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의한 희생자는 전선의 군인들보다 후방의 민간인들이 더 많았는데, 그 원인 중 하나로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을 꼽을 수 있다. 마을의 작은 전쟁에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게 된 바탕에는 오랜 세월 쌓여온 “마을 주민들 간의 갈등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시작된 이러한 갈등구조는 전쟁으로 인해 일시에 극단적으로 폭발했고, 전쟁은 끝났지만, “그때 있었던 일은 60년이 다 되도록 마을을 붙잡아두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군인의 수는 남북한 합해서 약 44만명, 민간인 사망자의 합은 약 65만명으로 군인보다 민간인의 희생이 훨씬 컸다. 전쟁기간 동안 “이웃한 마을 주민들이, 혹은 한 마을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이, 심지어는 한 집안 사람들이 좌우로 갈려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처음에는 피해자였던 이들이 나중에는 가해자가 되었고, 처음에는 가해자였던 이들이 나중에는 피해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민간인 학살은 궁극적으로는 군이나 경찰 등 국가권력의 지시에 의해 자행된 것이었지만,” 그와 함께 “마을 주민들 내부에 이미 충돌을 가져올 수 있는 갈등요소들이 있었고, 이것이 전쟁을 계기로 폭발했던 것”이었다.

마을의 갈등은 조선사회를 규정해온 신분제가 갑오개혁을 통해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신분의식의 세대 간, 계층 간 균열과 혼란은 해방을 전후하여 더 커지고 있던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이러한 시기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한 “인민군의 진주는 신분제하에서 억눌리면서 갖은 핍박과 설움을 당해오던 이들에게는 신분제를 전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로 받아들여졌”고, 이로 인하여 신분과 계급에 따라 친족 간에 또는 마을과 마을 사이에 연쇄적인 충돌이 벌어졌다. 종교와 이념 간의 갈등도 커다란 충돌을 불러온 중요한 원인이었는데, “해방 이후 친이승만 노선을 걸어왔고, 일부는 실제 우익단체에 참여하기도 했”던 기독교인들과 “종교는 아편이라는 관점, 그리고 기독교는 우익 편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도들을 숙청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인민군과 지방좌익들 사이에 벌어진 충돌은 기독교인,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은 “인민재판과 (인민군) 철수 시의 학살에 주민들을 동원”하였고, “다시 국군과 경찰이 들어오면서 이번에는 남쪽 국가권력의 묵인하에 민간인들이 개입된 학살이 진행되었다.” 인민군이 철수한 뒤, 부역자들에 대한 색출과 처벌이 진행되면서 “많은 이들이 마을을 떠나 산으로 들어갔고, 또 체포되어 감옥에 갔”으며 “일부 마을에서는 부역자나 그들의 가족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인민군과 지방 좌익 세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은 9.28서울수복 이후 가족들이 시신을 모두 찾아가 다른 곳에 묻었지만, 인민군에 부역한 이들의 시신은 경찰의 눈이 무서워 아무도 찾아가지 못했다고” 하며, “추방당한 이들 가운데에는 조상들의 뼈가 묻혀 있는 마을로 돌아오고자 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마을에서는 이들을 절대 받아주지 않았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전쟁 이전에 마을에서 벌어진 좌우익 간의 충돌, 인민군이 들어온 이후 시작된 학살, 인민군 철수 시 벌어진 엄청난 학살과 수복 후 벌어진 보복, 그리고 입산한 이들의 최후, 전쟁 이후 좌익 가족들이 겪은 수난 등등”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자 자기고백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분석한 결과, 학살과 보복의 배경에는 신분과 계급 간의 갈등, 친족과 마을 간의 갈등, 종교와 이념 간의 갈등 등이 “복합적 갈등구조”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한국전쟁이 끝난지 60여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사회는 이 복합적 갈등구조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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