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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닥에 탐닉한다 ㅣ 작은 탐닉 시리즈 8
천경환 지음 / 갤리온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나는 바닥에 탐닉한다|천경환|갤리온|2007. 9|204쪽|건축|8800원
"바닥은 타임캡슐이다. 천장이 무너지고 벽이 쓰러진 한참 후에도 바닥은 홀로 남아서 우리에게 예전의 기억을 전해준다. 바닥을 파헤치는 것으로 우리는 과거와의 대화를 시작한다(프롤로그 '내가 바닥에 탐닉하는 이유')."
꽤 촉망받는 젊은 건축가가 쓴 '바닥' 이야기다. 당신이 건축에 대해 알고자 이 책을 선택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전문적인 건축용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으니까.
이 책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닥'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 갤리온은 이 책을 '작은 탐닉' 시리즈 여덟번째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 시리즈는 주로 파워블로거들이 저자다. 이 글 역시 천경환씨의 블로그에서 비롯됐다.
난 솔직히 블로거들의 저작물은 사서 읽지 않는다. 바이트가 텍스트로 전환됐을 때 너무 가볍고 초라해진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투자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천경환씨의 바닥 이야기는 소소하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그가 꽂힌 것은 왜 하필 '바닥'이었을까?
바닥은 지구의 중력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신체 일부분이 기대고 있어야 하는 곳이지만
사물을 인식하는 시감각과 멀리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종종 바닥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저자 천경환씨는 바닥을 통해 세상을 읽는다. 그의 바닥에 대한 독특한 시선은 산뜻한 감수성과 따뜻한 상상력으로 전달된다.
파리 앵벌리드(옛 프랑스 육군병원)의 아이보리색 담백한 돌바닥은 예쁜 난간과 행복하게 만난다.(82쪽) 서대문 교도소의 바닥에서 기품있는 조선이 백자(35쪽)를 본다. 부처님 오신날 줄줄이, 빼곡이 걸린 연등의 그림자를 보며 '많은 사람들의 바람과 소망이 모여 이루어진 비일상적 공간감을 자신의 설계에 담고자 한다.
탐이 나는 그의 감수성은, 비오는 날 퇴근길 풍경의 바닥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관능적으로 번뜩거리는 검은 아스팔트 표면이 거대한 생물체의 피부처럼 느껴지고, 그 거대한 생물체의 호흡과 맥박이 말 밑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45쪽)
똑같은 그 바닥 위에서
나는 왜 그저 질퍽질퍽하고 구두에 물이 새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을까.
아마도 그건 일상속에서 끊임없이 '공간'을 탐구하는 저자의 열정 때문일 것이다. 안과 밖을 뒤집는 역발상의 건물로 유명한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도 저자는 바닥에 탐닉한다. 퐁피두센터의 바닥은 기울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무명 아티스트에게 무대가 된다. 조명도 없고 세트도 없지만 광장 한 가운데 붉은 천 한 장을 펼치고 배우가 서는 순간. 경계는 구분을 통해 공간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멀리 파리가 아니더라도, 대학로에서 팝핀 댄스를 추는 비보이의 장판 한 장은 똑같은 바닥을 무대와 객석을 나누고 세상과 차단시킨다.
삼성 코엑스몰 바닥 영상게임을 보면서 나는 그저 신기했는데
저자는 인류 문명의 원동력은 신체 연장의 욕구라고 말한다. 망치나 맷돌 같은 연장이나, 칼이나 창 같은 무기, 당나귀나 말은 모두 신체 기관을 연장해 그 성능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라는 주장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시스템적으로는, 집단생활을 하며 자연인을 사회인화해 계급을 부여하고 분업을 시키는 것 또한, 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부 지배층의 신체가 대다수 집단 구성원의 신체까지 연장된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을 '오른팔이다'라고 부르는 것처럼...(145쪽)
그는 쇼핑몰 바닥을 보면서 쓸데없고 싱거운 공상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무릎을 쳤다.
이러한 사유의 힘은 뉴욕의 100년 넘은 소호의 바닥과 청계천을 비교하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을 기억하고 있는 소호와 달리 불도저로 밀었다 엎었다 한 청계천은 너무 반짝반짝 해서 오히려 천박해 보인다.
<TV 책을 말하다>에서 왜 이 책을 2008 책문화대상 '재미있는 수작'에 노미네이트 했는 지 알 것 같다. 그의 책에 대한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 그의 매력적인 건축물을 하루빨리 보고싶다는 욕망이 간질간질 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