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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하나님 - 이주와 난민, 그리고 환대 이야기
캐런 곤잘레스 지음, 박명준 옮김, 이일 해설 / 바람이불어오는곳 / 2021년 2월
평점 :
캐런 곤잘레스의 ‘보시는 하나님’은 이주의 시대, ‘환대(歡待)’의 의미를 성경적 관점에서 명징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룻, 하갈, 시로페니키아 여인 등 성경 속 ‘타자(他者)’들의 이야기와 과테말라 출신 이주민인 저자의 삶의 여정을 교차하며, 하나님이 이들을 보시고 기억하셨음을 이야기한다. 노예, 여자, 외국인, ‘외국 것’이라 불렸던 이름 없는 여인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으나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며,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자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혼자인 것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이 보신다는 것만큼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것은 나를 아시며 주목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어 미래까지 보시고 이끄신다.
오늘날 우리가 이처럼 ‘보시는 하나님’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전 세계 곳곳에서 이주민과 난민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단일민족의 신화가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주민들에게 너무도 손쉽게 혐오의 프레임을 덧씌운다. 환대를 실천해야 할 한국 교회에서조차 이주민들의 존재는 철저히 비가시적이다.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사태에서 난민 반대운동의 중심에 보수 기독교계가 자리했던 불편한 현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며 환대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이주와 다문화에 관심 있지만 이주민과 난민 문제는 어쩐지 멀게만 느껴지는 우리에게 저자는 이들의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보통 중심인물에 자신을 대입하곤 한다. 하갈보다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스마엘보다는 이삭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저자는 하갈, 시로페니키아 여인,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주변인이 성경 이야기의 중심임을, 이들의 입장에 서볼 것을 촉구한다. 나아가 중심인물로 여겨지는 아브라함, 요셉, 예수님조차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이주민이자 난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낯설게 보기’를 통해 던지는 저자의 질문은 ‘누가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가 섬겨야 할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성경 속 ‘타자’들을 다르게 볼 때, 이에 투영된 오늘날 이주민들의 삶도 재해석되었다. 룻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이주민들에게 정정당당하게 일할 권리,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을, 이주민 범죄자였던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이주민을 규정하는 우리의 법과 언어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주노동자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동하기로 한 능동적인 사람들이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국경과 법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하갈처럼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이주민들을 만나주시며, 애굽의 요셉처럼 모든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신다. 우리가 하찮고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일들을 해나감으로써 이주민들은 매일매일 ‘일상의 신학’, ‘생존의 신학’을 살아간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주’ 문제에 침묵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대’와 ‘귀속’은 단지 윤리적 언명(言明)이 아니라 이들의 고통에 눈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럼에도 이주민들을 ‘왜 환대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작은 자’의 얼굴로 오신 하나님을 보고, 듣고, 환영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국경의 선 긋기, 한정된 재화의 배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이들을 환대하는 것이 곧 ‘얼마 되지 않는’ 내 것을 나누어야 하는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으로서 더 높은 하나님 나라의 법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경륜(경제, economy)의 풍성함을 믿고 이들을 환영할 것을 독려한다.
물론 이주와 난민 문제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저임금 생산노동, 재생산 노동의 배치와 이로 인한 착취와 인권 침해, 전쟁, 인종주의 같은 문제와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이일, 2021: 21)임에 틀림없다. 미국이 과테말라 내전을 지원하고, 한국이 예멘 내전에 무기를 수출한 것처럼 난민 문제는 보다 근본적 매듭을 풀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주는 미덕은 이처럼 거대한 문제에 눈감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도전하게 한다는 점이다. 기도와 반성, 정치적 옹호에 이르기까지 행동과 성찰을 위한 저자의 아이디어는 매우 친절하기까지 하다.
많은 생각거리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 교회가 이러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어떻게 품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보다도 교인이 넘쳐나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시선은 과연 누구를 향해 있는가. 남미인이고 과테말라인이며 이주민이고 여자인 곤잘레스의 다양성과 교차성을 한국 교회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민족과 인종뿐 아니라 세대, 계층, 성별 등 다양한 정체성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안에서 건강하게 수용되고, 이것이 다양한 소수자들과 연대하는 접점이 되기를 바란다. 이는 이러한 다양성 자체가 소중해서라기보다, 그 모든 교차점을 가진 그 사람을 하나님이 보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