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읽는 이를 겸손하게 만든다.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천 년 전에 쓰인 책이 그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 내 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가 죽는데, 그 안에 담긴 치밀한 구조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흘깃이라도 보게 되면 과연 사람이 쓴 것이 맞을까 싶은 의심마저 든다. 그런데 이러한 고전의 탁월함은 고전 읽기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세계에 대한 인식과 삶의 방식이 현재와 전혀 다른 먼 과거에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만 생각해봐도 그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고전 읽기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고전 읽는 법을 안내하는 책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하는데, 문제는 마땅한 안내서를 찾기도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고전이 읽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고 한 까닭은 내가 그리스도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나름으로는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자로, 영원한 통치자로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그 절대적 무한성 앞에서 어찌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기 때문에 수시로 솟구치는 오만함을 피하지도, 자각하지도 못하고 살아간다. 이렇게 고전을 읽어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이유도 대책 없이 뿜어 나오는 오만을 억누르기 위함이다. 성경도 – 이런저런 이유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으나 – 고전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일차적인 목적도 유한성을 자각하는 데 있다.

<< 성경 읽는 법>>은 “독자가 성경을 읽고 자신과 세계를 새로이 발견"할 것을 권유하는 괜찮은 안내서다. 자신과 세계의 새로운 발견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쓴 사람들이 저마다의 경험으로부터 신, 인간, 세계, 역사에 관해 말하는 것을 우선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표면의 이야기에만 질질 끌려다니지 말고, 이야기의 배후에 숨은 화자가 인간으로 겪어 온 다양한 경험을 음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표면의 이야기에만 질질 끌려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 읽기는 당연히 어렵"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은 성경이 "정전과 고전이기에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고전이기에 성경은 "이질적인 고대의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질적인 고대의 세계상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성경 속 많은 이야기들은 현대의 독자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신의 행동"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또한 성경은 오랜 시간 우여곡절을 겪은 후 오늘날과 같은 정전으로 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성경 속 "문서의 배열순은 그리스도교회의 예배 시 봉독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제멋대로 배열된 이야기들"처럼 보이는데, "읽는 이가 서재에 틀어박혀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는 일은 예상도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인쇄된 목차에 따라 읽어야 한다고 굳게 믿"을 필요도 없다.

<< 성경 읽는 법>>의 핵심은 "성경 읽기는 당연히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 이는 "성경을 자기 책임으로 자주적으로 읽으려"는 노력이다. 교회는 성경을 읽는 "기본 문법"을 이미 가지고 있다. 이 기본 문법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 중에는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 해석"이 있는데, 이렇게 "읽는 방식은 신약성경에 무수히 나타난다. 그리스도교회의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읽기도 당연히 그것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읽기만을 고집하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성경은 교회의 것이고 멋대로 읽을 수 없고 무엇보다도 교회에서의 읽기를 알아야 한다는 식의 자기 규제가 작동해 버"린다. 이러한 규제는 성경을 어렵고 딱딱한 책, "읽다 보면 지쳐 버리는” 책으로 만드는 원인이다. “어려움에 시달리는 한”, “성경에서 그토록 좋은 것이 이야기되어도 정작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며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는 찬성도 반대도, 동의도 거절도 있을 수 없다.”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읽기가 중요한 만큼 “자주적인 읽기"도 중요하다. 어떤 측면에서는 자주적인 읽기의 바탕 위에서만 전통적, 규범적으로 '올바른’ 읽기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전통과 규범은 강요와 억압이 아닌 자발적인 복종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세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주적인 읽기를 통해 "성경 앞에서 자기와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이는 “누구에게든,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만 할 일이다.” 그런데 “참된 경험은 더디게 찾아온다. 그것을 차분하게 기다리는 자세가 중요하다.” 기다림 또한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하나님이 관계를 맺는 중요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