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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트라 - 마이 웨이, 내 방식대로 현대 예술의 거장
앤서니 서머스.로빈 스완 지음, 서정협.정은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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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트라 마이 웨이, 내 방식대로>(을유문화사)

앤서니 서머스/로빈 스완 지음 (서정협, 정은미 옮김)

 

I’ve lived a life that’s full

나는 충만한 삶을 살았어

I’ve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모든 길을 다 가봤고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그리고 그보다 더욱더 중요한 건

I did it my way

나는 내 방식대로 했다는 것이지

 

<My Way>, 노래 가사 중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들어보지 않고 20세기를 살아온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20세기의 결코 죽지 않는 역사이자 전설이 되었다. 그는 그의 인생을 노래 마이 웨이에 집약해 놓았다고 주변 지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이 곡의 작사가 폴 앵카는 마이 웨이완전히 시나트라이며, 프랭크 시나트라 2세는 “I did it my way”라는 다섯 단어가 아버지에 대한 정확한 요약이라고 말했다. 시나트라 자신도 자서전과 같은 노래임을 인정했다. 여기 반가운 소식이 있다. 이런 그의 범상치 않은 삶을 온전히 담아낸 훌륭한 평전이 을유문화사에서 번역되었다. BBC 저널리스트이자 전기 작가인 앤서니 서머스가 충실하게 엮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대중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평전을 이렇게 한국어로 만나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하게 다가온다.

 

평전답게 아주 두껍지만(무려 824), 평전답지 않게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다. 물론 프랭크 시나트라의 삶에서 매력적이면서도 연민을 자아내는 요소들이 많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이렇게 지루함이 없이 엮어내는 능력이 없었다면 제아무리 ‘10대 소녀들을 끌고 다니면서 혼절하게 만들었던프랭크 시나트라라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 앤서니 서머스와 로빈 스완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크게 6가지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1. 그의 길

2. 밴드 활동

3. 정치와 예술

4. 사랑과 욕망

5. 최고의 엔터테이너

6. 최상의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

 

이 각각의 챕터 안에 연대순별로 일어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소챕터 5-6개를 포함하고 있는 형식이다. 아래는 이 책을 번역한 서정협 음악칼럼니스트의 책 줄거리 소개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1915년 미국 뉴저지주의 낙후된 선창가 호보컨에서 태어났다. 앞서 1900년 그의 할아버지 프란체스코 시나트라는 단돈 30달러를 호주머니에 넣고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뉴욕행 배를 탄다. 당시 미국 사회에 정착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백인 취급을 못 받고 더러운 이탈리아 놈으로 불리며 차별 받았다. 말라깽이 시나트라도 걸핏하면 패싸움에 휘말리곤 했다.

부모가 운영하던 술집에서 시나트라는 동전을 받는 재미에 노래를 불렀다. 외아들 시나트라의 엄마인 돌리는 호보컨의 마당발이자 아들 일이라면 극성을 떨었다. 시나트라가 고교 중퇴 후 빌빌거릴 때 동네 음악 그룹 스리 플래시스를 찾아가 자기 아들을 써달라고 집요하게 부탁해 성사시킨 이도 돌리였다. 그룹이 해체되자, 이번에도 돌리가 나서서 동네 야간 업소 러스틱 캐빈에 웨이터 겸 가수로 시나트라의 취업 자리를 연결했다. 여기서 시나트라는 이름난 밴드의 눈에 띄면서 기회를 잡기 시작했다. 시나트라의 꿈은 그의 우상 빙 크로즈비처럼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물넷인 1940년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고, 1943년 음악 잡지가 꼽은 최고 가수로 선정되었다.

그 이후 약 10년간 이른바 시나트라 히스테리가 미국을 휩쓸었다. 공연장마다 흰 양말을 신은 보비 삭서들이 무대에 속옷을 던지고, 스타에게 몰려가 키스를 퍼붓고, 혼절해서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보다 10~20년 앞선, 20세기 최초의 연예인 우상숭배 현상이었다. 여성 팬들은 시나트라 특유의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내게 노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재즈의 시대가 가고, 팝과 록의 시대가 오면서 시나트라는 적응하지 못했다. 음반사와의 계약도 줄줄이 해지되었다. 빛의 속도로 떠올랐던 스타는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시나트라를 구해준 건 뜻밖에 영화였다. 여배우 애바 가드너의 아프리카 촬영장 텐트에 구차하게 빌붙어 살며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조연 마조 역을 구걸하다시피 따냈고, 1954년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는 1955년에는 마약중동작에서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주인공으로 열연한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되기도 했다.

시나트라의 여성 편력도 이 전기에서 꽤 흐임로운 대목이다. 그는 1976년 네 번째 부인 바버라 막스에게 정착하여 놀라운 평온을 얻었다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렸다. 그레이스 켈리, 마를레네 디트리히, 진 카먼, 애바 가드너, 메릴린 먼로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 뿐 아니라, 무명의 신인 배우와 가수 등과 침대에 들었다. 그와의 데이트를 거절한 배우 페기 말리에 따르면, 시나트라는 만나서 안녕하고 인사하는 거의 모든 여자와 자는 사람이었다. 이 책은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이들 여성들과의 사랑과 결혼, 이혼과 다툼을 옐로 페이퍼 못지않게 다룬다.(820~822, 후략)

 

이외에도 무엇 하나 땅에 떨어질 것 같지 않고 고공행진만 하던 스타 시나트라의 모습에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모습까지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거대한 마피아 조직을 숙주 삼아 연예활동을 이어갔던 어두운 모습, 민주당의 지지자로서 루스벨트와 존 F.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탓에 여러 정치적 혼란에 빠졌던 순간들도 모조리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시나트라의 지인들이 했던 말들과 남아있는 기록들을 철저하게 수집하여 저널리스트다운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 평전의 신뢰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데 에너지를 절약하도록 하고, 시나트라의 삶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낮고 매력적인 바리톤의 음색, 유려한 프레이징, 애무하는 듯이 관능적이면서도 절제된 표현력,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말하는 듯한 가사전달력 등으로 유명하다.

 

우울한 시기에 가장 좋은 것은 하루 약 30센트로 살 때 먹었던 크림치즈와 땅콩 샌드위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의 일!”이었다고 시나트라는 기억을 떠올렸다. “제일 추웠던 밤에도 나는 버스 요금 10센트가 없어서 5킬로미터를 걸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원칙 하나로 일했다. 그것은 바로 활동적일 것, 할 수 있는 한 많이 연습하기이다.”(83)

 

시나트라는 자신만이 가진 독특한 박자와 발성으로 노래했고, 음절을 새롭게 나눴으며, 완벽하려고 애썼다. 그는 불완전한 발음이나 문법을 싫어했다. (중략) 그와 녹음을 같이 한 로즈메리 클루니는 그의 발음을 잊지 못한다. “어떤 노래를 부르든지 발음이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다.” (중략) 가수 줄리어스 라 로사는 이렇게 발음 기술을 향상시키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여기에 마침표를 찍고 저기에는 쉼표를 찍으면서 의미를 명확히 했다. 이는 프레이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단어들을 말하듯이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노래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는 혁명적인 시도로서 바로 지금의 시나트라를 만들었다. 아무도 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나트라는 32마디 노래를 3막짜리 연극으로 바꿀 줄 알았다.”(308~309)

 

앞서 말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들은 그의 피땀어린 노력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1살 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할 정도로 노래 부르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들였고, 이는 그가 무명의 가난한 가수지망생이었던 시절에도 그를 살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러스틱 캐빈에서 일했던 전속 트럼펫 연주자와 결혼한 루실 커크는 시나트라가 어린 가수였다고 말했다. “내가 들어 본 최고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가 입을 열면 관중이 숨을 죽였다. 그저 그가 관중을 바라보기만 해도 그들은 압도당했다. 그에게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113)

 

스태퍼드는 말했다. “좀 약해 보이는 더벅머리 총각이 나왔을 때 나는 그냥 생각했다. , 말랐네. ......그런데 그가 <Stardust>를 몇 마디 부르자 극장이 숨을 죽였다. ......여태껏 아무도 그처럼 노래를 부른 사람은 없었다.(139)

 

아먼드 도이치가 (프랭크 시나트라의) 팬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비명 같은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전에는 들어 보지 못한 소리였는데, 가수에 대한 애정과 순진무구한 에로티시즘을 절규하듯 표현하는 소리였다. 소녀들을 막아 내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내쫓으려고 하면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후략)(172)

 

프랭크가 마이크를 잡을 때 얼마나 사람들을 매혹시켰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모성 과잉’, ‘집단 최면을 자주 언급하는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은 여성 팬들이 시나트라를 엄마처럼 대하고 시나트라도 팬들을 엄마처럼 대하는 모습에 주목했다. 또한 그에게서 아버지 이미지를 보았다. 그가 일종의 음악적인 스트립쇼를 했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생각이 어느 정도 이 현상에 다가서는 분석일 것이다. (중략) 젊은 여자들은 흔히 남자에게서 여성의 모습을 원하는데, 시나트라를 보고 실신했던 소녀들은 감성적인 모습을 보이던 그를, 어떤 면에서는 자신들처럼 수줍어하는 젊은 남자로서의 그를 가슴에 그러안았다.(184)

 

이 부분에서는 심지어 20세기의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 마이클 잭슨, 21세기의 저스틴 팀버레이크나 방탄소년단을 떠오르게 만든다. 평소 시나트라의 음악을 즐겨 들으면서 받은 느낌들을 글로 적나라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10대 소녀팬들을 몰고 다니는 아이콘의 시초였다는 사실도, 평전을 읽고 알았다.

 

무서운 폭염이 전유럽을 뒤덮었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도, 시나트라의 음악은 전세계인들에게 전쟁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그의 병역이 면제된 데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그는 군부대를 돌면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의 마음을 달래주었고, 군인들에게 요즘 관심사에 대해 물으면 프랭크 시나트라라는 답변이 돌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시나트라는 잘 알려진 그의 다소 폭력적인 성향과는 다르게, 인도주의적인 성향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정치와도 연결되어 드러난다.

 

시나트라가 가지고 있는 정치 철학은 단순했고, 심지어 순진하기까지 했다. 루스벨트는 경제 피라미드 하층에 위치한 소외된 사람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는데, 시나트라는 이에 공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루스벨트를 좋아한 이유는 약자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재산이 많아도 약자가 분명하다.”(221)

 

프랭크 시나트라는 20세기 아메리칸 드림의 최대 수혜자이지만, 사실 그는 이태리의 별볼일 없는 호보컨 출신으로, 그의 출신에 대한 자격지심과 열등감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대중들의 명성과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연민과 공격성으로 점철된 삶을 살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 시대를 호령한 스타도 결국은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씁쓸하면서도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시나트라의 이런 면모가 내적으로만 곪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소외받고 있던 흑인과 유태인의 인권을 중시했고 관심을 지속적으로 기울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이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던 아버지이기도 해서, 평생 이 싸움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겠다고 말한 바도 있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국가의 시민이기도 했던 프랭크 시나트라는 여자의 남자로 남기에는 실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수많은 염문설은 내로라하는 것이었고, 그와 말을 섞은 여성들은 모두 그와 잤다고 보는 편이 맞는다는 말까지도 나돌았다. 수많은 여배우들과 가수들이 있지만, 그 중에 프랭크 시나트라와 지독하고도 집착적인 연인관계를 지속했던 가수 애바 가드너와의 러브스토리는 유명하다. 심지어 애바 가드너로 인해 자살 소동까지 일으켰다고 하니, 시나트라가 얼마나 그녀에게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브래드 덱스터가 1960년대 초에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술을 마시고 내 어깨에 기대어 울기 시작했다. 애바가 그를 나약하게, 정말 나약하게 만들었다. 그는 상처를 받았다.”(339)

 

새미 칸의 전 부인 글로리아 칸은 말했다. “친구들은 프랭크가 애바와 함께 있을 때면 아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굴종적이었다. 그는 그녀라는 존재에 복종했다. 그는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는 귀여운 강아지 같았고, 사람들은 그가 남자다움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기분이 안 좋으면, 뭐랄까 그를 해고할지도 모른다.”(346)

 

애바와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켰을 때, 프랭크는 이미 낸시 시나트라의 남편이었으며,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가 뿌린 여자들과의 수많은 염문설 때문에 오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허무함과 애정결핍을 여성들에게서 채움 받고자 했을 것이다. 자신을 화나게 하면 곧바로 폭력을 휘두르고 마피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강인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여성들 앞에서는 나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프랭크의 어머니가 강압적이고 엄격했으며, 어렸을 때 프랭크를 나약한 여자아이로 취급한 데서 기인했으리라 생각해 본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30대에 접어들며 소녀 팬들에게 얻었던 인기를 점차 잃어가고,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재기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시나트라의 <I’ve Got You Under My Skin>, <Night And Day>를 너무 좋아하는데, 이 두 곡이 편곡자 넬슨 리들과 함께 작업한 음원이라는 것을 알고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리들과 작업하면서 시나트라는 10대 소녀팬들을 뛰어넘어 미국의 모든 연령층에서 팬들을 형성하게 된다. 그가 맞은 두 번째 전성기는 리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제2의 전성기를 맞은 프랭크 시나트라라도,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누구나 장사가 못 되는 법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목소리뿐만 아니라 청력, 시력, 기억력까지 모두 잃어가는 바람에 노래를 하다가 무대 위에서 내려온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노래하고자 했다. 몇몇 인터뷰에서는 은퇴한다고 했다가, 다시 몇몇 인터뷰에서는 곧바로 힘 닿는 데까지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 했다. 이 시점에서 발표된 그의 트레이드 곡, <My Way>가 참으로 시의적절했다.

 

(비올라는 시나트라의 <My Way>를 듣고) 이렇게 회고했다. “전율을 느꼈고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였다. 그 남자는 자기 인생을 노래하고 있었다.”(701)

 

미래 영화 <하이스트>에는 이런 대화가 있다.

 

진 해크먼(강도 역) “아무도 영원히 살 수 없어.”

레베카 피전(그의 아내 역) “프랭크 시나트라는 그랬어.”

 

그는 그의 노래처럼 불멸의 인생을 살다 갔다. 새천년을 아이처럼 기다리던 프랭크 시나트라는, 밀레니엄의 동이 터오는 것을 고작 2년 남겨둔 1998년에 영원히 잠들었지만, 그의 묘비에 쓰인 문구처럼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best is yet to come.)”고 믿는다. 우리는 아마도 영원히 그의 노래를 들을 것이다. 그가 노년에 했던 공연들의 피날레에서 늘 말해왔던 것처럼.

 

“Cent’anni! 100년을 위하여! 당신이 100년을 살기를. 그리고 당신이 듣는 마지막 목소리가 나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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