다를지 몰라도 “순수하게 물리적인 단계와 의식적인 지성적 작용의 단계 중간에 위치하는”(PR, 280) “많은 형태의 느낌 및 사고”(231)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나의 내적 삶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나 역시 다른 존재의 내적 삶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고유한 삶이 아예 없다거나 가치가 덜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최대한 미적인 지향을 가지고 상상력을 확장하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며,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 생기론 등이 그의 진화이자 확장, 혹은 각론으로서 뒤따르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사변소설에 대한 분석이 흥미로웠다. 샤비로는 이 책에서 “(사변소설과 같은) 이러한 허구들은, 우리가 실제로 알 수는 없더라도, 우리 자신과는 아주 다른 존재들의 생활세계와 관점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며 우리의 인식을 변화하는 데 사변소설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SF는 대중적으로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 Sci-fi)로 알려져 있지만 일련의 이론가들은 과학소설이 이제는 “상상력의 문학 분야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좁은” 장르라는 인식에서, “기술적 변화보다 더 사회, 문화적 변화를 강조”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미학”에 관심을 보이며, 이를 사변소설이라고 칭한다고 한다.(『에스에프 에스프리』, 159쪽) 샤비로가 그러한 작품 몇몇을 예로 들었지만, 한국의 김초엽 작가 역시 『세계 끝의 온실』에서 식물이 중심이 되는 재난과 재건의 이야기에 대해 쓴 바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를 읽고도 혹자는 “SF도 결국 사람 이야기”라고 평했다는 것인데, 작가는 이를 지적하며 “나는 식물들의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김초엽 작가의 페이스북).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티탄」(감독 줄리아 뒤쿠르노)을 생각해봐도, 티타늄을 뇌에 의식한 인간이 자동차의 섹스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는(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긴 했지만 인류가 아닐 수도 있다) 스토리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어떤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미학적인 작품들의 창작 흐름이 무척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에 대한 기준의 변화가 ‘결국 모두 인간의 이야기’라는 틀에 박힌 인식을 깨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점도 바꾸지 않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내가 이해하는 화이트헤드는 극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최대한 모험적인 사상을 펼쳤기에, 그 과정 또한 그럴 것이다.


어릴 때다. 내 눈앞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지금 저 사람은 나는 전혀 그것을 짐작도 할 수 없는 경험과 생각과 함께 자신의 삶을 살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함을 느낀다. 아마 이것은 주체와 객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의 시작일 수도 있었겠으나, 나이가 들어가며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개별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고, 철학 도서를 기웃거리는 일이 이러한 질문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기억이 다시 소환되었다. 이제는 다른 상상을 해볼 때가 되었다. ‘사람들의 사회’가 아니라, ‘사물들의 우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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