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혁명 5년
프란츠 파농 지음, 홍지화 옮김 / 인간사랑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알제리 혁명 5>은 제목에서 예상되는 내용과 달리 혁명지도자나 혁명 진행과정에 관한 책이 아니다. 정신과의사이자 민족해방전선FLN의 투사이기도 했던 파농은 알제리 혁명기간(1954~1959) 동안 혁명에 참여한 알제리 민중에게서 일어난 변화에 초점을 맞췄다. 혁명투쟁을 거치면서 신기하리만큼 알제리 민중들의 일상적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변화라는 단어보단 차라리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변화되는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 스스로 바뀌려 한다는 주장이 알제리에서만큼 명백했던 적이 없다. 이러한 무력항쟁은 사람의 자의식만이 아니라 오랜 지배자들이나 세상에 대한 의식, 마침내 자신의 능력범위 내에서 스스로에 대해 갖는 생각 또한 개조한다.” (25p)

 

130년의 식민지배기간은 곧 알제리 민중이 점점 불구화되는 기간이기도 했다. “정복당한 것은 땅이 아니다. 항구도 비행장도 아니다. 프랑스 식민주의는 알제리의 개개인 가운데 정착했다. 식민지배자는 피식민지배자를 숙명론, 무기력함, 수동성으로 특징 지었다. 히잡과 같은 전통에 집착하고, 라디오 같은 최신기술에 무관심하며, 심지어 죽음이 다가오는데도 의료기술을 거절하는 알제리 민중의 모습은 식민지배자의 주장을 더욱 강화했다. 봐라 너희들은 원래 미개하고 열등하다! 인종주의 뒤에 온갖 사회학적 설명들도 따라붙었다.

 

하지만 알제리 민중이 무기를 들고 일떠서면서 상황이 뒤바뀌었다. 혁명을 통해 민중들은 식민주의가, 인종주의가 그들에게 씌운 굴레를 스스로 벗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너희 식민주의가 만든 불구화의 결과라고 온몸으로 말했다.

 

그들이 히잡에 집착했던 것은, 히잡을 강제로 벗기려는 식민주의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들이 라디오에 무관심했던 것은, 그것이 오로지 식민주의의 목소리만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의료기술을 거절했던 것은, 식민주의가 작은 선의를 통해 지배를 정당화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일상적 태도 하나하나에 식민주의에 대한 거부가 스며있었다. 다만 식민지배자만이 그것을 후진국 국민이 보이는 전근대적 특성 따위로 이해했다. 유럽은 식민주의라는 명백한 원인을 앞에 두고도 문제의 원인을 근대성과 전근대성, 문화적 특징(본성) 탓으로 돌렸다.

 

먼저, 식민주의는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히잡을 문제 삼았다. 명분과 달리 실제 목표는 알제리 사회를 해체하는데 있었다. 알제리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여성들을 정복하라는 사회학자들의 조언이 잇따랐다. 알제리남성은 중세적, 야만적, 흡혈귀적 존재로 취급되었다. 유럽인들은 아랍인을 보며 천성이란 어쩔 수 없다며 손가락질 했다. 그렇다면 유럽남성들은?

 

히잡을 벗기는 것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이고, 저항을 깨는 것이며, 무모한 모험을 할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중략) 자기 손이 닿는 곳에 두고 잠정적인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의지.” (43p)

 

유럽(남성)의 정복욕이 여성보호라는 외피를 둘렀다. 아무튼 히잡을 벗어라는 요구 앞에 알제리 남성은 전통과 관습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히잡을 둘러싼 식민주의자의 공격에 피지배자는 히잡에 대한 경배로 맞선다.” 유럽인이 요구하는 가치 앞에서 알제리는 전통이라는 과거의 가치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가치는 아직 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수동적 대처는 알제리 여성들이 혁명에 참여하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유럽인 거주 지역에서 작전을 위해 알제리 여성들은 히잡을 벗었다. 어떨 때는 은폐를 위해 히잡을 다시 쓰기도 했다.

 

상황은 단지 히잡이 혁명의 도구가 된 것에만 있지 않다. 전통적인 가족관계, 남녀관계도 변하기 시작했다. 딸이 혁명에 가담한 걸 눈치 챈 아버지는 히잡에 대해, 여성의 불명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춘다. 대신 고문이나 전투에서의 죽음이 더 큰 문제가 된다. 혁명에 의해 새로운 가치들이 퍼져나간다. 부족끼리의 결혼 대신 독신남녀의 결혼이 들어선다. 아내가 독립투쟁에 나서지 않는 남편을 비난한다. 전통적 남성성이 현대적 남성성으로 대체되어간다. 무엇보다 혁명전쟁을 통해 남녀노소 모두 동질성을 확인한다. 식민주의에 의해, 전통에 의해 분산된 민중이 통일되어 간다.

 

기술에 대한 알제리 민중의 무관심과 거부도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라디오 기술을 거부하는 알제리인은 그것이 식민주의의 도구라서 거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역시나 봉건적, 전통적 금기가 거부의 표면적 이유로 나타난다. 예컨대 라디오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세속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라디오가 정복자의 도구로, 식민지배라는 틀에서 원주민의 어떤 중대 요구에도 부응하지 못하는데 있다. 이것은 1954111FLN이 반식민주의 투쟁을 시작하면서 민중들이 라디오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1956자유 알제리방송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라디오는 이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 된다.”

 

“1956년부터 알제리에서의 라디오 구입은 현대적인 정보기술에 대한 신봉이 아니라 혁명과 소통하고 혁명과 더불어 사는 유일한 방법으로 인식된다.” (99p)

 

지각방식, 지각세계 자체의 전복을 보게 된다. 알제리에서는 사실 라디오에 관해 수용적인 행동, 지지, 승인이 결코 없었다. 정신적 진화과정으로서 1956년부터 거의 기술발명과도 가까운 현상을 보게 된다.” (117p)

 

정치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의학도 식민주의에선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질병과 위생에 관한 각종 통계에도 불구하도 원주민은 서양 의학에 유보적 태도를 보인다. 유럽인들은 이런 태도를 원주민의 객관적 판단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식민주의가 객관적 판단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는 측면은 무시된다. 원주민이 서양 의학을 인정하는 것이 곧 지배에 대한 동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원주민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 것도 요청 한 것이 없었소. 누가 당신들을 불렀습니까? 병원과 항만시설을 가지고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시오.” (153p)

 

식민지 상황이 의료행위의 진실마저 왜곡한다. 물론 여기에는 본국(프랑스) 의사들이 토지소유자로서 착취자와 동일시된다는 점을 짚고 갈 필요가 있다. 혁명이 진행되면서 프랑스 당국은 의약품 판매를 금지한다. 이에 맞서 FLN은 의료시스템을 가동할 필요가 있었다. “의대생, 간호사 그리고 의사들에게 전사의 대열에 합류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이때부터 알제리 민중의 태도가 변화한다. 혁명 이전에는 침략자의 외교관쯤으로 여겨졌던 알제리인 의사는 이제 우리의의사가 되었다.

 

자신의 운명을 손에 쥔 국민은 가장 현대적인 의료기술 형태를 거의 이상하다 싶을 만큼 빨리 자기 것으로 만든다.” (187p)

 

이렇게 알제리 민중은 혁명을 통해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갔다. 식민지상황은 세계를 이분화하고 진정한 만남을 불가능하게 한다. 식민지배자의 억압은 원주민에게 유럽인들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숙명론, 무기력함, 수동성이 강제된다. 비극은 반복된다. 파농에게 무장투쟁은 이 비극의 고리를 끊는 첫 걸음이었다. 제아무리 식민지배자가 몰아붙여도 전통과 관습 속으로 더욱 고개를 파고 들던 알제리 민중들은 혁명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했다. 식민지배에 맞서면서 신기하게도 보편성을 향해 나아갔다. <알제리 혁명5>은 혁명이란 무엇인지, 해방이란 무엇인지 민중들의 얼굴을 통해 보여준다. 비록 파농은 알제리 독립을 1년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지만, 변화하는 민중들을 통해 다가오는 해방을 목도할 수 있었다.

 

19604<우리는 왜 폭력을 사용하는가?> 파농 발표문


알제리 민중의 폭력은 평화에 대한 증오도 인간적인 접촉의 거부도 전쟁만이 알제리에서 식민체제를 끝낼 수 있다는 확신도 아닙니다.

알제리 민중은 자신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해결책을 선택했고, 이 선택을 유지해갈 것입니다드골 장군은 알제리 민중을 깨부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에게 협상합시다. 현대사에 어울리는 해결책을 찾읍시다. 하지만 당신이 알제리 민중을 깨부수려 한다면 당신네 군대가 영광스러운 알제리 군인들의 벽에 부딪혀 깨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라고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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