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 위태로운 정신과의사의 행복한 산티아고 피신기
김진세 지음 / 이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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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깊은 밤의 산길을 10시간 동안 걸은 일이 있다.

2016년의 새해를 조금 특별하게 맞이하고 싶어 한라산 야간 산행을 결심했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피로감이 적응되었다 싶으면 참을 수 없는 무료함을 견뎌내야 했다. 

습관처럼 들여다보던 휴대폰도 무용지물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마당에 동행자와의 대화는 사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생각' 뿐이었다. 이대로 걷다보면 하늘까지 가는게 아닌가 생각할 무렵, 정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구름 너머에서부터 떠오르는 2016년의 새해를 백록담 정상에서 만났다. 

몸이 기억하는, 작지만 분명한 성취. 바닥난 자신감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홀로, 두 발로, 길과 마주한 시간의 기억은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를 읽으며 되살아 났다. 


  타인의 고민과 깊은 속내를 마주하며 함께 답을 찾는 일을 하는 정신과 전문의. 

그 일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즐거운 일이라 생각했는데 상담 중에 환자에게 짜증을 내어버리고 만다. 

마음이 바닥을 치는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랜 버킷리스트 위에 한줄 '산티아고 순례' 였다. 그렇게 그는 800km, 30일간의 여정을 시작한다. 

여정 초반, 낯설고 열악한 환경에 질겁하고 다른 여행자와 쉽게 어울리지 못했던 그가 시간이 지날 수록 길 위에 여행자로 동화되어 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40대 중후반의 평범한 도시 생활자가 베낭을 짊어지고 걸으며 느꼈을 몸의 고통 역시, 다 안다 할 수 없지만 충분히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각기 다른 이유로 이 길을 찾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여정을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아, 마치 산티아고를 내가 다녀온 것인 냥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렇다.)

책장을 넘기며 그의 여정을 함께 걸었다.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를 읽고 다시 '그냥' 걷고 싶어졌다. 
신년 새해를 쫒아 새벽 산길을 걸었던 것처럼, 그저 걷고 싶어졌다.  
그 길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면 좋겠지만 사실 어느 길이라도 좋다. 
완벽히 혼자가 된 순간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생각뿐인 시간에, 길이 걸어와 줄 그 말들을 다시 기다린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었다. 몸집도 작지 않은데다 무릎까지 성치 않으니, 이 길이 얼마나 힘들까? 바르셀로나에서 남은 시간 여행을 하고 그 이후에 미국으로 갈 생각이라고 했다. 4일 정도 걸었는데 포기 해야 하다니, 얼마나 마음이 안 좋을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뭐 마음이 그냥 그래. 처음이 아니거든. 이번이 네번째인데...
실은 지난번에도 실패했어.
그때는 반대쪽 무릎이 몹시 아팠거든. (중략)

내가 나이가 일흔넷이야. 그리고 이미 완주를 해본 길이니까 성공에 대한 미련은 없어.
이 길은 완주하는 사람들만의 길이 아니잖아. 그저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하거든.
실패? 결코 아니야. 생각해봐. 길은 계속 걷는 거니, 끝내지 않는 한 실패는 아니지.
내가 또 언제 까미노에 올지, 아니면 다시 못 올지 모르겠지만, 길을 걷고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야. 그게 까미노든 아니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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