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살았던 춘추 시대는 혼란한 시대였다. 변화가 불가피한 시대에 공자는 스승과 제자라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공자가 추구한 신념은 표면적으로는 옛 질서로의 복귀였으나 궁극적 목표는 배움을 내면화하여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봉건 질서가 흔들리던 춘추 시대"는 "혼란하고 무질서해서 수많은 사람이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던 시대다. 군주들은 "능력은 있지만 그다지 원칙은 없는, 고분고분한 신하"를 찾았던 반면 "집권 대부들은 걸핏하면" 자신들의 "분수에 넘치게 군주에게나 어울리는 예의를 차리려 했"다. 이처럼 "각 나라가 내부적으로 '예'가 무시되고 무너지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자는 "'예'의 외적 형식과 내적 정신이 서로 근본적으로 어긋나 버린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면의 감정을 소홀히 한 탓에 '예'는 고리타분한 형식으로 전락"하였으며, 형식화된 '예'는 "인간의 진실한 감정과 이어졌던 끈이 끊어"진 채로 "버려지고,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봉 건 질서의 분열은 신분 질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본래의 봉건 체제에 따르면 '군자'가 '군자'이고 '야인'이 '야인'임을 결정하는 것은 신분이었"으며, "'군자'는 귀족의 왕관학을 배웠고 '야인'은 그런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귀족 교육의 핵심인 글쓰기가 공자를 통해 확대되고 전파되어 그 결과, 중국 최초의 민간 저술이 탄생했"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이 서로 필기한 내용을 대조하고 토론과 논쟁을 거쳐 묶어 낸 책"으로 "그 전에는 없었던 인간관계, 즉 사제관계를 구현"한 "혁명적인 의의가 있"는 텍스트이다. "교육은 있었으되 전문적인 교사는 없었"던 춘추 시대에 공자는 "최초의 스승이자 그 시대의 유일무이한 스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교육에서 중심은 바로 '예'였"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철저히 '예'의 정신을 이해하고 내면화"할 것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예'의 정신은 인간의 "진실한 감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세상을 구하는 방법은 '예'의 정신을 탐구하고 처음에 설정된 '예'의 원초적인 의미로 돌아가 다시금 '예'가 인간 내면의 진실한 감정과 결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공자가 본으로 삼았던 "주공이 건립한 예악禮樂의 질서"였으며, 공자는 "차별없는 교육"을 통해 이를 실현해 나갔다. 이로써 공자가 회복하고자 했던 옛 질서, 즉 신분 질서를 기반으로 한 "주나라 초기의 봉건 체계"는 역설적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새로운 질서로 고양되었다.

공자는 전통적 질서가 무너진 혼란한 시대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던 최초의 스승이었다. 21세기 한반도 역시 예가 사라지고 가치가 전도된 혼란한 시대를 겪고 있다. 이 혼란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고전을 스승으로 삼아 '오래된 지식'에서 '새로운 지혜'를 배우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더위도 물러가고 있으니 공자와 그의 말을 공부하는 법을 배워서 논어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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