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아래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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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해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해인은 서울 근교(로 추정되는) 지역, 젊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동네의 중고물품 가게 '해동중고'에서 일한다. 초중고를 같이 다닌 우경과 해인은 서로의 집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해인의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밤 산책을 하고, 어디 멀리 다녀온 날에는 서로 마중을 나오는 다정한 연인 사이다. 해인의 주변에는 해동중고의 단골인 장미와, 어느 모임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은 유진씨, 초등학교 동창이자 우경과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맡기도 한 성규가 있다. 또, 해동중고의 사장님과, 알바생, 가게 옆 공터에 자주 오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환희, 엄마와 친해 이모라고 부르는 이웃도 있다. 이러한 인물들과 해인의 만남과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지는 가운데 훌쩍 일 년이 지난다.  아직 눈이 내리는 3월에 시작해 그해 연말에 끝이 나는 소설. 그 안엔 별다른 사건이랄 것도 없다. 길지 않은 대화도, 평화롭게 흘러간다.


“우경이 더없이 좋다고 느낄 때마다 왜인지 그날의 우경이 천천히 떠오르곤 한다.

우리는 누구도 그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적이 없다.”(51)


하지만 이 소설은 커다란 사건을 수면 아래 깔고 있다. 해인과 우경은 “베트남에서 그애를 잃고 한국으로 돌아와 모든 일상을 잃어버렸을 때”(60) 한 번 이별을 했었다. 하지만 우연히 둘이 자주 갔던 미용실에서 만난 후 다시 가까이에서 서로 챙기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이들이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 소설 안에서는 알 수 없다. 독자로서는 자식을 잃었나보다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잃었다는 ‘그애’가 어린 아이인지, 유산을 한 것일지, 어쩌면 정말 오랜 시간 함께했던 반려동물을 잃어버린 건 아니었을지, 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무튼 그애를 잃은 그때, 우경의 반응은 해인에게 상처를 남긴 듯하다. 우경이 좋다고 느낄 때마다 왜인지 그날의 우경이 떠오른다. 우경이 실수를 한 걸까, 그것도 모르겠다. 해인은 한국으로 돌아와 일상을 잃을 만큼 크게 아팠다. 그는 그저 이전과 무관한 일을 찾아 중고물품 가게도 흘러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해동중고라는 장소는 도무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던 그에게 버려진 물건을 깨끗히 닦아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는 회복의 의미를 넌지시 심어주었는지도.  

이제 둘은 다시 만나 손을 잡고 걷는다. 그날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은 채. “저절로 되는 것은 없지만 억지도 되는 것도 없더라고요.” 유진씨의 말이다. 아마 해인은 이 말과 모양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여러가지 문장을 그동안 숱하게 생각하며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과 아직 남아 있는 것들 사이에서 일상을 찾아갔겠지.

이렇듯 잔잔한 일상은 우경의 한 마디 말에 파문이 인다. 일 때문에 베트남에 가게 됐고, 같이 가자는 말. 어쩌면 다시 꺼낸 구애의 말일 텐데, 해인은 우경의 제안을 거절한다. 성규가 춘천에 대해 “갈 수 있는데 안 가는 거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처럼, 해인은 베트남에 갈 수가 없다. 이 말을 통해 아직 그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멀쩡히 일을 하다가도 무너져 우는 날이 계속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인은 이전과 같지 않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변해 있었다(176)”는 것을 안다. 이제는 “남들처럼 텔레비전에서 본 방법을 메모해두었다가 장을 보고, 맛은 없지만 몸에 좋다는 주스를 만들어 먹고, 누군가와 복숭아를 따러 가자는 약속을 하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83)음을 느낀다. 해인은 이런 일상을 조용히 돌아보며 “혼자서는 어려웠겠지.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고,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83)” 베트남에 다시 갈 만큼은 아니지만 엄마, 유진, 성규, 장미, 환희와 맛있는 것을 챙겨 먹고 웃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만큼, 조금 ‘모자’라지만 ‘소중’한, 괜찮은 일상을 산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아주 가까운 사람의 슬픔을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이 아픔이 얼마나 클지 가늠도 할 수 없어서, 그냥 술잔을 앞에 두고 잠자코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을 때도 나에겐 막막한 일인 건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 그 사람의 눈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운 날에는 누군가를 생각하겠구나, 마음이 아프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하며 손이며 등으로 작은 온기를 나누고자 했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서로 더욱 구체적으로 공감할 수 있겠지만, 어떤 슬픔을 안고 있겠거니, 그 감정의 물결이 한동안 잠잠했다가 가끔은 속절없이 세지기도 하겠거니, 내가 보지 않을 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툭 하고 떨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조금 더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내 머릿속에서 모두 순한 눈을 가졌다.


“나는 우리가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왔구나, 그걸 알게 되었어.

안다고 생각될 때, 더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 두려웠는데 모르겠다고 말하면 두려움이 조금 옅어지곤 했던 것 같아.

그런 채로 살아왔고 이런 채로 살 것 같아.

무언가를 단언하는 게 너무나도 두렵지만.”(195)


우경이 해인에게 보낸 (이 소설에서의) 마지막 메일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나 역시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왔”다(이 글에서도 그렇다). 어쩌면 나는 이 등장인물이 나처럼 눌변이라, 그리고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아서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 역시 소설로서 좋은 것인지, 탁월한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이들의 담백한 미련을, 모자람을, 말줄임표를, 싱겁게 가서 싱겁게 오는 여행을,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는 메일을 오래 생각했고,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는 찰랑찰랑 감정이 일었다. 한 번 더 수저를 쥐어주고 싶고, 찻잔을 기울이고 싶고, 문자 한 통 더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도 그들만의 감정의 흔들림을 겪고 있겠지. 때로는 외롭겠지, 하고.

혼자서는 일상이 성립되지 않는데, 우리는 홀로 너무 오롯이 충만하려고 분투해온 것은 아닐까? 이 기회를 놓쳐도 괜찮아요, 자기 걱정을 하는 건 나쁘지 않아요, 이별을 했어도 결국엔 괜찮아요, 라고 담담하고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이 책의 사람들처럼 고요한 눈과 귀와 입을 가진 이들에게, 내게 모두 말해주지 않아도 좋지만 그래도 내가 언제든 들어줄 수 있다는 작은 사인을 보내고 싶다. 그저 괜찮다는 말을 서로 주고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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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솜에게 반하면 - 제10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6
허진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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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솜에게 반하면>은 청소년 소설로, 탐정 수첩을 들고 다니며 해결해야 할 사건과 그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적는 열네 살 서율무, 검은 옷을 입고 다니며 말이 없으며 ‘마녀의 딸’이라는 으스스한 별명을 가진 같은 반 독고솜, 그리고 늘 반의 중심에서 ‘여왕’이라 불리며 일을 주도하는 반장 단태희가 주인공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독고솜이 주변 사물을 공중부양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내릴 수 있는 마녀라는 것. 이것은 그에 관한 소문만 무성한 독고솜에게 편견 없이 다가간 서율무만이 알게 된 비밀이고, 이 비밀을 계기로 둘은 친한 친구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반 영미가 하굣길에 괴한에게 봉변을 당하고,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한다. 그후 영미를 도우려는 태희와 율무의 두 마음이 서로 맞선다. 태희는 할머니와 사는 영미의 가난한 처지를 돕겠다는 이유로 반 친구들로부터 돈을 모으려 하고, 율무는 그런 방법보다는 어딘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같은 영미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독고솜의 능력을 빌린다. 그 과정에서 영미의 단짝 지민의 존재, 모금한 돈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소동, 새롭게 밝혀지는 비밀 등으로 이야기가 꽤나 복잡하게 전개된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너무 흔하면서도 다루기 어려운 ‘미워하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주’라는 초월적인 장치를 통해 신중하게 마련된 응징을 가능하게 한다. 독고솜은 모계로 마녀의 피를 물려받아, 사람들에게 익명으로 사연을 받아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 상대에게 저주를 내리는 일을 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관계에서 독고솜은 은밀한 조율자가 된다. 하지만 그의 저주는 단순히 사람을 벌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 저주는 고양이에게 해코지하는 사람에게 ‘고양이의 보은(쥐를 물어다 준다)’을 내리고, 자녀를 학대한 부모에게 벌을 주기보다는 그 아이들이 학대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등, 간접적인 방법이다. “저주받은 사람 말고 다른 사람들이 영향을 너무 크게 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저주의 힘이 미치는 범위를 따”진다. 사건이 해결되어가는 과정에서 독고솜은 단태희에게도 작은 ‘저주’를 내린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시간을 주는 것으로.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순식간에, 내 마음이 안으로 침잠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누구와도 어울리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 속에서 자기를 잘 따르던 박선희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자신이 배신당하고 소외당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이러한 연결감은 율무와 솜이가 기질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이 소설에서 중요한 테마 중 하나다. 


평소 잘 읽지 않던 장르(청소년 소설)임에도 “한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건 아닐까?”라는 띠지 카피에 이끌려 읽었다. 이 질문은 언뜻 성인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는 질문인 것만 같다. 각기 다른 삶을 지향하고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명확해서 그러한 사람끼리 무리를 형성해가는 것이 순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이 단순한 질문에 반응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에게 잘해주는지 같이 어울리기에 괜찮은 친구인지를 따져가며 친구를 사귀던 나의 청소년기를 떠올렸고, 그때 이런 소설을 읽지 않았던 걸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이라고 그때와 많이 다를까? 30세가 훌쩍 지나고도 내가 어떻게 보일지, 저 사람은 어떤 삶을 누리고 있는지만 생각하는 것은 어릴 때보다 더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고 상대방에 대한 판단을 미뤄두고 온전히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감각을 되살리기에 빠르거나 늦는 때는 없다고, 지금이라도 이 소설을 읽어서, 서율무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탐정은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일에 마음을 쓴다. 마음을 써서 살펴보고, 기록하고 기억한다. 필요할 때는 발로 뛰어다닌다.” “좋은 탐정”이 되고 싶은 율무가 내린 탐정의 정의다. 좋은 사람에 대한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상황과 마음을 더 많이 생각하는 ‘좋은 탐정’이 나쁜 사람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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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의 우주 - 사변적 실재론과 화이트헤드 카이로스총서 79
스티븐 샤비로 지음, 안호성 옮김 / 갈무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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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내게 철학의 재미와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해준 유일한 철학자이다. 화이트헤드의 책을 읽게 된 것은 그가 수학자, 과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점에서 이 세계를 보다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철학이 내게 이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어렵다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엄밀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일부 철학들이 불필요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데 반해 그 메시지만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주체이자 객체인 ‘현실적 존재(계기)’는 “복합적이고도 상호 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과정과 실재』, 78쪽)이라는 물리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균형 감각을 늘 유지하는 기술 덕분에 그의 철학을 일상에서도 종종 떠올릴 수 있었다.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에 대한 해석이 사고를 지배하는 시대에,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여건과 생성의 과정을 사유한다는 그의 철학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화이트헤드의 간접적 영향으로 그레이엄 하먼의 책을 읽고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 등의 철학적 조류를 멀리서나마 접했다. 하지만 이 새롭게 떠오르는 철학적 논의들 사이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전혀 구별하지 못했고, 어렴풋이 근대 철학에 대해, 특히 그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철학적 조류로 느슨하게 한데 묶어서 생각하곤 했다. 그러던 차였기에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 발간 소식이 무척 반가웠다. 그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사변적 실재론’과 (그보다 덜하게는) ‘신유물론’이라 분류할 수 있는 철학적 조류를 통하여 새롭게 바라보고자”(17) 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서양의 근대적 합리성의 핵심 전제였던 인간중심주의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17). 그렇기에 오늘날 기후위기, 인류세의 종말 등 정복과 착취에 기반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엄청난 부작용에 고통받는 존재들을 사유하는 대안적 철학으로서 주목을 받는다. 계속해서 샤비로가 정리한 바를 옮기면, 사변적 실재론은 퀑탱 메이아수, 그레이엄 하먼, 레이 브라시에,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에 의해 도입되었으며, 이들은 ‘상관주의’, “주체와의 관계를 떠나서 객체 ‘그 자체’는 파악할 수 없다”는 학설을 거부하고 형이상학적 사변을 통해 실재론을 복권시키고자 한다는 공통점으로 묶인다. 신유물자들은 제인 베넷, 로지 브라이도티, 엘리자베스 그로츠 등이 대표적인데, ‘상관주의’에 집중하지는 않지만 브뤼노 라투르의 영향을 받아 비인간 존재의 생명력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이 책이 쓰인 취지를 생각하면 샤비로의 섬세한 분석을 따라가며 그것을 정리하며 읽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내게는 어려웠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를 통해서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을 본다기보다는 칸트, 화이트헤드를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며 그의 ‘사변적 미학’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나는 칸트의 텍스트를 온전히 읽어본 적이 없기에 인용된 부분만을 더듬어가며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철학자들의 학설을 통해 상관주의를 극복하고 범심론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 보였지만,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이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중에 내포하고 있는 칸트 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분량상(?)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까닭에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철학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나 같은 초보적인 독자에게 이 책이 적합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물들의 우주』는 내가 늘 언저리에 머물면서도 언젠가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던 ‘미학’을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영감을 주는 책이었다. 샤비로는 이 책의 1장 「자기향유와 관심」에서부터 “어떤 넓은 의미에서 아름다운 사물의 체계는, 그게 아름다운 한에서 그 존재가 정당화된다” “우주의 목적론은 아름다움의 산출을 겨냥하고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중요하게 다루며 ‘미학’을 사변적 형이상학의 중심에 놓는다. 특히, 샤비로가 행한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화이트헤드의 비교가 꽤 명쾌하게 다가온다. “화이트헤드와 레비나스 모두 우리의 경험이 원초적이고 물리적이고 신체적이며, 체화된 것”(53)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레비나스는 소박한 자기가 “극단적인 외부성, 타자, 얼굴”(54)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주체성으로, 윤리적인 의무를 짊어진 주체성으로 대체된다며 ‘윤리’를 강조하는 데 반해, 화이트헤드의 개념으로 모든 존재를 뜻하는 ‘현실적 계기’는 자신의 본성상 “자율적이고 자기-생성적인 결단”(60)은 지속적인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 또는 타자로부터의 윤리적 요구” 안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현실적 계기는 자신에게 내재한 미적 결단을 통해서 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를 외부에서 찾기보다는 점진적인 경험의 축적과 무수한 결단의 실행에서 찾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화이트헤드에게 “아름다움의 정의는, “경험의 다양한 항목들이 서로에 대해 내적으로 순응하는 것(AI, 265)”이라고 한다. 샤비로는 이를 두고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치가 아니라, 다양한 존재의 다양한 가치가 자신을 최대화하며 강도를 올리면서도, 서로를 도태시킴이 없이 함께하기 위해 투쟁하는 방식들에 대한 요약적인 문구”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따르면 이 다양한 존재에는 인간, 비인간 동물, 생명 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포함된다. 인간의 사고 활동과는 다를지 몰라도 “순수하게 물리적인 단계와 의식적인 지성적 작용의 단계 중간에 위치하는”(PR, 280) “많은 형태의 느낌 및 사고”(231)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나의 내적 삶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나 역시 다른 존재의 내적 삶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고유한 삶이 아예 없다거나 가치가 덜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최대한 미적인 지향을 가지고 상상력을 확장하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며,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 생기론 등이 그의 진화이자 확장, 혹은 각론으로서 뒤따르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사변소설에 대한 분석이 흥미로웠다. 샤비로는 이 책에서 “(사변소설과 같은) 이러한 허구들은, 우리가 실제로 알 수는 없더라도, 우리 자신과는 아주 다른 존재들의 생활세계와 관점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며 우리의 인식을 변화하는 데 사변소설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SF는 대중적으로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 Sci-fi)로 알려져 있지만 일련의 이론가들은 과학소설이 이제는 “상상력의 문학 분야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좁은” 장르라는 인식에서, “기술적 변화보다 더 사회, 문화적 변화를 강조”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미학”에 관심을 보이며, 이를 사변소설이라고 칭한다고 한다.(『에스에프 에스프리』, 159쪽) 샤비로가 그러한 작품 몇몇을 예로 들었지만, 한국의 김초엽 작가 역시 『세계 끝의 온실』에서 식물이 중심이 되는 재난과 재건의 이야기에 대해 쓴 바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를 읽고도 혹자는 “SF도 결국 사람 이야기”라고 평했다는 것인데, 작가는 이를 지적하며 “나는 식물들의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김초엽 작가의 페이스북).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티탄」(감독 줄리아 뒤쿠르노)을 생각해봐도, 티타늄을 뇌에 의식한 인간이 자동차의 섹스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는(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긴 했지만 인류가 아닐 수도 있다) 스토리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어떤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미학적인 작품들의 창작 흐름이 무척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에 대한 기준의 변화가 ‘결국 모두 인간의 이야기’라는 틀에 박힌 인식을 깨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점도 바꾸지 않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내가 이해하는 화이트헤드는 극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최대한 모험적인 사상을 펼쳤기에, 그 과정 또한 그럴 것이다.


어릴 때다. 내 눈앞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지금 저 사람은 나는 전혀 그것을 짐작도 할 수 없는 경험과 생각과 함께 자신의 삶을 살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함을 느낀다. 아마 이것은 주체와 객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의 시작일 수도 있었겠으나, 나이가 들어가며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개별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고, 철학 도서를 기웃거리는 일이 이러한 질문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기억이 다시 소환되었다. 이제는 다른 상상을 해볼 때가 되었다. ‘사람들의 사회’가 아니라, ‘사물들의 우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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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파란 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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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아가 강한 이가 아니라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자기계발적 심리서를 통해 전해진다. 또한 누구나 자신의 약점을 내보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품어주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관념도 당연한 듯 여겨진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사회는 비교 우위로 촘촘하게 계층화되어 있으며, 모든 개인이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낼 용기를 품을 만큼 오롯한 주체라는 생각도 환상일 뿐이다. 


이는 『가장 파란 눈』이 1940년대 전후의 미국 흑인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유다. 토니 모리슨이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페콜라 브리드러브의 삶은 극단적으로 비참하지만, 그의 취약함은 선망과 모방을 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속에 사는 사람이라면 조금씩 가지고 있는 무언가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장의 단계가 될지,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될지는 보통 외부적 요건에 달려 있다. 


산산이 부서진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토니 모리슨의 경고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기 때문일까. 소설을 다 읽고서도 무덤덤한 나 자신에 놀랐다. 아니면 작가의 의도가 통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주인공 소녀를 “적당히 동정하고 말 것”을 우려하며 사건의 순서, 원인과 결과를 복잡하게 배치하여 서서히 망가지는 페콜라의 삶에서 심정적으로 거리를 두고, 이러한 상황에서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연약함에까지 시선을 주게 만든다. 인간 이하로 전락해버린 촐리 브리드러브, 살아갈 방법으로서 황폐한 욕망에 자신을 맡겨버린 폴린 브리드러브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강화시킨 자기혐오가 낳은 사랑, 피 흘리는(bleed) 사랑 이야기를 읽는 것만 같은 서글픔을 안긴다.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나을 수는 없다. 사악한 사람은 사랑도 사악하게 하고. 난폭한 사람은 사랑도 난폭하게 하고, 허약한 사람은 사랑도 허약하게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사랑도 어리석게 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의 사랑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p.248)

    

1940년대 오하이오주 로레인. 이 소설의 화자인 클로디아 맥티어는 가난하긴 하지만 일하는 아버지, 가정주부인 어머니를 두고, 자기 집에서 방 하나를 세놓을 만큼 빠듯한 여유를 감내하며 사는 서민층 흑인 가족의 둘째다. 클로디아는 언니 프리다와 늘 함께 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하곤 한다. 그런 그의 집에 갈 곳이 없어진 페콜라 브리드러브가 한동안 머문다. 


페콜라는 “말없이, 이름도 없이, 그것을 표현하거나 인정할 목소리도 없이 붕괴하는 사람들”(p.7), “추함을 두 손에 받아들었고, 망토처럼 뒤집어”(p.57)쓰고 다니는 이들로 묘사되는 브리드러브 가족 중 가장 연약한 존재다. 흑인, 그것도 얼굴색이 어두운 흑인 소녀인데다가 극심한 빈곤층이다. 그의 아버지 촐리는 가족을 건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도는 사람이며, 그의 어머니 폴린은 백인 문화를 선망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가정부로서 일하는 백인 가정의 아이를 훨씬 더 극진히 보살피면서 자신들의 아이들은 방치한다. 이러한 가정에서 페콜라는 혐오와 멸시의 시선을 직격으로 맞으며, 조금씩 자존감을 잃어간다. 

     


사람들은 언제 어떤 타인을 존중할까. ‘언제’와 ‘어떤’이라는 조건을 달 수 없다는 것을 현대사회의 문명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1940년대 남부 흑인들의 대규모 이주 이후 흑인 참정권 및 교육에 대한 권리가 확대되면서 표면적으로는 백인과 흑인의 사회가 섞이는 듯했지만, 이는 흑인성을 버림으로써, 피부를 조금이라도 더 밝은 색으로 만듦으로써, 흑인에게 주어진 일을 말없이 수행하면서 가능한 것이었다. 


반면, 백인 사회의 문화는 융성하여 미대륙 곳곳에 속속들이 영향을 미치는데 이 소설의 제목인 ‘가장 파란 눈’은 이러한 백인성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백인성에 대한 선망이 흑인 사회에 한한 건 아니었겠지만, 이 소설에서 주된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0대 흑인 소녀들은 셜리 템플을 부러워하며, 메리 제인이 그려진 사탕을 사 먹으며 백인 소녀의 구불구불한 금발과 밝은 얼굴을 동경한다. 


그건 페콜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혐오 어린 시선에 상처받은 그는 오히려 백인의 외모, 즉 가장 파란 눈을 동경하기 시작한다. “흑인 여자아이가 백인 여자아이의 파란 눈을 갈망”하기 시작한 순간이 먼저일까, 흑인 여자아이의 무구한 시선을 매몰차게 내친 사람들의 시선이 먼저일까. 언뜻 보기에 페콜라의 붕괴에서 촐리의 강간, 그리고 아이의 유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의 아버지 촐리는 물론이고 어머니, 사탕 가게 주인, 동급생 흑인 남자아이, 부유한 흑인 여자아이, 이유도 없이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중산층 흑인 가족, 소아성애자 소프헤드 처치 등 동네의 모든 사람이 그의 가해자다. 즉, 온 세상이 그를 무너뜨린다. 


그러한 노골적인 혐오 속에서 그는 ‘파란 눈’을 소망하며 “인종적 자기혐오”를 내면화한다. 토니 모리슨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로 혐오와 멸시를 받는 느낌. 이러한 시선이 아무렇지 않아졌을 때, 위로와 회복이 불가능할 때, 한 인간에게 어떤 비극이 닥칠 수 있는지를 말하려 했음을 밝힌다.


“그녀는 지금껏 어른 남자의 눈에서 관심과 혐오, 심지어 분노까지 보아왔다. 이 텅 빈 공간이 새롭지는 않다. 거기에는 날카로운 날이 있다. 눈꺼풀 안쪽 어딘가에 불쾌감이 도사리고 있다. (…) 그 불쾌감은 그녀를, 그녀의 검은 피부를 향한 것이 틀림없다.”(p.68)

    

페콜라가 촐리와의 근친 상간으로  생긴 아이를 유산했을 때는 1941년이다. 그는 아이를 밴 상태로 너무 기이한 성격에 자폐적 생활습관으로 오히려 신성함이라는 허울을 입은 소아성애자 '소프헤드 처치'에게 가 파란 눈을 갖게 해달라고 빈다. 소프헤드 처치는 전혀 말이 안 되는 일을 신이 페콜라의 눈을 파랗게 만들어줬다는 증거로 만들어버리고, 페콜라는 말 그대로 미쳐버린다. 


프리다와 클로디아는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페콜라를 안쓰러워하고 자신과 같은 여자아이 그 자체로 본 유일한 흑인이지만 결국 페콜라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고, 심지어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애가 우스꽝스럽거나 혐오스러워서가 아니라, 겁이 나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애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력한 어린아이는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들 때문에 죄책감을 갖게 된다. 어른이 된 후에 클로디아는 이야기한다. "우리가 틀린 것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미 늦었으니까."(249)  


“그녀를 아는 우리 모두는 더러운 것을 전부 그녀에게 쏟아붓고 나서 아주 건전해진 기분이었다. 그녀의 추함을 발아래 두고 당당히 설 때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p.246)

  

환대란 때로 거창하게 느껴진다. 그 존재를 받아들이고 곁을 내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어떤 거리낌이나 판단이 없는 환하고 정직한 웃음은 어떨까. 그 미소를 띠는 일이 과연 그렇게나 어려운 일일까. 나는 누군가에게 밝은 웃음을 지어보이는 순간을, 아니 그보다 먼저 그 환한 웃음을 받는 순간들을 강렬하게 경험한다. 이 소설에서 빈곤, 인종 문제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계속 논의되어야 할 주제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눈에 밟힌 것은 페콜라를 향했던 무수한 시선이었다. ‘텅 빈’ 시선, “표정이 지워진 눈빛”(p.228) 같은 것들. 


동성의 연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일말의 사회적 취약성을 지닌 나 역시 어느 한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맞닥뜨린 싸늘한 시선에 나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시선은 조금씩 사람을 바꾸어놓는다. 우리는 우리 앞의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볼 수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우리를 볼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감사함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내가 어떻게 피할 수도 없고 되받아칠 수도 없는 화살이 된다. 지금, 세계는 내가 당신의 거울이 되고 당신은 나의 거울이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워지는 시대다. 그런 공기 속에서 만난  『가장 파란 눈』은 이 세상에서 나의 눈은 어떤 색을 보고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공감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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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가 도착하면은 젊은 만화가 테마단편집 3
골드키위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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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애편지가 되지 못한 연애편지가 있을까?"


안그람 작가는 ‘연애편지’라는 단어 앞에서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곤 답한다. '고등학교 때 동성 친구에게 보내, 답장을 받지 못한 연애편지’라고. 「예언의 수신인」은 이 질문과 답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박현우는 웨딩플래너다. 여느 때와 같이 고객 미팅을 준비하던 현우는 예비 신랑의 이름이 자신과 같고, 예비 신부의 이름은 자신의 고등학교 절친과 같다는 사실에 신기해한다. 그런데 미팅에서 만난 사람은 진짜 고등학교 동창 민주혜. 이런 우연이 놀라운 진짜 이유는 주혜는 현우의 첫사랑이자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인 짝사랑 상대이기 때문이다. 현우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주혜와 단짝이었고, 우정 이상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용기 내 고백 편지를 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 시점으로부터 20년이 지나고서야 고객이자 한 남자의 예비 신부로 만난 것이다. 주혜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한 눈치다. 현우는 그리움을 반가움으로 가장한다.


대면 미팅은 몇 번에 그칠 줄 알았던 현우는 동창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세세하게 주혜의 결혼식 준비를 돕게 된다. 일하는 내내 현우는 동요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프로페셔널'을 외치지만 주혜의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반응한다. 주혜의 취향을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예비 신랑의 말에 슬쩍 열도 받는다. '식장을 장미로 뒤덮고 싶다고? 주혜는 장미는 싫어하고 하얀 목련을 좋아해.' '머리카락을 한데 틀어올렸으면 좋겠다고? 너는 주혜가 반묶음 머리 할 때 얼마나 예쁜지도 모르냐?' 나의 첫사랑을 빼앗아간 사람이 이렇게나 못 미덥다니.


이렇게 속으로 주혜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자신임을 주장하던 현우는 웨딩드레스를 피팅하는 자리에서 예비 신랑보다도 먼저 주혜 앞에 선다. 주혜의 특별 요청이다. "너한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어서 불렀어.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네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어리둥절해하며 피팅룸에 들어와 웨딩드레스 입은 주혜의 모습을 보는 현우에게 주혜가 한 말이다. 아니, 이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예비신랑보다도 더 먼저 보는 친구가 어디 있나? 다 소용없다. 주혜를 더 잘 아는 건 나, 현우일지 몰라도 주혜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은 저, 현우다.  


점점 감정적으로 지쳐갈 때 쯤, 현우는 사진 촬영 준비를 기다리며 예비 신랑과 어색하고도 형식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현우는 예비 신랑에게 어떻게 주혜를 만났는지 물어본다. 주혜가 마음을 쉽게 여는 스타일이 아닌데 어떻게 사로잡았나며. 동창의 남편 될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질문인데, 그뿐인데,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선을 보지 않으려던 주혜가 상대의 이름을 듣고 선 자리에 나왔고, 원래는 그것으로 끝날 인연이었지만 주혜에게 끈질기게 구애한 끝에 결혼하게 됐다는 말. 그리고, 다급히 신부에 대한 칭찬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현우에게 예비신랑은 대뜸, 또한 의도적으로 묻는다. "그쪽은 아직도 레즈비언 해요?" "아직도 하냐구요. '그거'"


주혜가 소중히 간직해온 편지를 어쩌다 읽게 됐는데 그 '현우'가 여자일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다며 굳이 청하지도 않은 싸움을 거는 그. 당황한 현우는 어물거리며 신경쓰이면 담당자를 바꿔주겠다는 말로 상황을 넘기려고 하지만 남자는 집요하게 현우의 현실을 일깨운다. "이곳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교육 받고 살아가는 이상 내가 주혜와 할 수 있는 일들, 당신은 하나도 못 하니" "거슬릴 게 없다"고 시비를 걸고, 이에 더해 “당신이 쓴 편지에 답장이 갈 일은 없"다며 "주혜가 선택한 수신인은 나"라는 말로 관계의 쐐기를 박는다. 다시 한번, 청첩장에 새겨질 이름은 박현우와 민주혜가 아니라 최현우와 민주혜다. 현우는 이제서야 진짜 무너진다. 다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다고.



사실 여기까지는 흔하게 접해온 서사다. 10대의 첫사랑,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여성 간의 사랑, 그리고 한쪽이 선택을 강요받아 '정상 가족'으로 편입한다면, 다른 한쪽에는 그러한 대답 아닌 대답에 상처받거나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주인공이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따라가던 나는 자연스럽게 2021년 개봉한 홍콩 영화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소녀」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 사랑에 빠졌던 두 ‘소녀’ 윙과 실비아. 그들은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며 미래를 약속하지만 사회적 제약에 부딪혀 결국 헤어진다. 우연히 인생의 변화를 맞아 혼란스러워 하던 20대에 만난 그들은 30세에도 혼자면 같이 살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지는데, 결국 그들이 다시 재회한 장소는 실비아의 결혼식장이다.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둘의 관계가 우정으로 자리매김되는 그 순간, 과거의 관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나는 생각했다. ‘이게 무슨 한 겨울에 찬물 끼얹는 결말인가?’라고.


영화평론가 조혜영은 영화 <윤희에게>를 비평하며 과거의 한국 영화에서 다수의 “여성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앞선, 10대의 원초적이고 순수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고착화”되어 결국 “이성애 로맨스에 포획되고 봉합되며 과거의 것으로 영원히 남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소녀」도 유사한 틀로써 비평이 가능하다. 이 영화가 10대 시절, 여성 간 사랑과 우정 사이의 아슬아슬한 감정선을 잘 그려냈다고는 해도, 위에서 지적하듯 노스탤지어로서의 첫사랑 서사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윙은 실비아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과거의 순수한 사랑의 상징,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노스탤지어로서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예언의 수신인」은 비슷한 서사를 따라가면서도 그 현실을 돌파한다. 위 영화를 만든 오영산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을 어린 날의 성장통 같은 것으로 회상하며 아름답고 순수하고 보편적인 사랑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안그람 작가에게 10대 퀴어의 사랑은 ‘괴물’, 답장도 받지 못한 연애편지는 ‘괴생명체’로 이름 붙일 수 있다. 나는 이 시대 혹은 보다 과거에 존재했던 퀴어의 사랑을 뽀얗고 아름답고 순수한 것으로 봉인하기보다는 그 설명되지 않고 이해받지 못한 감정을 ’괴물‘로 그리는 것이 더 마음이 든다. 괴물에게 순응이란 없다.


웨딩플래너로서의 모든 일이 끝나고, 민주혜와 최현우의 청첩장을 받아든 현우. 친한 친구 결혼식의 하객으로 초대받은 현우는 약간은 기운이 빠진 채로 식장에 있다. 결혼식장 로비에 놓인, 행복해보이는 커플 사진. 가기 전에 잠깐 신부 대기실을 찾은 현우는 이미 식장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와 함께 주혜가 파우더룸에 현우에게 줄 선물을 남겼다는 얘기를 헬퍼에게 전해듣는다. 그 선물은 20년 만에 도착했지만 전혀 늦지 않은, 벽에 쓰인 편지 혹은 예언이다.


“마지막으로 줬던 편지에 답장하고 싶었어. 이 순간에도 여전히, 영원히.”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중요한 노래가 있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다. 작품에서는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가수의 이름은 ‘톰 앤드 제리’로, 노래 제목은 ‘Echoes of stillness(고요의 메아리)’로 바꾸고, 가사도 전면적으로 수정했지만, 원곡과 비교해보면 몇 가지 주요한 단어, ‘예언(자)/prophecy, prophet’ ‘(세상의) 바보들/fools’ ‘(지하의) 벽/walls’ 등을 살려두었다. 그렇게, 주혜와 현우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던 장소에서 자주 듣던 이 노래는, 추억에 갇히지 않고 미래로 이어진다.

기록된 말은 공간을 점유하지만 전해지지 않은 말은 무가치하게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역사가 될 수 없는 ‘침묵의 소리’이자 ‘고요의 메아리’라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안그람 작가의 이 만화는 그 짧은 분량 안에 퀴어 영화에서의 클리셰를 이상할 만큼 착착 전개하면서, 결국 마지막에 ‘괴물’ ‘괴생명체’를 풀어놓는다. 이 괴물은 결혼식 도중 도주하는 신부와 그의 손을 잡은 여자이며, 그 괴생명체는 신부대기실 파우더룸 벽에 쓰인 낙서다. 이렇듯 과거의 ‘예언’은 사라져버려도 모를 무언가였지만, 그 예언을 소망하는 사람, 실현하고자 애쓰는 사람에 의해 현실이 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퀴어인 우리가 쉼없이 벽장 속에서 써내려간 일기, 편지, 이야기들, 그것은 예언이 되어 떠돌고, 그것을 실현할 수신자를 영원히 기다린다.

첫사랑의 아련함은 모든 사랑 이야기의 중요하게 등장하는 감정이다. 그러나 나는 내 마지막에 떠올릴 단 하나의 존재. 그 존재가 고등학교 때 끝난 나의 첫사랑이 아니기를, 아무리 괴로움과 역경을 동반한다 해도 지금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사랑의 존재가 역사에 남기를,  지하의 벽에서 차곡차곡 쌓여 온 예언들이 결국 이루어지는 날이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름다운 두 신부의 결혼식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이 만화의 끝은, 너무 뻔해서, 그래서 아름답다.



(테마단편집 <이 편지가 도착하면은>에 수록된, 안그람 작가의 「예언의 수신인」을 읽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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