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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분석 - 공간, 시간, 그리고 도시의 일상생활 카이로스총서 25
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 갈무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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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읽는다는 표현에 우리는 이제 어느정도 익숙한 것 같다. 여전히 그게 뭔지는 잘 모른다 해도 ‘도시 읽기’라는 말이 들어간 책도 꽤 나온 만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인 건 분명하다. 그럼 도시 듣기는 어떨까? 리듬이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은 어쩌면 도시를 듣기위한 책이다. ‘리듬분석가는 세계를 듣는다. 특히 사람들이 ‘웅성거림’이라고 치부하는, 그러나 의미들로 가득한 것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는 침묵을 듣는다.’ 그러면 왜 읽는 것도, 보는 것도 아닌 듣기인가?

   페터 회의 소설, <콰이어트 걸>에는 특별한 청각 능력을 지닌 주인공 카스퍼가 등장한다. 그는 상대방이 내는 소리의 빠르기, 높낮이 등으로 그 사람을 파악할 뿐 아니라 도시의 다양한 소리를 들으며 각각의 장소를 다르게 이해한다. 리듬분석이 단지 뛰어난 청각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카스퍼와 리듬분석가는 ‘볼 수 없는 것’을 듣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볼 수 없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건 우리가 죽은 사람을 볼 때, 그 위에 떠 있는 ‘죽음’이라는 사건과 같은 것이다. 페르파르트는 ‘볼 수 없는 것의 생태학’이란 글에서, 오늘날 서서히 ‘볼 수 없는 것’이 사라져 가는 듯한 새로운 정치 사회적 형태가 출현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지의 전적인 가시성 체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시성 체제를 르페브르는 현전과 현재의 구별로 이야기한다. 현재의 가시성들이 마치 현전하는듯 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마주리imagerie[사진, 영상 등]는 일상을 생산하고 주입하고 수용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 이마주리는 사진이 찍힌 인물에 접근하듯이 실재와 현전성에 접근한다. 그러나 겉모습은 닮았을지 모르나 깊이도, 두께도, 살도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스펙타클은 TV 화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르페브르는 정원을 예로 든다. 나무가 있고, 풀과 벌레가 있다. 이러한 정원은 항속성과 공간적 동시성 속에서 공존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동시성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표면을 뚫고 그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보라. …… 그저 바라보기만 하지 말고 주의를 기울여 들어보라. 각각의 풀과 나무들이 저마다 복수의 리듬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즉 “이 정원과 ‘대상들’을 다리듬적으로 보게될 것이다.” 이 ‘대상’은 정지된 ‘사물’이 아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본다.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죽음’이란 사건을 떠올린다. 이 사건은 시공간 속에서 어떤 리듬을 가진 움직임이다. 그 리듬을 따라가는 우리는 이 죽음이라는 사건과 연결된 전쟁, 질병, 사고 등과 같은 더 큰 사건으로, 사건의 무대로 연결된다. 때문에 부동의 상태에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자신의 리듬을 갖고 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태로 존재한다. 정지된 ‘사물’을 뚫고, 이 ‘볼 수 없는 것’을 듣는 것, 아마도 이것이 리듬분석이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면 ‘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어떤 카메라, 어떤 이미지 혹은 이미지의 연쇄도 이 리듬을 보여줄 수 없다.” 르페브르는 ‘인간은 세계의 척도’라는 말을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우리의 구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 구성은 칸트 식의 선험적인 범주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 우리가 소유한 도구들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펼쳐진 세계는 우리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르페브르는 ‘몸’을 리듬분석의 기준으로 삼는다. 리듬분석가는 자신의 몸을 통해 리듬을 배운 후에 외부의 리듬을 파악한다. “그의 몸은 메트로놈 구실을 한다.”

   몸이 분석의 기준이라면, 그것은 구성의 출발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르페브르에게 리듬분석은 그가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왔던 일상생활에 대한 연구의 일환이다. 이 일상은 시계를 통해 양화된 시간(선형적인 시간)과 생체적 리듬(우주적, 순환적 시간)의 상호작용 속에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산업생산의 노동이 지배적이 된 시대에서는 시계시간이 우위를 점하지만, 그것에 대한 투쟁 또한 첨예해진다. 그러면 다른 시간은 없는가? ‘전유된 시간’은 르페브르가 ‘당분간’이란 단서를 달긴 하지만 어쨌든 고유의 성격을 가진 시간이다. 이 시간은 어떤 활동이 우리에게 충만함을 가져다줄 때 도래하는 시간이다. 이 활동은 “자신 그리고 세계와 일치를 이루며, 외부에서 부과된 강요나 의무가 아닌 자기 창조, 재능의 일면을 포함한다.” 즉 시간을 전유하는 것은 자기준거에 기반한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세계의 구성이 우리의 감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니까 어쩌면 ‘볼 수 없는 것’을, 사건의 리듬을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닌지도 모른다. 앞에서 언급한 페르파르트는 ‘볼 수 없는 것’의 영역이야말로 본질적인 것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영역이 다양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으며, 특이화 과정이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볼 수 없는’ 영역에 있는 리듬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외부에서 부과된 강요나 의무가 아닌” 특이성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 말이다. 그것이 ‘전유된 시간’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그런데 르페브르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리듬은 실체도 물질도 사물도 아니며, 어떤 요소들 간의 관계도 아니기 때문이다. 리듬이라는 개념은 ‘실체적인 것-관계적인 것’의 측면을 모두 갖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 이상의 무언가를 내포한다. 이 무언가를 위해 르페브르는 에너지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이 에너지 또한 어떤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리듬은 시간-공간-에너지를 연결하는 고리이며, 리듬을 만든다는 것은 시간-공간-에너지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 된다.

   우리가 도시의 리듬을 듣는 일을 단지 음악 감상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리듬을 파악하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새로운 리듬을 형성하는 것이, 시간을, 공간을, 전유하는 에너지가 ‘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사건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사유는 그것이 실천 속에 진입하는 순간 완성된다. 즉, 사용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떠오른 장면은 이런 것이다. 한 해변가의 휴양지 마을에 있을 때, 갑자기 동네 전체가 정전이 된 적이 있었다. 화창한 낮이어서 앉아서 커피 마시고 노닥거리는 일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는데, 달라진 것은 소리였다. 크지 않은 마을 전체가 정전이 되자,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갑자기 찾아온 정적이 더 인상적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전기를 통해서 나오는 소리가 사라지자 주위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고, 하늘과 바다가, 바람과 숲이, 새와 고양이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때 그 소리들은 마치 새로운 힘처럼 느껴졌고,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자, 그 공간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변해버렸다. 익숙한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말이다. 물론 전기는 곧 다시 들어왔고, 다시 동네는 예전으로 돌아갔지만, 그 느낌은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새로운 리듬이었을까? 어쨌든 익숙했던 그곳에 알지못했던 다른 지평의 무언가가 있었던 건 분명하다.

   우리가 도시를 들어야 하는 건, 그것의 리듬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그건 우리가 가시성의 체계에 함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리듬이 분명히 어딘가에서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가 발견해야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이 되어야 하는 문제, 즉 발명의 문제이다. 그때 우리는 리듬분석이라는 르페브르의 개념을 새로운 리듬의 구성으로 다르게 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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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 - 전 세계의 빚진 사람들, 미디어된 사람들, 보안된 사람들, 대의된 사람들이여,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라! 아우또노미아총서 37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 옮김, 유충현.김정연 협동번역 / 갈무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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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거세던 촛불이 꺼진 뒤, 한동안 떠나지 않았던 의문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일시적인 것으로만 여겨지는 봉기가 가지는 의미는 무얼까 하는 물음이었다. 한 친구는 내게 바뀐 게 하나도 없다고 불평했다. 이제는 집회에 나갈 마음도 들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한 쪽에서는 촛불의 힘이 이제 국회로 모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당의 기능 회복이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궁금했다. 촛불은 무엇을 바꾸었는지, 촛불이 원했던 것이 그냥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는지, 무엇보다 촛불은 무엇이었는지.


네그리와 하트가 함께 쓴 ‘선언(Declaration)’은 어쩌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이 책은 2011년 아랍의 봄에서부터 유럽을 지나 월가에 이르기까지 연쇄적으로 진행된 항쟁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봉기가 제헌(구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봉기가 제헌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다중이 그들의 질서를 스스로 구축해 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길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저자들은 그들이 제안하는 길이 이론적 작업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봉기들이 이미 “제헌(구성) 과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일련의 입헌적 원리들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즉 이 운동들이 이미 해답을 갖고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2011년은 다중의 실험이 전지구적으로 연속해서 일어난 해라고 보아도 좋겠다.

그렇다면 이 실험/봉기들은 왜 일어나게 되었나? 네그리와 하트는 이 운동을 발생시킨, 현재의 사회정치적 위기가 낳은 주체성의 형식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빚진 사람들(the indebted), 미디어된 사람들(the mediatized), 보안된 사람들(the securitized), 대의된 사람들(the represented)이 그들이다. 빚진 사람들은 변화된 자본주의적 노동관계에서 나타나는 예속의 양상이다. 학자금 대출부터 주택담보대출까지, 현대 사회에서 빚을 지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빚을 진다는 것은 오늘날 사회적 삶의 일반적 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게 중심이 공장 담벼락 밖을 떠다니게 되면서, 자본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착취한다. 이제 자본가는 공장에서 감독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 수단을 통해 생산관계와 착취를 통제한다. 그 무기가 바로 채무다. “오늘날 착취는 주로 교환이 아니라 빚에 기초하고 있다.” 이제 “빚진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하여 삶의 모든 시간을 팔아야만 한다.”

미디어된 사람들은 미디어와 소통 기술이 오늘날 삶·정치적 생산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등장하면서 나타나는 파편화된 의식을 가리킨다. 미디어된 사람들의 의식이 “웹으로 흡수되거나 병합”되면서 신체에서 분리된 삶이 웹을 떠다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소통은 물리적·신체적 함께-있음에서 일어난다. 계급은 … 정보나 심지어 사상의 유통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리적 인접성을 요구하는 정치적 정동들의 구성을 통해서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2011년의 점거는 “정치적 정동을 생성하는 퍼포먼스다.” 보안된 사람들은 총체적 감시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보안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주체가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예외 상태는 “오직 우리의 자발적 예속 때문에 존재하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대의된 사람들은 권력으로부터 명령받는 자로 분리된 자들이다. 대의는 그것이 효과적일 때조차 민주주의를 가로막는다. 대의된 사람들의 형상은, 대의체제에서는 부와 금융의 힘 때문에 부자이거나 필연적으로 부패할 자들만 대표로 선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배적 미디어가 민주적 참여를 가로막는 수단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대의 과정을 통한 정치가 끝없는 두려움을 사람들에게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앞의 세 형상과 연결된다. 때문에 저자들이 대의가 아닌, 누군가 대리해주는 삶이 아닌, 다중 스스로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고 확대하며, 관리하는 제헌의 길에 집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보인다. 대의된 사람들의 형상이 채무와 미디어와 보안에 예속된 사람들의 형상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삶, 경제, 정치의 문제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예속된 자들이 반복해서 저항의 움직임을 지속해왔다는 사실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그것은 빚, 미디어의 환영, 보안체제, 대의제를 거부하면서 시작했다. 저자들이 파고드는 이 투쟁들은 저마다 고유한 지역적 조건에 기반하고 있지만, “사실상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이집트 사람들은 튀니지의 구호를 채택했고,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의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indignados)는 타흐리르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의 경험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월스트리트 점거자들은 … 독재자에 대항하는 그 투쟁을 금융 독재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번역했다.” 그들은 어떤 곳에서는 억압적 체제에 반대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대의적 입헌체제를 문제 삼았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국가부채와 긴축조치와 대결했지만, 일련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억압적으로 주어진 것들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2011년의 투쟁들이 전지구적으로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점거라는 전략을 통해 함께-있음을, 지도자가 없는, 아니 모두가 지도자인 수평적 조직화의 실천을 통해 실질 민주주의의 원리를, 그리고 공통적인 것을 위한 투쟁을 통해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를 동시에 넘어서는 원리를 실천하고 실험했다. 이를 통해 반란과 봉기는 거부만이 아니라 창조적 과정도 작동시킨다. 이 “운동들은 민주적 관계를 욕망하며 그러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새로운 주체성을 창출하고 있다. 운동들은,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그리고 그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매뉴얼을 쓰고 있다.” 이 새로운 주체성은 공통인(the commoner)으로 정의된다. 공통인은 공통적인 것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공통인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통의 부를 구성하며, 특이성들이 상호작용하는 수평적 정치 조직화를 지향한다. 함께-있음을 넘어 함께-하기를 통해서, 공통인은 “공통한다(commons)”. 이 공통인이야말로 저자들이 2011년의 투쟁에서 그 단초를 발견하는 새로운 주체성이다. 그 투쟁들이 주로 헌법폐지적(탈구성적)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새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제헌(구성)에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저자들은 그것을 실현할 주체성, 즉 공통인을 다시 그 투쟁들에서 발견한다.

하지만 해답은 없다. 그것은 누군가 제시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 선언은 매니페스토가 아니다. 저자들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이 책에서 제안하는 것은 저자들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일반적 원리들에 조금 기여할 뿐이다. 대신 저자들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삶에 분노하는 사람들, 대의체제에 대항하는 사람들, 대안적인 삶의 형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현재의 삶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제기하고 또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우리가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해결책을 발명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이 책에서 2008년의 촛불을 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이제 그때 품었던 질문은 조금 답을 찾아가는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난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밤을 나던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모두 빚지고 대의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도 모두 ‘분노한 사람들’이었으니까. 2011년은 조금 더 일찍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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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셀프 트래블 - 터키, 그랜드바자르, 아야소피아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9
박정은 지음 / 상상출판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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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택한 첫번째 이유 '작가'
이번 가을 터키 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와중 쁘리띠님이 반갑게도 터키 책을 작업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2003년 첫 배낭여행으로 유럽에 갈 때 쁘리띠님의 떠나볼까 사이트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는데 1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도움을 받다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ㅎㅎ 나에겐 '박정은'이란 본명보다 쁘리띠님으로 더 익숙한 찰진 글 솜씨를 가진 그녀는 한국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 작가다. 다른 작가가 쓴 인도 가이드북에서도 그녀가 제공한 사진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을만큼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유명한 그녀가 쓴 책이라니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두번째 이유 '내 스타일'에 맞는 구성
여행 갈 때면 하루종일 걷는 편인데 그런 도보여행자를 위한 루트가 자세하게 나와 있어 좋다. 책에 소개돼있을 뿐 아니라 따로 휴대용으로 명소, 식당 등이 자세하게 표시돼있는 구역별 지도가 있어 책은 사전에 공부할 때 쓰고 막상 돌아다닐 때는 지도 하나만 들고 가볍게 다닐 수 있게 해놓았다. 또한 여러 지역을 많이 이동하기 보다 한 곳에 느긋하게 있는 편이라 그만큼 관심 있는 지역이 자세하게 소개돼있는 책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그런 면에서도 좋고.
예쁜 사진 자료들도 풍부해 텍스트만 있는 책에는 답답함을 느끼는 한국 여행자들도 보기 좋게 되어 있다. 
아까 말한 휴대용 지도 뒷면에는 터키 전도가 있고 책 속에 이스탄불 외 터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샤프란볼루, 카파도키아, 파묵칼레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어 다른 지역도 더불어 계획 중인 사람에게도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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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적 이성 - 포스트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 국가, 계급에 대한 비판적 성찰 아우또노미아총서 29
워너 본펠드 지음, 서창현 옮김 / 갈무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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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가능한가? 위기에 빠진 듯 하면서도, 여전히 공고해 보이는 자본주의는 마치 천지창조와 함께 시작된 영원한 존재일 것만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시대의 비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워너 본펠드의 <전복적 이성>은 역사의 과학적 법칙,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혁명의 공리를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전복적 이성은 오히려 매우 부정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은 계급에 대한 부정 속에서만, 계급 없는 사회 속에서만 자신의 긍정(성)을 발견한다.” “물질들의 사회적 구성을 폭로”하기 위한 전복의 유물론은 인간 실천의 유물론이다. 그것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계가 사회적 실천 형태들이 자본주의적으로 구성되어”,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이, 인간을 억압하는 세계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간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적 실천의 다른 구성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러한 다른 구성을 위한 길을 부정과 비판에서 출발한다.

계급 사회에서 비판적 사유는 특정 계급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계급에 대한 부정 속에서만 자신의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논의를 위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을 끌어온다. “아도르노에게, 비판적인 사회이론의 임무는 경직된, 물질 같은, 응결된 관계들을 탈신비화하여 그것들의 직접성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 실천의 관계들이 사물들의 관계로 전도되어 나타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 싸움의 출발점인 셈이다. 드러나 있는 경제적 범주들을 자연적인 것으로 사고하는 경제이론은 자기 자신을 타당한 과학으로 정립하기 위해서 인간을 제거해 버린다. 그들의 “경제적 범주들 내부에서 볼 때 인간 주체는 형이상학적인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논리 속에서는 전복적인 힘들이 설명될 수 없다. 파업을 하는 것은 노동자이지, 가변자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아도르노의 비판은 이 방해물, 즉 인간 주체가 사실상 본질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인간은 가변자본이란 개념의 동일성 속에서 부정되는 비동일성이다. 때문에 그의 부정변증법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을 화해시키는 동일성을 위한 사유가 아니라, ‘모든 동일성을 의심’하는 사유이다.

저자의 논의의 시작이 아도르노였다면, 이후 줄곧 그의 논의의 바탕이 되는 것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실천이 “경제적 객관성의 단순한 인격화인 자본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 반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맑스의 비판의 핵심적인 문제틀이다. 맑스의 비판적 이해 역시, 인간 주체를 자본 형태 속에서 부정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본다는 점에서-저자가 아도르노의 말을 빌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부정적 존재론이라 볼 수 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근본적으로 물신주의 비판이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이 상품 속에서 소멸하는 이 사회에서, “비판은 사물들 자체의 관계를 ‘인간 간의 관계’로 되돌려야”하기 때문에, 물신주의 비판은 “인간적 토대에 기초한 해독을 수반한다.” 때문에 맑스의 비판은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부정이다. 이는 자본의 전도된 형태를 비판하고, 그것의 사회적 토대, 즉 그러한 실존의 인간적 기초를 전면에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맑스의 비판은 전복적이다. 

저자는 맑스주의에 대한 구조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해석 모두를 단호히 거부한다. 저자에 따르면, 구조주의적 접근법에서의 주체는 구조이다. 인간 존재는구조들이 발산하는 명령들의 담지자 불과하며, 계급 갈등은 자본주의의 연속적 재생산에서의 기능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된다. 이러한 논리는자본이 능동적이고 자기 구성적인 사물이라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한편 주관주의적 접근법들은 형식적 법칙이 아니라, ‘주체성 개념을 강조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의 요구와 반대되는 입장을 지닌창의적이고, 소외되지 않고, 자기 결정적인 주체 상정하는 입장은 주체가 자본주의 세계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사회적 실천의 주체주의적 승인은 혁명적 주체의 직접성의 낭만적 기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단지선언된 주체 뿐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저자가 이해하는 맑스의 물신주의 비판은 역사의 법칙을 건설하거나, 무언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비판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성격을 갖는다. 저자가 이 비판과 부정의 무기를 들고 겨냥하는 곳은 국가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많은 분석은 세계화를 통해 유동하는 투기자본이 국민경제를 붕괴시키다는 식의 설명으로 나타난다(여기서 금융자본은 국민경제를 파괴하는 나쁜 자본주의로, 산업자본은 민족 공동체의 구체적이고 창의적인 기업을 구성하는, 장려해야할 대상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분석은 세계시장이 다수의 국가들과 그들의 ‘국민경제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자본은 ‘태어날 때부터 전지구적 권력’이었다. 즉 세계시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언명령’으로, 맑스에 따르면 ‘세계시장을 창조하는 경향은 자본 개념 자체에 이미 직접적으로 주어져있다.’ “자본은 민족적 성격도 애국적 결연도 갖지 않는다.” “상품의 애국심은 화폐이고, 상품의 언어는 이윤”이며, 시장은 필연적으로 세계시장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국민경제’라는 개념은 전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부는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창출되지 않으며, 국가의 목적이 부를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목적은 그 기능 속에서 드러난다. 국가의 통치 수단인 법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임금노동자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를 자신 앞에 평등하게 불러세움으로써 불평등을 은폐한다. “개인은 소유상의 불평등과 상관없이 각각의 개인의 평등을 가정하는 표준화된 권리를 갖는 추상적인 시민이 된다.” 이러한 법을 강제하는 국가는 사회 관계의 외부에 서 있는 중립적인, 공정한 매개자가 아니다. 국가는 형식적 자유와 추상적 평등의 이면 속에서, 자본의 전제라 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분리’의 재생산을 보호함으로써, 착취를 보증한다. 이러한 ‘부르주아 집행위원회’로서의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 속의 한 국가가 아니다. 국가란 자본주의 국가다.”

이러한 국가에게 대의제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한다. 대의제는 형태상으로는 민주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지배계급의 이해 관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의제의 이러한 성격은 “민주주의가 그 계급적 성격을 부정하고 인구의 실재적 이해관계의 수단으로 변형되려는 경향을 드러내자마자, 민주주의적 형태들이 부르주아에 의해 그리고 그 국가 대표자들에 의해 희생된다는 사실 속에서 명백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생각은 권력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에 의문을 갖게 한다. 레닌은 국가 권력의 계급적 성격을 바꾸는 것을 혁명으로 인식했다. 권력의 탈취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인 것은 부르주아가 국가의 주요 직책들을 확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부르주아적인 사회적 재생산 관계들의 정치 형태이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다른 국가’로써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의문시 될 수 밖에 없다. 국가는 “사회의 독특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라는 도구가 아니라, 왜 하필 국가인가라는 물음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제도 속으로 편입됨으로써, 제도화된 데모스는 약화되고, 통치의 자원이 된다. “자본과 국가에게 닥친 중대한 위험은 노동계급이 자유민주주의 체계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데모스, 즉 의존적인 대중들이 스스로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주권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인간해방은 어떻게 가능한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이에 답하는 저자의 방식은 우선 코뮤니즘이란 인간해방의 이념을 풀이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먼저 찾아가는 것이다. 코뮤니즘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해방에 대한, 인간해방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예견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착취 가능한 자원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으로 존재한다. 코뮤니즘은 법 앞에서의, 화폐 앞에서의, 국가 앞에서의 추상적 평등이 아니라 추상적 평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때문에 코뮤니즘은 “자본 및 국가에 대한 실천적인 비판이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코뮤니즘에 이르는 길에 서보자.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저자가 알려주는 출발점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라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지향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상주의야말로 진정한 현실주의이다. “불가능한 것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혁명적 당이 혁명의 조직형태라는 생각, 혁명의 수단으로서의 국가 형태라는 개념, 혁명적 주체를 한정하려는 시도. 대중의 해방은 대중 자신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고, 필요한 것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폐지”하는 것이며, 혁명적 주체의 구성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해야할 것은? 자본 및 국가에 대한 조직화된 부정, 더 나은 조건들에 대한 요구, 그리고 삶과 생존의 투쟁, 패배, ‘절정’의 순간들의 경험으로부터의 배움. 이것들은 사회적 자율이라는 혁명적 투쟁의 조직 형태를 수반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자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조직화된 부정 형태들”로서, “자신의 조직화의 방법 속에서 혁명의 목적(즉 인간해방)을 예상하는 그러한 저항의 조직적 형태들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사회적 자기결정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자율은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부정의 운동으로서, 코뮤니즘이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과 국가에 대한 투쟁과 함께 출발한다. 

요컨대, 코뮤니즘에 이르는 길은 자본주의 사회 밖의 주체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에서의 조직화된 ‘부정’을 통한 실천에 달려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인간적인 자본주의, 즉 복지국가의 귀환이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복지국가는 생산된 부의 재분배를 주요 문제로 삼는다. 하지만, 부의 생산은 여전히 국제적인 경쟁적 착취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말처럼, “노동계급의 조건을 인간화하려는 노력은 노동 착취를 긍정하는 역설을 낳는다.” 

코뮤니즘에 이르는 여정은 먼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자본과 국가에 대한 부정과 투쟁과 함께 출발한다. 때문에 코뮤니즘은 이미 시작되었고,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 뉴욕의 리버티 공원에도 있고, 강정마을에도 있고, 부산의 크레인 위에도, 그곳을 찾아가는 버스에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당장 당신과 함께 시작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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