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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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박연준 #난다

박연준 첫 산문집 『소란騷亂_巢卵』

☆괜찮아요. 우리가 겪은 모든 소란騷亂은
우리의 소란巢卵이 될 테니까요.
_p.14 초판 서문

어깨가 한쪽으로 조금 기운 사람, 그 어깨에 기댄 채 벽에 걸린 액자 속 그림을 응시하는 뒷모습. 두 사람은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서로 맞잡은 손에서 두 사람이 바라보는 그림으로 시선을 옮기게 하는 책 표지. 책을 펼치기 전부터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박연준 시인의 첫 산문집 『소란』을 펼쳤다.

"서쪽은 기울어가는 것들이 마지막을 기대는 곳이다."
서쪽 방에서 기울어지는 것을 생각하는 일에서 시작한 글을 읽다가 '손톱 걸음'이라고 부르는 그를 생각하는 일에서 가만히 멈춰 섰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공들여 바로 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자주 『소란』을, 여백이 자라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일렁이는 종이는 처음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눈앞에 있는 것은 겨울 바다 한 장이니까.
_p.84 겨울 바다, 껍질로 출렁이는 밤

순도 높은 그리움 한 덩이를 입장료로 들어갈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면 좋겠다. "겨울은 춥고, 높고, 길다." "지나간 것들만 따로 모아놓은 박물관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떨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혹독한 계절' 겨울, 겨울 바다에 가고 싶게 만드는 글이 종이 위에서 출렁인다. 나는 아직 보지 못한 겨울 바다, 보았지만 바라보지 않은 겨울 바다가, 책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처음은 자연스럽고, 어설퍼서 예쁘고,
단 한번이라 먹먹하기도 하다.
처음은 자신이 처음인지도 모른 채 지나가버린다.
처음은 가볍게 사라져서는 오래 기억된다.
_p.76 첫,

첫 뒤에 찍힌 쉼표를 어림을 돌보듯이 바라보았다. "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다"라는 문장에서 소란이 고요를 기를 수 있게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속삭임이 들렸다. 문장부호도 허투루 쓰지 않은 글이라니, 첫눈 오는 날처럼 설레고 기분 좋다.

박연준 시인은 매달 연재하는 톱클래스 @topclass_topp '박연준의 응시(凝視)' 2021년 11월호 '책의 얼굴, 미리 알 수 없는_나의 첫 책 이야기'에 "쓰는 사람은 누구나 '짐승'의 계절을 겪는다. 그다음에야 '첫'을 가질 수 있다."라고 했다.
기회가 '또' 올 줄 몰라서 처음이자 마지막 콘서트를 여는 가수의 심정으로, 단 한 권일 테니까 '진짜 이야기'만 담고 싶었다고. '모르고 핀 꽃'이라고 부르는 첫 책. '꽃은 가고 꽃을 가졌던 자리'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사람을 일컬어 "한밤중에 펼쳐진 책"이라고 했다는데, 나도 당신도 서로의 밤에 침입해 어느 페이지부터랄 것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열렬히 서로를 읽어나간 거겠죠.
_p.33 하필何必, 이라는 말

『소란』을 읽으며 아빠 생각이 났다. 거리감이 느껴져 아버지로 불리기 싫다는 우리 아빠. 병아리 모이 먹는 소리가 사랑스럽다고, 닭장 앞에 웅크리고 앉아 함께(어릴 때부터 뭐든 함께하는 걸 좋아하셔서) 병아리 모이 먹는 소리를 들은 아침. 더 많은 병아리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알을 품는 암탉의 품에 달걀을 더하는 부지런한 손길. 얼마나 이쁜 구름색 병아리가 나왔는지, 더 크기 전에 보러 오라는 휴대 전화 너머 목소리까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통과한 시선과 언어는 흐르고 변한다. 지금 여기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일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다.
긴 시차를 두고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은 미묘하게 혹은 두드러지게 변할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 옷을 갈아입는 나무처럼 의미의 결을 덜어내고 더해가다, 마음의 모서리가 다듬어진다.

"사랑이 편애라면, 나는 4월의 나무 이파리들을 편애한다." '글쓰기의 두려움'을 쓰다가 "끝내 시 속에서, 인생을 탕진하고야 말겠다."라고 다짐하듯 쓴 문장에 이르러 나는 박연준 시인을 편애하게 되리라, 불현듯 깨닫는다.
이 마음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지만, 나도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시를 쓸 수 있는 순하게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nandaisart @gkwlangkwlan

#난다출판사 #문학동네 #신난다 #난다서포터즈 #겨울바다
#산문집추천 #쉼표 #뒷모습 #책 #도서추천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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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리커버 개정판)
허새로미 지음 / 현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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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 #내언어에속지않는법 #허새로미

☆"남들과 달라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
     Don't be afraid to be different."    _p.41

자신이 믿는 방식으로 언어를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강의실을 떠나던 날, 저자가 학생들에게 책 표지 날개에 적어서 건넨 문구다. 저자는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점에 바탕을 둔 소통 중심의 강의를 운영하며 이중언어가 우리의 삶을 좀 더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인문학 도서로 분류되지만, 언어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이중언어 사용자의 에세이에 가까운 글이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1부 '나를 속이는 말'과 2부 '영어라는 렌즈'로 나뉘어 있다.

☆한국어는 언어적 밀치기에 최적화된,
    일종의 말로 하는 닭싸움에 능숙한 언어다.    _p.38

일반적으로 설명이나 설득을 위한 글은 논리를 바탕에 두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개별적인 특수한 사실이나 현상에서 가져온 다양한 사례를 먼저 제시한다. 다른 세계관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초월적인 영역일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모든 상호 소통은 어떤 면에서 왈츠이고 또한 전쟁이지만,
    특히 한국어는 한시도 방심할 수 없어 피로한 전쟁터이다.
     _p.39

편향적인 시각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한국어가 "빠르게 무례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언어라는 건 지나친 확대 해석이 아닐까. "매우 여러 겹의 모욕을 다른 언어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재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라는 표현은 독자가 저자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검증된 사실로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다. 예시로 든 사례들도 저자의 편향적 추측에 바탕을 두고 있어 저자의 견해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모국어에 말 하나를 더하고 나서 나는 비로소 세상이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_p.90

한국어에 상처받은 저자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모국어를 응시한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개별적인 특수한 사례를 제시해 한국어가 가진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했다. 책에는 모욕과 경멸의 말, 부정적인 감정을 묘사하고 위계와 권위에 반응하는 무례한 사례들이 담겨 있다.

저자가 예시로 든 사례 속 무례한 사람들이 한국어 사용자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You're late" 정도면 충분했을 말을 "어딜 그렇게 싸다니다 이제 기어들어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솔직히 "늦었네."라고 하면 되는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한국어가 번역되지 않는 공격성을 갖는다고 하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바이링구얼리즘Bilingualism은
   내가 무얼 보고 있는지를 판별해주는 렌즈이자
   너무 따가운 모국어로부터 나를 숨겨주는 양산이기도 했다.
    _p.90

"누구나 자기가 편안하게 느끼는 말의 군락이 따로 있다."라는 문장에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과 같은 한국어에 상처받은 저자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영어라는 새 안경을 발견한 저자는 비로소 납득할 만한 평화와 안정감을 찾았다. 이해하지 못하는 신호로 가득한 세상에서 다음 신호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언어는 사회의 문화를 반영한다. 다른 문화권의 언어를 습득할 때는 다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는 언어는 주관적인 감정과 판단이 들어가기 때문에 같은 언어라도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쓰일 수 있다.

이 책은 무례한 한국어를 쏟아내는 사람에게 상처받은 이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영어라는 렌즈를 통해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길로 안내한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영어를 구사하게 되면 갖는 장점이 궁금하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hyeonamsa
#바이링구얼리즘 #스피크이지 #이중언어생활
#2021서울국제도서전 #리커버 #개정판 #눈치
#언어 #모국어 #맥락 #책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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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 - 영화가 끝나고 도착한 편지들
조해진.김현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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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자리는비워둘게요 #조해진 #김현 #창비

영화가 끝나고 도착한 편지들
소설가 조해진과 시인 김현의 다정한 응답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영화와 편지는 어쩌면 그러한 것들에 관한 응답일지도 모릅니다.
    (...중략...)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_p.005 영화는 편지처럼 편지는 영화처럼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고 싶은 영화와 이유를 댓글로 남기는 이벤트에 당첨되어 저자 사인본을 선물 받았다. "우리의 삶이 상영되는 허공의 영화관에서..." 조해진 소설가의 가지런한 손글씨와 "싱거운 사람이 되기로 해요."라고 쓴 김현 시인의 담백한 사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책 속에는 잃어버린 시절과 마음을 찾아가는 길 위에 상영된 영화와 다정한 편지가 들어있었다.

☆곧 영화가 시작됩니다. 늦지 말고 와주세요.
     _p.180 시라는 선생님

1부 '상영 시간표를 확인해주세요'에는 소설가와 시인이 서로에게 쓴 편지를 묶었다. 겨울과 여름 사이의 계절 동안 주고받은 스무 통의 편지가 번갈아 날아든다. '머뭇거리는 우정'이라 표현한 우정의 기록은 서로에게 묻고, 듣고, 답하고 싶은 것들로 채워진다.

2부 '모모 님이라고 부를게요'에는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았다. 두 저자의 편지를 받게 될 모모 님의 좌석은 '달빛 열 공중전화 석'이다. 우리 각자의 장국영과 단짝 친구, 사랑과 연애편지, 영화와 시라는 선생님, 알다가도 모를 사람, 마음. 안부를 묻는 일에서 시작해 쉬이 답할 수 없을 것 같은 질문으로 이어지는 편지를 읽고 있으면 문득 편지가 쓰고 싶어진다.

☆눈이 녹으면 사람들은/다시 눈을 기다린단다
     _p.025 겨울 예감

조해진 소설가의 "인간은 아름답니?"라는 질문에 김현 시인은 불현듯, 죽고 싶지만 소설은 쓰고 싶다는 청소년 성소수자를 만났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에게 구십구 방울의 슬픔이 아니라 한 방울의 기쁨을 더 소중히 여기며 소설을 쓰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는 말과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 하는 질문을 건넨다.

생의 스크린에는 영화처럼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이 흘러간다. 오늘을 사는 이야기와 삶의 의문, 영화 그리고 글쓰기. 편지라는 형태로 일상을 주고받지만, 그 안에는 삶과 죽음, 사람, 사랑, 행복과 계절이 녹아들어 있다. 인간은 저마다 아름다움의 조각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며 온기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쪽에 가까운 사람.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는 일을 통해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두 사람이 응시한 시간이 담겨 있다.

☆응시하는 사람만이 대상의 심연에 닿지요.
     _p.049 바라보는 마음

책을 읽으며 보고 싶은 영화가 여러 편 생겼다. 특히 '손가락을 움직여서, 씁니다'에 나온 김보라 감독의 <벌새>. 김현 시인이 '그 시절'에 관해 적어 보내며 예상했던 <벌새> 얘기를 답장으로 받았을 때 '통했구나' 느낀 순간, 오랜 의문이 풀렸다.
즐겨 듣는 <FM 영화음악 김세윤입니다>에서 사연과 신청곡을 보내 달라고 말할 때 들려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벌새>라는 걸. 들을 때마다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인지 궁금했는데 생각지 못한 곳에서 답을 만났다.

☆이제 우리 저마다의 삶이 영사되는 허공의 영화관에서 만나요. 티켓도, 팝콘과 콜라도, 스크린과 푹신한 의자도 필요 없는 그 영화관의 제 옆자리는 당신을 위해 비어 있을 것입니다.     _p.224

영상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지는 문장을 주고받는 기분은 어떨까 궁금하다. '현아, 시인님, 너'와 '누나, 해진 누나, 소설가님'이라고 호칭이 달라질 때마다 존대의 표현과 말을 놓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글의 분위기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살면서 이름에 밝을 '현(炫)'을 쓰는 사람은 처음이라 반가웠다. 밝은 공통점도 있고 글에 스며든 다정함이 더해져 내게 온 편지를 펼친 느낌이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 꾸러미를 펼쳐보며 설레고 행복했다. "시를 읽는 이들의 가슴속엔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읽고 나서 가슴속에 질문이 쌓인 걸 보니 편지가 아니라 시를 읽은 듯하다. 구체적인 형태의 행복을 주고받은 두 사람의 편지는 자꾸만 질문을 건넨다.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부치지 않을 편지를 쓰고 또 써본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changbi_insta @juda777 @media_changbi

#미디어창비 #소설가와시인 #달빛열공중전화석
#편지 #영화리뷰 #에세이추천 #읽고담는행복
#좋은글귀 #위로되는책 #에세이 #책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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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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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황정은 #창비

타인의 애쓰는 삶은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황정은 첫 에세이집 『일기日記』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_p.76

'일기日記'로 시작해서 '일기日記'로 끝나는 11편의 에세이를 모은 책에는 작가님을 거쳐 간 책 이야기, 어떤 날과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 담겨있다. 창비의 독서 체험 플랫폼 '스위치' 연재로 만나던 글을 종이책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아무래도 스마트폰 화면보다 종이 위에 인쇄된 글을 읽는 게 눈이 편하다. 독서의 즐거움에는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종이책의 촉감과 두께, 무게감도 포함되니깐.

책날개에 인쇄된 '황정은'이라는 이름과 '소설가.'라는 단어를 오래 들여다봤다.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는 책 속 문장처럼. 작가가 버텨낸 애씀의 기록이 내 삶을 구하기도 했다.

☆어른들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견딘 밤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_p.59

반달터를 둘러싼 집에서 지켜본 눈사람의 생몰 과정을 연료로 날아올랐다가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는 고요에 내려앉는 글을 따라 걸었다.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바뀌지 않는 것들을 지나고. 바람이 많이 불어 다 날아갈 것 같은 어느 날, 작가가 글로 붙잡아둔 기억을 읽었다.

적당한 거리에 놓인 단단한 돌 하나같은 문장을 여럿 건넜다. 시작을 잊지 않으려 애썼지만, 생각의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널 때마다 선명해지는 감각에 잠시 책을 덮어둬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세계가 열린 것처럼 소리와 색과 감정이 분명해졌으므로 나는 그 순간을 내가 시작된 순간으로 여기고 있다.
거기서 시작되었다. 파도를 기다려,라는 말로.     _p.66

아마 내게 가장 오랜 기억도 공포와 혐오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 순간을 내가 시작된 순간으로 여긴다는 게 왠지 서러웠다. 기록은 기억하려는 의지가 담긴 행위다. 어떤 말이나 사건을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한다는 뜻이다.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행위에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다.

☆눈송이들이 소리를 먹어치우며 내리는 소리,
   소리라기보다는 기척에 가까운데, 가을과 겨울 사이
   이 지역에 짙게 끼곤 하는 안개의 기척과 닮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밀도로, 눈 기척은 조금 소란하다.
   _p.28

눈이 내릴 때 들리는 소리가 한 편의 수묵화처럼 그려져 소리 내 읽어 보았다. 먹으로 그린 그림 같은 문장 너머 노을이 번지는 듯하다. 작가는 어떤 날의 농담濃淡을 담백하고 고요하게 그려냈다. 소설가의 모든 글이 소설의 문장이 되는 건 아닐 테지만. 소설을 쓰지 않는 시간에 작가는 어떤 글을 쓸까 궁금했는데, 감각을 일깨우는 시선이 참 따듯했다.

적당한 책갈피가 드물어 책갈피를 조금씩 모으고 있다는 부분을 읽을 땐 나도 모르게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글을 쓴 듯해서. 갓 네살 된 조카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이름 민요상. 그가 누구냐며 어른들끼리 궁금해하다가 최근에야 불현듯 알게 된 글자의 비밀도 흥미로웠다.

책의 마지막에는 "소설 한편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10월의 마지막 주에 받은 고독단 북레터 '이달의 별색 인터뷰' 주인공은 황정은 소설가였다. 인터뷰에서 다음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일 것 같다고 하셨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들을 나도 사랑합니다.
다들 평안하시기를."

황정은 소설가의 다음 글을 빨리 만나고 싶다.
또 보게 될 그날까지 건강하시기를.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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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황정은에세이 #에세이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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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레 망다랭 1~2 - 전2권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송이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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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 #레망다랭 #시몬드보부아르 #고마워요현암요정 #읽고담는행복

☆누가 알겠어? 언젠가는 내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지.
    정말 누가 알겠어?    _p.593 『레 망다랭 2』

1944년 8월 25일 파리가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되던 날. 등장인물들은 가난과 전쟁으로 물든 4년간의 암울했던 나치 점령이 끝난 프랑스에서 격정적 시기를 맞이한다. 작가는 전쟁 후의 분위기에 혼란스럽고 복잡해진 작가와 지식인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책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경험한 뜨거운 여름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전쟁이 끝난 뒤의 세상은 달과 같은 고요 속에 잠긴 침울한 농담 같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정치와 이념은 개인의 행복과 맞은편에 놓인다. 긴 터널을 벗어나 자신을 돌보아야 할 때를 마주한 인물들은 저마다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오래된 가치들, 즉 진리나 자유, 개인의 도덕,
    문학, 사상에는 어떤 의미가, 또 어떤 기회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일까?    _p.352 『레 망다랭 1』

사회와 세계가 붕괴된 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 헤맨다. 전쟁의 생존자들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힘들다. 모든 것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공포와 슬픔은 무관심과 시간으로 서서히 부식된 폐허 위를 감도는 침묵처럼 무겁다.

3인칭과 1인칭 시점을 교차해 시점의 한계를 보완한 작가의 시도가 인상적이다. 작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전개되는 앙리의 이야기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된 안의 목소리를 번갈아 들려준다.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 안의 이야기가 좀 더 가깝게 다가온다. 안의 섬세한 감정과 심리가 드러나는 문장에 작가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작가의 고유한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결국 끊임없이 다시 살기 시작하는 거야.   
    나는 다시 살기를 원해.    _p.455 『레 망다랭 1』

도구의 세계 속에서 기술자처럼 사는 앙리. 《레스푸아》를 창간한 그는 정치의 난장판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정치로 자신이 소모될까 두렵고 새로운 책임을 떠안는 게 불안하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앞으로 다가올 운명을 생각하지 않은 채 소설을 썼다. 그는 전쟁 전의 삶을 되찾고 새로운 활동을 하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 계획을 세웠다. 여유를 원하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주인으로 남아 있고 싶어 한다.

뒤브뢰유의 아내이자 정신과 의사인 안. 과거 속에서 쉴 수 없는 생존자들이 안의 진료실에 찾아온다. 안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전쟁에 휩쓸린 개개인의 보잘것없는 죽음에 괴로워 잠들지 못한다. 뉴욕에서 열린 정신분석학회에 초대되어 미국을 방문해 운명적 사랑을 만난다.

☆'도대체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떤 가치가 있지?'
    _p.150 『레 망다랭 2』

솔직히 말해서 1,2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압박에 자꾸만 시작을 미뤘다. 들고 다니며 읽기에는 부담스러워서 하루를 마친 저녁에 잠들기 전까지 책을 읽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더해져 어느새 그러한 일상에 익숙해졌다. 책장을 넘길수록 아직 뒷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작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문학의 역할은 무엇인지, 예술과 정치, 개인의 행복과 자유에 관해 다양한 질문을 건넨다. 저자가 글을 쓰며 쏟아부은 애씀의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방지턱처럼 마음이 걸려 덜컹거리는 문장을 만나면 속도를 줄이고 잠시 멈춰서 천천히 곱씹었다. 갑자기 밀려드는 감정의 물결에 자주 마음이 일렁였다.

멈추지 말고 소설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와요. 작가의 배려인 듯 지치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게 애정씬이 중간중간 표지판처럼 나온다. 긴 호흡의 벽돌 책을 읽으며 함께한 물리적 시간만큼 낯설었던 인물과도 점차 가까워졌다. 읽는 동안 흘러간 계절처럼 마음 풍경이 달라졌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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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이 옮김 #최광렬 표지 그림 #공쿠르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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