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채드윅(지음), 전경훈(옮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 그리스도교 신학의 아버지》, 뿌리와이파리, 2016.


(제1장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형성 과정 요약)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 신학에서 근대 낭만주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사상과 문화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력은 그가 탐구했던 다양한 이론과 사상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히 신플라톤주의는 그를 회심으로 이끌었다. 회심의 과정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종합하여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구성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있어서 중세 신학과 철학의 뿌리가 되었다. "신의 사랑에 중심을 두고 있"는 그의 사상은 서구 신비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양측은 모두 신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문헌을 인용하며 논쟁을 벌였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이 완벽해질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개념에 반대하는 논쟁을 벌였다. 이성을 중시했던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감정을 중시한 낭만주의 운동이 등장했는데, 인간의 감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오늘날처럼 우리가 '마음'이란 단어를 쓰게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 덕분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플라톤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예리한 사람이었으며", "비언어적 소통에 대해 비판적으로 연구한 선구자였다." 이처럼 서양의 지적 전통에 막대한 유산을 남긴 그의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가 "고대사회에 속했던 사람"이며, "그의 지성과 사고방식은 모두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및 철학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원후 354년부터 430년까지 생애 대부분을 북아프리카에서 보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으며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지중해 세계의 일부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 고전 문학을 배웠고 20대 때에는 키케로의 대화편들을 읽었다. 특히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윤리와 종교에 관한 주제들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주제들에 대한 관심은 한때 점성술과 비의적 신지학에 빠져들게 했고 결국 금욕주의적 덕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마니교로 개종하게 만들었다. 마니교의 교리는 성경에서 차용한 몇 가지 주제와 용어를 이원론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신화가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신화를 제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마니교 교리에 실망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그리스도교 지식인 암브로시우스와 심플리키아누스를 만났고 그들을 통해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접했다. 키케로를 읽고 "열아홉 살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 이끌렸다면, 플라톤주의 철학서들을 읽은 서른한 살의 아우구스티누스는 [....] 교회로 향하게 되었다."


교회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 복음서의 머리말이나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2서 3장과 4장 같은 신약성경"을 주의 깊게 읽었다. 그는 플라톤과 그리스도 사이가 매우 가깝다고 생각했으며, 교회의 가르침은 "대중을 위한 플라톤 철학"이라고 보았다. 그 플라톤 철학은 "당시의 '현대' 플라톤 철학, 곧 오늘날 우리가 신플라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의 권위와 플라톤으로 상징되는 이성이 "진리에 이르는 두 개의 평행선"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적으로 이성에 앞서는 권위는 방향을 제시한다. 그 방향을 따라가며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은 실제 경험 세계 안에서는 권위에 앞선다. 이성만으로는 온전한 앎에 도달할 수 없다. 반대로 권위에만 의지해서는 참된 권위에서 나오는 주장과 거짓 권위를 내세우는 주장을 가려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만이 최고의 이성에 의해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그리스도는 신플라톤주의의 "최고 존재 셋 중 하나인 정신과도 동일한 하느님의 지(智) 자체"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 가져온 개념들을 다듬어 그리스도교에 이식함으로써 풍성한 신학 사상의 꽃을 피웠다. 그 꽃은 수사학, 윤리학, 철학 등 긍정적 계기들만이 아니라 마니교와 같은 부정적 계기들도 밑거름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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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셀더하위스(지음), 신호섭(옮김), 《루터, 루터를 말하다》, 세움북스, 2016.



중세 유럽에서 그랬다던가, 태어나자마자 나는 할머니 품에 안겨 영세와 동시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세례명은 그대로 호적에 기재되어 공적 호칭이 되었다. 할머니에 의한 할머니를 위한 가톨릭 신자가 되어 열두 해를 살았을 무렵 "무시무시한 천둥폭풍우를 만났다." 어머니가 개신교로 개종을 선언했다. 종교 문제가 아니어도 편치않던 고부 관계는 극으로 치달았다. 교황처럼 할머니는 박해했고 루터처럼 어머니는 저항했다.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서서히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어머니에 의한 어머니를 위한 개신교도로 산 햇수가 가톨릭 신자로 살았던 기간을 상쇄할 무렵,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부흥과 성장에만 마음을 빼앗겨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본질은 간데없고 가식과 위선만 난무하는 교회에 의문이 생겼다. 교회 안에서 소심하게 이의도 제기해보고 교회 밖에서 '가나안 성도'로 떠돌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가톨릭 신자로 살았던 시간에 개신교도로 살았던 시간을 더한 만큼 또 세월이 흘러갔다. 철 지난 유행가처럼 저항도 함께 흘러갔다.

끓어오르던 저항의 열기가 식어버리자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저항의 아이콘, 프로테스탄트의 아버지 마르틴 루터. 그런데 아는 것이라고는 '면죄부 반대' 밖에 없는 한마디로 '루.알.못'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두꺼운 책은 베개로 쓸 게 아니라면 인테리어 소품일 뿐이고 어려운 신학 용어로 도배된 책은 폼이야 나겠지만 라틴어 원서를 읽겠다고 덤비는 것과 다를 바 없을 테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런 수준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방대하지 않으면서도 루터의 삶 전체를 이해하기 쉽도록 간명하게 집약한 전기가 적절하겠다. 《루터, 루터를 말하다》의 목차를 살펴보면 이 책이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루터의 생애를 시대순으로 나누고 각 시대별로 중요한 사건들을 조목조목 다루고 있다. 게다가 서론에서 저자는 "가능한 이 책은 루터 자신이 한 말들과 그의 동시대 인물들이 한 말을 통해서 루터를 묘사했다"고 하니 저항하는 한 인간이 개혁의 길을 걸으며 했던 생각을 나름대로 따라가며 파악하는 데에도 유용할 수 있겠다.

가장 궁금한 지점부터 살펴보자.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는 그 유명한―하지만 오늘날 읽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은―95개조 논제가 나오기 전, 루터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당시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그 결과 도시 전체에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 떨었고 그 가운데 루터도 있었다." 그는 수도사가 되기로 했다. "왜냐하면 루터는 철저한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깊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에 입문한 후에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서 '여기 나의 거룩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모든 행실을 통해 경건하고도 엄격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루터가 한 이 말에는 로마의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다. 훗날 루터는 그 오류를 지적하고 한계를 비판하게 될 것이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러한 결심을 한 것은 개혁자 루터가 아니라 새내기 수도사 루터일 뿐이었다.

경건하고 엄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수도사 시절의 루터가 무엇을 했는지 루터는 말한다.

"나는 모든 규칙을 가혹할 정도로 준수했습니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수도사로 지냈습니다. 그동안 기도와 금식과 철야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 나 자신을 고문했습니다. 추위는 나를 거의 죽음으로 몰고 갈 뻔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내 방에 갇혀 내게 주어진 모든 기도의 시간을 끝낼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아주 극단으로 치달았고 나의 몸과 영혼을 우리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만일 내가 좀 더 수도원에 있었다면, 나는 철야와 기도와 낭독과 다른 의로운 생활을 추구하다 죽음에 이르렀을지도 모릅니다."

인상적인 몇 부분을 옮겨 적었는데, 과장된 수사가 포함되었으리라. 그 과장을 덜어내더라도 루터가 어디에 관심을 쏟았던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을 찾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어설프게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학대하면서까지 자기 자신에게 저항했다. 끝까지 밀고 나가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 그 한계에서,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철저한 자각에서 은혜를 맛보았고 복음을 발견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온몸으로 겪은 깨달음이었다. 한계까지 자신을 밀고 나갔던 것이 첫 번째 저항이었다면 깨달음 이후의 과정은 두 번째 저항이었다. 첫 번째 저항으로부터 곧바로 두 번째 저항이 시작되었고, 루터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것, 믿었던 것을 모두 폐기했다. 그것은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던 토대 전체를 무너뜨리는,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는 저항이었다.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 문 앞에 선 루터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었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부터 열두 해(!) 동안 길고 고통스러운 저항 속에서 끈기있게 하나님을 찾은 끝에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그렇게 벼려졌다.

500년 전 개혁은 종교 영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 사회, 문화를 포괄하여 서유럽 전체를 뒤흔든 변혁이었다. 그 변혁의 중심 어느 한 곳에 루터가 있었다. 개혁을 생각한다면 루터에게 귀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루터가 본래의 루터가 아니라 내 생각, 혹은 어떤 누군가의 생각을 투사한 루터의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종교개혁과 그 주인공 루터를 기리는 일 만큼이나 그를 둘러싼 허상을 거두어내는 일도 필요하다. 그것은 '루터를 말하는 루터'에게서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길어 올리는 작업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저항이 무엇이고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는 정신. 그 정신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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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놓고 친구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발견한다. 한계를 직면한 욥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고백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


죽음을 제외하고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이 동시에 욥에게 들이닥친다. 욥은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친구들의 충고는 고통의 이유를 더욱더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인간에게 닥치는 고통을 바라보는 욥의 생각도 그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뿐 아니라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걱정하며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그러하기에 지금 그는 왜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경건하다. 하나님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명백한 대상으로 인식하는 그들에게는 인간의 고통은 죄의 결과이며,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며,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운 것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실재와 맞닥뜨린 욥은 더이상 사변에도, 전통의 권위에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죄의 결과로서의 고통과 그 고통의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는 통념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욥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불합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가 불합리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고 묻는다. 고통을 바라보는 욥의 관점이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된 것이다. 인간이 대답할 수 없는 이 물음에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려보지만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한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욥은 한계에 부딪힌다.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한계에 다다른 욥은 계시를 통해 우주 만물의 거대하고 질서 정연한 체계에 비해 인간의 인식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닫는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고통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의심함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룬다. 인간의 총체적 한계를 자각한 욥을 따라 말한다면, 나는 내가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그것이, 아니 그것만이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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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믿음에 의한 의로움: 갈라티아서)


바울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믿음으로"와 "의롭게 된다"로 나누어 각각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바울이 처했던 당시 상황과 이 말을 해야 했던 이유도 함께 따져볼 것이다. "의롭게 된다"는 말부터 생각해보자.


바울은 "수동태 동사 '의롭게 되다'"를 사법적 의미 대신 일반적으로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변화되다, 옮겨지다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바울에게 이 용어는 ""세례를 받"음, "그리스도를 입"음, 그분과 "하나"가 됨, "그리스도께 속함"이란 표현들"과 같은 의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마르틴 루터는 바울의 이 용어를 사법적 의미로 이해하면서 "한 그리스도인이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루터에게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여전히 없어지지 않는 "죄에 대한 가책"이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루터'라는 안경을 잠시 벗어 놓고, 바울이 처했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한 바울은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충돌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들어오려면 "남자들의 할례를 비롯해 모세의 율법을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표준적 유다인이 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바울은 창세기의 두 구절을 근거로 반론을 펼쳤다. ""아브람〔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셨다"(창세기 15:6). "세상 모든 이방인들이 그를 통하여 축복을 받을 것이다"(창세기 18:18)." 따라서 "이방인들이 채워야 할 필요조건은 오직 믿음 뿐이다." 바울은 단순한 논리적 반박을 넘어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한 이들에게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바울은 왜 이렇게까지 분노한 것일까?


바울은 할례를 포함한 음식 및 안식일 준수 규정 등에 대해 "지킬 수도 있고 지키지 않을 수도 있는 율법이라 보았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고, "유다인과 같은 방식으로 살기를 "강요한" 데"에 분노했다. 이러한 강요는 구원받으려면 율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꼭 필요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된다." 바울의 분노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의 죽음과 부활로써 세상을 구원하려 하셨다는 신학적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에 들기 위해 율법을 지킴으로써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 "곧 죄에서 순종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율법 아래에서 은총 아래로" 옮겨지는 것,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본질적 의미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 선언은 적대자들의 공격에 맞서 바울이 펼친 신학적 확신과 소명에 의한 강력한 변론이다. 바울은 이 확신과 소명 의식을 바탕으로 보편종교로 확장해 나가는 그리스도교의 청사진을 그린다. 그의 설계는 4세기에 이르러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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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 《일리아스》에서 신이 행하는 불가사의한 기적의 중심에는 영웅이 있다. 영웅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감정을 지닌, 서로 이해하고 이해시키려 노력하며 서로에게 다가가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지만, 그 운명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그 자체를 향한 연민을 보여 줄 때 위대함이 드러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신은 "인간의 경험 세계에 무리 없이 끼어들 수 있"는 모습으로 변신한다. 기적은 인간의 관습을 훼손하지도, 세계의 흐름을 드러내놓고 왜곡하지도 않으면서 일상의 경험 세계로 들어온다. 기적이 눈에 띄게 현실 세계에 개입하는 경우에는 인간의 행위도 두드러진다. 한편, 기적은 잔인함과 짝을 이룬다. 신은 한쪽을 돕기 위해 상대편을 파멸로 몬다. 신이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가도 "인간은 변함없이 자부심과 이상을 간직하며, 제자리를 지킨다." 신의 잔인함은 인간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한다. 불가사의하고 신성한 기적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배경이 된다.

호메로스는 "영웅과 전쟁을 위주로 하는 줄거리 속에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평화로운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부드럽고 은밀하게 넣는다." 이야기 속에서 영웅과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이 대비되면서 영웅의 인간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또 다른 특징은 "인간들이 함께 토론하고 여러 검토를 거쳐 현명한 해결책을 얻으려고 온 힘을 다한다는 것이다." 수시로 회의를 소집하는 영웅들은 타당성 있는 논거를 바탕으로 논증을 구성하여 설득하려는 연설과 언변을 보여 준다. "즉,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언제나 이해하려고 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한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인간은 "죽기 마련인" 존재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들도 "죽기 마련인" 존재다. "영웅은 아무리 신의 자식일지라도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연민은 맞서 싸우는 두 진영 중 어느 한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연민은 "개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 그 자체로 향한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의 만남에서도 반전의 계기가 된 것은 연민이다. 대치하는 양쪽 진영의 두 사람이 적으로 만나 애도 속에서 인간적 연대감을 느낀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영웅은 위대한 존재인 동시에 유한한 존재다.

호메 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무한성을 내면에 지닌 유한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인간은 오만하다. 무한을 향한 열정을 잃은 인간은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를 초월하여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우리에게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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