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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도 길을 잃는다 - 창비장편소설
박정요 지음 / 창비 / 1998년 1월
평점 :
품절
독서일기 (2008.12. 31.)
나를 설레게 한 소설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산본 분수대 광장엔 소박한 촛불이 밝혀진다.
광장 한 귀퉁이 가로등 위로는 촛불집회를 감시하는 카메라가 설치되어있고, 정보과 형사들도 나와서 내내 추위에 떨며 임무수행을 하기도 한다. 마이크 잡고 외치는 나에게선 반정부 구호도 어김없이 튀어 나온다.
함께 촛불을 밝히던 이들이 나의 블로그를 방문한 뒤로는 자꾸만 강권한다. 촛불은 누구라도 켜면 되니 에너지를 모아서 글만 쓰라고.
그럼 그대들이 내 대신 광장에서 끝까지 촛불을 밝혀 줄테야? 나의 말에 아무도 답을 안한다.
솔직히 나의 고민 - 소설과 운동을 병행할 에너지가 안되는-을 그네들이 다시 환기시킨 것인데, 대책 없기로는 나나 그네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들 중 한 사람인 K,는 나의 블로그를 통해 다시 문학에 대한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단다. 시와 소설을 공부하던 K가 함께 한 어느 목요일, 나는 한 작가의 얘기를 전해들었다.
박정요. 문예중앙으로 등단해 장편으로 <어른도 길을 잃는다> 쓰다. 건강이 많이 안좋아 이틀 걸러 신장투석을 해야 하는 조건에서도 글로 생계를 이어가는 작가......
K가 나에게 박정요 작가의 소설을 선물하겠노라고 그랬음에도 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생활비가 바닥 난 상태였는데 그동안 알라딘에서 책 구입하며 쌓인 적립금이 몇 만원되니 잠시나마 행복해진 마음으로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어른도 길을 잃는다>...... 한 권의 책이 내게 오도록 내내 설렜다. 그리고 읽는 동안 역시 설렜다. 다 읽어가는 것이 아까워 잠시 담배를 태워물며 천천히 맛을 음미하게 하던 소설...... 참 오랜만에 맛보는 책과의 연애다.
어른도 길을 잃는다 
- 박정요, 장편, 창비
"행남아 행남아. 어서 나온나! 아 이누무 가시낭년, 빨리 나와 불넘으란 말이다! 행남아악!"
바닷내음 물씬나는 토속 서정... 그 속에 담긴 성장기 소녀의 성장통이 눈부시다. 어른도 길을 잃어, 시대의 비애는 깊어갔다. 한 권의 장편에서 여러 인생들의 한평생을 만나며, 아픈 우리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소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픈 질곡의 역사는 독자를 그리 무겁게 만들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윤흥길의 <장마>가 떠오른다. <장마> 역시 소년의 시선으로 아픈 근현대사의 단면을 미학적 울림으로 그려냈기에.
<어른도 길을 잃는다>...... 문체, 스토리, 인물, 메시지...... 다 매력적이다. 반짝 거리는 그녀의 문장들은 결코 경박한 감각을 쫒지 않는다. 사유의 품격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문체다.
고향의 품속 같은 서정.... 그 속의 생명력 넘치는 인간군상들.... 바닷내음 물씬 풍겨오는 갯마을의 토속적 정취와 토속어... 자연과 교감할 줄 아는 시골 아이들의 생동감과 천진난만함 등이 나를 매료시킨다.
사춘기 초입에 들어선 주인공 소녀가 민들레 한 송이에서 우주적 비밀을 알아차리게 되는 장면은 몽환적이고 특히 더 매력적이다.
주인공 소녀는 아들만 우선시하던 가부장적 관습이 특히 강한 마을에서 부모의 특별대우를 받을 만한 구석이라곤 없던 일곱째다. 잠보이자 좀 얼띠기도 한, 열한 살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불행과 비극 마저도 흥미진진한 무엇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열한 살에서 열 대여섯 살 먹기까지 소녀가 깨달은 어른들 세상의 진실은 '어른도 길을 잃는다' 는 것. 소녀의 시선으로 볼 때 뼈저린 우리의 근현대사의 숱한 부침들은 주역인 어른세대의 '잠시 길잃은 모습'이기도 하다.
흔히 만날 수 있는, 내면 추적에 그치는 개인적 성장소설이었다면 내게 그리 매혹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엔 나의 어린날이, 고향 마을의 정경이, 사춘기 무렵의 불안과 경이감이, 그대로 재현되기도 하거니와, 시대의 아픔과 그 험난한 세월을 건너온 인물들의 삶이 미학적 울림을 주면서 잘 형상화 되어있다. 한 마을 피붙이들이 좌우대립의 격랑에 휘말려들어간 소재를 정면에서 다룬 소설들은 이미 많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담담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소녀의 시선을 통한 거리두기로, 시대의 아픔을 오히려 더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는 점이 내게는 더욱 매력있었던 것이다.
'아, 내가 써보고 싶은 소설도 이런 맛인데.... '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나의 가슴속 울림을 들었던가. 또한 나는 처음으로 작가의 고향땅이 해남이란 것에 대해 한없이 부러운 감정에 빠져들었다.
작가에게 고향이란 그이의 문체이기도 하고, 작가의식의 뼈대이기도 한 그 무엇이렸다.
나에게도 뒷산에 말승냥이 울음소리 들리던 시골 고향은 있으나 아쉽게도 그곳에서 자란 기억이 10년 정도다.
깊은 밤 할머니 깨워 대문 밖 뒷간에 갈 때면 들려오던 말승냥이 울음소리, 개울 끝까지 다다르면 바로 북한땅이 나올듯 하던 임진강변의 싱그런 정취.... 이런 고향의 소리와 냄새들이 늘 내 안에서 출렁이건만, 막상 나는 그런 글을 써낼 기억의 빈곤함을 느끼곤 한다. 말이 느려서 그런가, 난 고향이 충청도냐는 말을 자주 들을 정도로 고향 없는 서울내기일 뿐이다.
이 소설도 선물하고픈 이들이 많이 떠오른다. 그야말로 나 혼자 읽기엔 아까운 소설이기에. 아마 이름발 있는 작가가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면 굉장한 갈채를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소설이 독자와 쉽게 만나지 못하고 묻혀져 가는 게 안타깝다.
소설을 읽고 얼굴도 모르는 작가에서 직접 전화를 해서 소감을 들려줬던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게다. 이 소설을 소개해준 K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고통스런 투병 중에 이런 멋진 작품을 낳기까지 작가가 흘렸을 눈물 앞에, 작가의 투혼 앞에, 경의를 표한다. 몸의 고통을 통해 한 달음에 훌쩍 비상해 달관과 낙천성으로 건강한 에너지를 뿜어낸다는 작가 박정요. 김형경 작가가 그녀에 대해 들려준 발문도 뭉클했다.
나도 건강이 안 좋아서 그런 걸까.....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게 하던, 소설가다.
홀로 살면서 일주일에 서너 번씩 힘든 신장투석을 해야하는 투병의 나날. 오로지 문학이 존재이유가 될 박정요 작가에게 문학신의 가호가 있기를.....! 쓰고 싶은 거 맘껏 쓸 때까지는 그녀가 지상에 있도록 운명의 신이 기다려주기를......!
소설을 읽는 내내, 무신론자인 나는 나도 모르게 신께 간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 책 만난 날- 2008. 12.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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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일 타계하셨다. 프로필 수정함.)

박정요
195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남.
198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 '무적(霧笛)'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8년 장편 <어른도 길을 잃는다>, 창비 펴냄.
1999년 17회 신동엽 창작기금 수혜
2008년 여성작가 공동 단편 모음집 <2와 2분의1>펴냄
2012.12.2. 뇌출혈로 타계
(2012.12.3.) 애도의 시간...
이천팔 년 겨울, 이 소설에 대한 나의 소감도 들려드리며 전화로만 잠시 얘기를 나눴다.
촛불시위로 정신 없이 바쁘던 때라 나중에 꼭 산행에 함께 하자며 대화를 마무리 했었다.
그런 후 벌써 4년이 훌쩍 지났다. 통화 후 2년여 동안은 투쟁에 집중하거나 수배 중이거나 해서 찾아뵐 여유가 없었다.
후에 여유가 생겼을 땐 내가 문학과 너무 멀어져 있었다. 매일 읽고 쓰며 제대로 문학을 할 때 찾아뵙고 싶던 마음이 컸을 거다.
건강은 어떠실까... 요즘은 어떤 소설을 쓰고 계실까... 가끔씩 마음 속에 차오르던 소설가. 내 마음 속 아늑한 그 자리에서 자주 나에게 말을 걸어오던 작가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일 2012년 2013년. 내년의 공부계획도 세우며 이사 준비를 하는 동안 .... 요 며칠도 그녀 생각을 했으리.
2013년엔 꼭 찾아뵐 수 있으리, 나도 이젠 매일 소설 생각을 할 테고 그녀의 소설 <어른도 길을 잃는다>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으리....그러며.
어제 우연히 인터넷에서 그녀가 뇌출혈로 쓰러져 위급한 상태란 소식을 접했다.
그녀 생각을 하다 까무룩히 잠이 들었고, 오늘 새벽녁 깨어나자 마자 그녀가 떠올랐다.
아아, 이렇게 가버리시다니..... .....!
박정요 선생님.... 육신의 고통 없는 그곳에서 편히 쉬시길 빕니다. _()_
프로필 사진 속 환히 웃는 얼굴이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유일한 모습이지만,
<어른도 길을 잃는다> 소설 속에서 당신은 영원히 살아 계실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