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영화 <실비아>를 보았을 때, 영화 자체는 별로였지만 딱 한 장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실비아 플라스가 테드 휴즈와 결혼하고 난 뒤, 휴즈는 바닷가를 거닐며 자신의 시를 구상하고 있을 때 플라스는 빵을 굽고 저녁을 준비하며 청소를 했다. 그 모든 가사 노동이 끝나고 난 뒤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지만 그녀는 시를 한 줄도 쓰지 못한다. 공백의 시간을 견디다 못해 그녀는 책을 펼쳐보기도 하지만 역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쩌면 실비아 플라스는 천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천재 작가와 결혼하며 황홀한 꿈을 꾸었지만, 결혼 후 그녀에게 닥쳐온 것은 예전보다 더한 좌절과 환멸이다. 그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꿈꿔왔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을 수 있다는 불안감,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문, 스스로의 재능에 대한 불신. 그녀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어했지만 그 당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 좌절이야말로 플라스의 본질을 이루는 어떤 특정 부면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의 몇몇 시들은 결코 평온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토악질하듯 분노를 씹어뱉었고 스스로에 대한 자아도취적일 정도의 연민을 읊었다. 어찌 보면 미성숙해보일 정도의 그 좌절감이야말로 그녀를 어떤 숭고함의 대상으로까지 밀어올리는 추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책을 읽는 여성'에게 언제나 매혹되었다. 그런 이미지 자체가 일상에서는 무척 rare한 것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하철 안에서, 음식점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는 여성에게서는 tension이 있다. 이 책의 다음 장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호기심이거나 또는 일분일초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그런 결의 말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심각한 책은 아니다. 여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독서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쉽게쉽게 써내려간 그런 재밌는 책이다. 기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읽는 여성'에 대한 어떤 뚜렷한 상을 얻게 된다기보다는, 독서 행위에 있어 창작자만큼 '독자'라는 위치가 어떤 중요함을 획득하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주게 한다는 데 의의가 있는 듯. 내용은 어느 정도 '계몽적'이다. 플로베르의 그녀, 보바리 부인은 아무래도 부적절한 독자의 예로 되풀이 불려 나온다.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나 자신이 보바리 부인의 아류작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나. 어떤 종류의 열광이든 격렬함과 감정이입, 일방향적인 소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나. 창작의 행위에서 피어나오는 자아도취의 열광의 분위기는, 수용자가 그것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황홀한 교합의 순간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책의 이 구절 저 구절, 이 인물 저 인물, 이 사건 저 사건을 수집하고 배열하며 받아들이는 행위야말로 독자의 삶의 어느 특정 부분을 창작해내는 중요한 인자가 아닌가.

그러므로 나의 경우에, 멋지고 만족스런 독서에는 항상 에로틱한 분위기가 동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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