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선언하고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질문을 받은 대화자는 난문에 빠지고 당혹감을 느끼며 결국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대화자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것은 대화자에게 덕과 좋음에 관한 앎에의 열망이 생겨나도록 하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은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의 정의를 탐구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 자신은 “시종일관 덕의 모델로서 제시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무지의 선언은 “일종의 속임수라고 믿을 만”하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속임수를 쓰는 이유는 “무지를 가장 함으로써 질문자의 자리를 확보”하고 “무지의 선언이 교육적 목적을 위한 일종의 간계로 기능함으로써 … 대화자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대화자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 보이고 또 그것을 인정하도록” 하며, “아울러 철학을 구성하는 지식에 대한 이러한 탐구의 필요성을 그들 스스로 갖게끔” 하려는 것이다.

질문을 통해 “답변자가 동일한 주제에 관해 모순된 주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그 주장을 논파하는 것을 “논박술(elenchos)”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논박술이 “자기 자신을 아는 데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영혼이 자기 자신을 깨닫기 위해서는, 즉 자신이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가늠하는 명확한 잣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관계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영혼이 타자의 중재를 상정한 이상, 이는 소크라테스적 논박술이 개입하는 것을 뜻하고, 내적 성찰의 형식만으로는 자신에 대한 앎을 획득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논박술의 “보살핌을 통해 지적 교만으로부터 정화되고 치유된 영혼은 곧바로 한결 더 신중해지고 현명해진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박을 당한 대화자는 “자신의 무지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유익한 수치심이며 … 그 수치심이야말로 그를 앎으로, 또 결과적으로는 덕과 행복으로 인도하는 내면의 대화의 첫 단계”인 것이다.

논박술을 통해 이르게 되는 덕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덕이 하나의 앎이며, 덕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를 획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간주”했다. 그는 “지식이 기술 활동 분야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 지식이 윤리와 정치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성공을 보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덕은 일종의 지식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덕에 대한 앎은 덕에 부합하거나 혹은 반대되는 행위와 처신을 식별케 해주는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는 덕의 본성에 관해 무지한 상태로 있는 한 좋은 삶을 영위하리라는 어떠한 보증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악을 자행하는 이는 무지에 의해” 악을 행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좋음과 덕의 진정한 본성을 제대로 배웠다면, 그들은 결코 악을 저지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은 엄격하게 주지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에서 언제나 무지를 자처하며 질문자의 자리에 선다. 끝까지 질문을 밀고 나감으로써 결국 대화자의 무지를 드러내는 소크라테스 논박술의 진정한 목적은 대화자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지식과 좋음에 대한 열망이 생겨나도록 만드는 데 있다. 앎에 있어서 주체성을 중시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항상 대화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2013년 대한민국에 넘쳐나는 다종다양한 멘토들은 세상의 온갖 질문에 대해 상세하고 친절한 답변들을 쏟아내고 있다. 현명한 멘토들 덕분에 대한민국에서는 굳이 당혹스러움을 느낄 필요도, 이유도 없게 되었다. 참으로 편리하고 실용적인 사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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