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글쓰기 나남산문선 11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기획 / 나남출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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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만사에 철저히 무능해서 글쟁이가 되고 말았다면 믿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곧이들어도 무방한 사실이다.
더욱이나 이 엄연한 사실조차 세상살이가 갈수록 시드럽고 따분할 뿐더러 역겨워지는 최근에서야 깨달았으니 역시 내 무지몽매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아무튼 어릴 때부터 얼마나 얼치기였는지 새삼스럽게 열거해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듯하다.

우선 약골로 태어난데다 겁이 많아서 운동에는 젬병이었다. 어떤 대상을 그럴듯하게 선으로 빚어내는 소질도 없었다. 음치를 겨우 면한 수준이었지만 부끄러움을 잘 타서 여러 사람 앞에서는 곧장 가락이 엉터리로 꼬이는가 하면 고저장단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무엇을 맞춤하게 빚어내는 손재주도 없었다, 무슨 일이든 힘이나 꾀로 다부지게 매조질 소질도 아예 안 비쳤다.

그러니까 내 모든 일거일동은 어딘가 짜이지 않아 엉성궂기 이를데없었다. 총기도 고만해서 학교공부도 그냥저냥 따라가는 수준이었다. 시건방져서라기 보다도 철이 늦들어서, 공부를 잘해야 출셋길이 열린다는 세상이치도 미처깨닫지 못했다.

하기야 끈기와 집중력을 발휘하여 한사코 매달리면 다들 통과하는 그런저런 관문들마다에 악착같이 덤비는 근성도 부족했다. 아마도 때이르게 어떤 체념이 제2의 성정으로 자리잡아 매사를 규제하고 있던 만큼 공부를 열심히, 또 잘하고 싶은 엄두도 못 냈던 게 분명하지 싶다. 멀뚱거리는 눈치만은 뻔해서 떳떳하게 경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도 안 갖춰진 집안형편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으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부를 하라 마라고 닦달하는 사람을 집안팎에서 못 만났던 걸보면 워낙 둔재에다 있으나마나한, 요컨대 될성부른 떡잎이 진작부터 안 비쳤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한심한 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 하나는 있었으니 그것은 책읽기였다. 내성적인 성격에다 별다른 재주도 없었으니 소일거리삼아 그쪽으로 자연히 관심이 쏠렸을 것이다.

책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서 누가 선물로라도 집어주는 법도 없었고, 또 사볼 형편도 못돼서 친구들이나 이웃집들로 부터 빌려보았다.
아무리 책이 귀했다 해도 막상 눈여겨보면 도처에 널려있는 것이 책이었다.

궁하면 통하고,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그대로 그쪽으로 눈이 뜨이자 읽을거리가 너무 많아 탈이었다.

책만 잡으면 곧장 그 속에 빠져들어 시간가는 줄 몰랐다.

-책읽기과 글쓰기의 고락 - 김원우

집안형편상 돈의 허비가 만부득이 따르는 일체의 한눈팔기는 우선적 금기사항이었다. 그런 처지였으니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마구 읽는 것이 가장 만만한 소일거리였다.

중학생인 주제에도 누님이 헌책방에서 과월호를 헐값에 사서 보던〈여원〉이나〈여상〉같은 여성용 월간종합지를 화보에서부터 편집후기까지 죄다 독파함으로써 유명인사와 여러 글쟁이들의 이름을 익힐 수 있었다. 고등학교때는 주로 학교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았다. 언젠가부터 월간〈사상계〉의 애독자로서 함석헌, 유달영 같은 계몽가의 우람한 글을, 최재서. 여석기 같은 영문학자의 좌담을 재미있게 읽어대는 조숙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현대문학〉에 매호마다 실리는 추천소감을 읽는 재미도 수월찮았다. 신간 소설책은 번역 서건 국내저작물이건 하룻밤을 지새워 다 읽어치우고 그 다음날 반납하는 나날을 보내곤 했다. 수업시간에는 눈만 멀뚱거리고 있을 뿐 강의는 귀밖으로 흘려들으면서 쉬는 시간에 읽다만 읽을거리와 눈씨름할 궁리로 마음이 바빴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무엇에 쫓기듯 읽을거리와 마냥 노닐었다.

(...)또래의 학우들과 대면하기가 싫고 시간낭비로 여겨졌다. 그러나 중앙도서관에만 들어가면 왠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정기간행물 열람실이나 햇빛이 잘들지 않아 늘 어둑신한 일반열람실의 한 고정석을 독차지하고서는 영한사전을 뒤적거리며 더러는 온종일을 삭여냈고, 졸업때까지 한껏 늑장부리는 지겨운 세월을 죽였다.

되돌아보면 한창 나이때 그처럼 몰아적으로 매달렸던 내 독서벽에도 나름의 유별난 구석은 있었다. 난독이란 말그대로 아무 책이나, 이를테면 소설. 문학평론. 전기. 역사 물. 시. 기행문. 수필 등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는 버릇이 첫번째 특징이었다.

좋게 보면 지적 욕구가 제법 출중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같은 천방지축의 독서는 일단 질보다 양부터 챙기는 젊음 특유의 허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긴 해도 한번 손에 잡은 책은 반드시 끝까지 독파한다는 자기규정은 대체로 실천했던 것 같고, 당연하게도 숙독하는 버릇에 길들여졌다.

그러나 그 정독 내지 통독에도 장애물은 너무 많았다, 가령 곳곳에서 서식하다가 느닷없이 출몰해대는 아리송한 대목들, 도무지 종잡을 수없는 앞뒤 문맥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림짐작도 못하게 만드는 전체적/부분적 작의 같은 복병들과 대적해야 하는 싸움이 그것이었다. 그야말로 난해해서 난감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츰 이력이 났다. 그런 불가해한 난적과 굳이 그 자리에서 결판을 내려고 서두르지 않는 처신이 몸에 배게 된 것이다.

숫기도 없어서 누구에게 물을 주변머리도 없었고, 또 주위에는 그런 질문에 응해줄 위인도 없었지만, 설마 누군들 책 한 권을 통째로 옳게, 또 온전하게 이해할 리야 있겠느냐라는 나름의 유한 배포가 작동하게 된 셈이었다.


-김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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