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나서 격정에 휘말려 몇 날 몇 일 잠도 못 이루던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주변엔 또 얼마나 추천을 하고 다녔던가. 처음은 별 관심도 없는 지루한 카메라 이야기와 단조로운 주인공의 일상에 하품만 났지만. 자세히 보니 등장 인물들에게서 낮설지 않은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글의 서술형식도 좋은데, 과하지 않은 수식어와 이해하기 쉬운 묘사로 읽기 편했다. 중간중간 카메라를 설명하는 부분은 지식이 전혀 없는데다 관심이 없어 지루했지만, 불이 난 산을 탈출하면서 연기로 뒤덮힌 산을 기어 1단, 40키로로 달리며 앤이 울먹이는 부분은 지켜보는 나조차 가슴조렸다. 마침내 산을 빠져나와 산소 마스크를 썼을 땐 안도에 한숨마저 나오더라. 그만큼 흡인력 있었다.
엔딩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엔딩이 이게 다야?, 라며 몇 번이고 다시 읽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읽으면서 보이는 것도 참 많았다. 그게 뭔지는 나도 정확히 표현 못하지만 말이다.
*약간의 스포일러 주의(주요인물 설명, 나름의 분석)*
주인공. 밴 브레드포드는 현실과 타협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에 올라 꿈은 취미로만 즐긴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지루한 카메라 이야기는 그의 꿈에 대한 갈망, 단조로운 일상은 사회적으론 인정받지만 스스로 만족하고 있지 못함을 나타낸 듯하다.(죽은 이들의 유서를 새로 쓰는 변호사라니. 듣기만 해도 음침하고 지루하지 않은가.) 실제로도, 주인공이 모든걸 내려놓고 나가 사진사로써 새로 시작하는 부분부터가 매우 흥미진진해진다.
아내 베스는 꿈에 집중하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반복되는 실패에 크게 상심하고 원인을 찾는데, 그 화살이 남편인 밴에게 향하게 된다. 그가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주었기에 집안일이나 하고, 아이를 돌보고, 이웃들과 테니스를 치며 수다나 떠는 시시한 인간이 되었다는 식인데-.
순 억지. 밴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밴이 그렇게 살라고 유도한 것도, 강요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단지 먹고 살려고 열심이 돈을 번 죄밖엔 없다. 물론 젊은 시절 혐오하던 모습들이 자신의 것이 되어 버렸으니 매일 매일이 끔찍하겠지. 이해는 하지만 돌파구를 찾는 건 결국 스스로의 일이다. 남에게 잘못을 돌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단순한 화풀이일 뿐.
또 소설에는 게리라는 재미난 인물도 존재하는데, 그는 꿈에 가진 것 전부를 투자하며 산다. 시간, 돈, 인맥. 금방이라도 성공할 것처럼 그는 꿈을 놓아버린 이들을 비웃으며 착실히 성공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다 허세다. 그의 집에는 채 수납하지 못한 밀린 고지서들과 채용을 거부하는 편지들만 산처럼 쌓여있다. 컴퓨터에 저장된 편지들은 그가 사진사로써 일하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고 비굴하게 일자리를 요구했는지를 절절히 보여준다. 이쯤되니 깐족대던 얌체 게리가 불쌍해 보이기 까지 한다. 언젠가 모 연예인이 `꿈을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만 포기할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나쁘다.`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여기서 부터는 사담이다.
여기까지가 주요 인물 설명이지만 이 책의 후반엔 더 재미난 케릭터들이 많다. (특히 나는 술주정뱅이 칼럼리스트가 마음에 든다.) 하지만 이 리뷰의 제목에 맞춰 이야기를 이으려면 여기까지 설명하는 편이 적당하리라.
나는 이 글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이유가 나와 비슷해서 공감을 느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도 글쟁이인데 직업은 플라스틱 사출 성형 설계자다. (아직은 일개 사원이다.) 또한 어릴적 꿈은 성악가, 화가, 로봇 엔지니어였다. 지금 하는 일과 약간 비슷하지만 여기까지 오게된 동기가 스스로도 불순하다고 어느정도 자각은 하고 있다.
노래는 매 순간 가슴이 벅차고 즐겁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띄워주어 내가 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을 만끽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는 피터지는 경쟁과 비좁의 성공의 문에 지래 겁먹고 취미가 되었다. 그림도 마찬가지. 초등학교때 이미 재능 넘치는 친구들을 잔뜩 보고서 고이 접어놨다. 그리고는 공학자라는 길을 선택했는데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없어 기계쪽으로 왔다. (로봇공학의 주요 핵심은 구동 시스템과 프로그램에 있다. 하드웨어의 한계가 어느정도 극복되면 그다음부터는 보다 인간에 가까운 소프트 웨어를 만드는 것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 배우는 일이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들에 대해서도 배우고 그들을 요리조리 피해 온전한 목적을 수행하도록 브라켓이나 덕트를 설계하는 것이 내 일이다. 공간지각능력도 높고 3D CAD도 따지고보면 그림 그리기이니 오히려 적성에 딱 맞다. 하지만 여러가지 일을 놓지 못하고 취미로써 계속 발전하려는 내 노력이 후에는 점점 퇴색되어 일에만 몰두하게 될까봐 솔직히 두렵다. 너무 여러가지에 발을 걸치고 있어 이도저도 아니게 될까봐 그것도 겁난다.
내가 혐호하는 모습들은 뒤에서 상사 뒷담화나 하고 연예인들 연애설이나 들먹이며 희희낙락하는 사람들. 스트레스는 술이나 담배로 풀며 퇴근 후, 혹은 휴일에 하루종일 바보상자에 매달려 있다 잠드는 사람들. 내가 힘든건 모든게 나라 탓이라며 명확한 이유도 없이 그저 원망만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모습들을 경계하고는 있지만 나중엔 나도 모르게 그들처럼 될거란 것을 안다. (실제로도 취업이 잘 되지않아 부모님을 탓하고 집에서 하루종일 게임만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베스처럼 모든것이 끔찍해 원망의 화살을 주변 사람들에게, 혹은 사회에 돌리고 싶겠지. 그래도 한 번 해쳐나와서 그런지 두 번 빠져든다고 해도 처음처럼 끔찍하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라며 여유를 부리게 되지 않을까?
작중 루디(술주정뱅이 칼럼리스트)가 한 말이 있다. 작가란 아주 세세한 디테일들을 모아 큰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지금의 나는 이런 세세한 디테일을 모으는 중이 아닐까 싶다. 결과를 만들어내려고 해도 아직 쌓아놓은 것으론 그럴듯한 결과물 하나 내놓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쌓는 중이다. 배울게 너무나도 많다. 이게 쌓기만 하다가 끝날지도 모르는 이야기지만 언젠가 내가 만족할 만한, 번듯한 글 하나 써낼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