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영점 -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 아우또노미아총서 44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옮김 / 갈무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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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시작해보자. 『혁명의 영점』(원제: Revolution at Point Zero)은 어디인가? 부제로 붙은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 아마도 이곳이다. 재생산노동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장 귀중한 상품인 노동력을 생산”하고 있고, 대부분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으며, 가사노동은 이것의 대표적인 형태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것이 바로 여성들의 재생산노동이기 때문에, 혁명의 영점도 바로 그곳이어야 하는 것이다. 즉 혁명의 영점은 자본주의의 영점이기도 하다. 때문에 재생산노동을 멈추면, 자본주의도 멈출 것이고, 재생산노동을 새롭게 조직하면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재생산노동은 혁명의 영점이다. 그렇다면 왜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인가?

저자인 실비아 페데리치에 따르면 “혁명의 걸림돌은 기술적인 노하우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노동계급 사이에 조장되는 분열”이다. 성차별은 이 분열의 대표적인 형태다. 성차별은 단순히 허위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부불가사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규제하고 분할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는 노동력재생산을 위해 막대한 부불가사노동에 의존해야 하지만, 동시에 노동력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런 재생산 활동을 평가절하해야”하기 때문에, 가사노동을 마치 여성의 본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만든다(‘당신은 천상 여자야’와 같은 끔찍한 말). 가사노동이 타고난 기질이 되면 그것은 감춰진다. 시야에서 사라진 가사노동은 재생산노동이 아니라 공장 바깥, 가정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서비스가 되었다. 그러나 재생산노동 또한 노동력이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기에, 공장의, 자본의 바깥에서 ‘여가를 누리는 가정’(이것은 많은 남성에게만 보이는 환상이다)이란 있을 수 없고, ‘사랑’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희생’은 노동착취에 대한 수사에 불과하다. 가사노동은 정말 ‘노동’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맑스는 “재생산노동을 노동자의 임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의 소비와 해당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으로 축소함으로써 재생산노동 문제를 가볍게 넘기고 말았다.”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건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분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맑스주의 이론이 21세기의 반자본주의 운동에 화답할 수 있으려면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재생산” 문제를 재고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재생산 문제를 살피지 않는다면, 우리는 노동력이란 상품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자본은 어떻게 이 과정을 ‘사랑’, ‘희생’ 등의 추상적 언어로 포장할 수 있었고, 이것이 어떻게 자본축적에 기여하고 있는지, 거꾸로 말하면 자본이 부불가사노동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삶의 모든 영역이 ‘사회적 공장’으로 얽혀 들어감에 따라, 투쟁의 장은 공장을 넘어 가정으로 확장된다. 아니, 가정은 이미 공장이었고, 그래서 투쟁의 장이었다. 그래서 여성 또한 이미 노동자였지만,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들, 심지어 여성주의자들도 여성들이 집을 떠나 ‘생산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계급투쟁’에 합류하는 것을 여성해방의 전제조건으로 여겼다. 이것은 여성도 ‘노동계급’의 일원이 됨으로써 남성과 동등해진다는 의미를 갖는 것일 테지만, 중요한 것은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남성처럼 노동하는 것은 해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남성이 이미 해방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점에서 남성과 동등하기를 원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문제는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자본주의가 성차별에 기반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여성주의의 목표는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차별에 기대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남성과 여성 모두의 노동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자본은 성차별에 의해, 여성이라는 특수한 노동자를 생산함으로써 존속하고 있기에, 여성들이 대부분 수행하는 ‘재생산’은 자본주의적 조직방식과 변혁 양자 모두에서 중심성을 갖는다. 저자가 재생산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재생산의 중심적 위치를 밝힌 것은 여성들의 투쟁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부불가사노동의 중심성을 밝히고,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상(象)을, …… 가정이라는 플랜테이션농장과 조립라인의 거대한 순환으로 재구성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전개된 가사노동에 대한 여성들의 반란이었다.” 저자가 직접 참여한 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이 수행한 “재생산노동의 발견 덕분에 자본주의적 생산은 특수한 형태의 노동자에 의존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사적 영역을 생산관계의 영역과 반자본주의 투쟁의 영역으로 재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6, 70년대의 투쟁순환에 대응하여 나타난 세계경제의 재구조화는 특히 여성들에게 파국을 몰고 왔다. “노동과 천연자원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기업자본에게 넘겨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계화는 이를 위해 모든 생존수단을 박탈해야 했고, “사회적 생산의 물적 조건과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노동의 주요 주체인 여성들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을 필요로 했다. 여성들이 자연자원(토지, 물, 삼림)의 비자본주의적 이용과 자급지향적인 농업을 지키는데 앞장서며, 공유재(공통재, 공유지, the commons)의 파괴를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등을 앞장세운 자본의 세계화는 토지와 일거리, 관습권에서 유리시키는 전 지구적 엔클로저 과정을 통해 수백만 명을 화폐수입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국가는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복지국가의 해체를 통해 노동력재생산에 대한 투자를 철회했다. “보건, 교육, 연금, 대중교통에 대한 보조금이 모두 삭감되고 높은 요금이 부과되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재생산비용을 떠안게 되자 노동력재생산의 모든 절합지점은 직접적인 축적지점으로 바뀌”었다.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직접적인 축점지점이 된 이 재생산영역을 다시 재구성하자는 것으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생산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자본과 시장의 논리 밖에서 재생산노동과 관련된 새로운 협력의 형태를 창출함으로써 재생산을 둘러싼 집합적 투쟁의 문을 다시 여는 것이다.” “그 어떤 운동도 참여자의 재생산을 중심에 두고 고민하지 않으면 지속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유재가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른다. 저자도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피터 라인보우는 에서 엔클로저 이전, 공유지를 기반으로 한 공통하기(commoning)의 삶을 그린 바 있다. 저자는 이러한 공통하기의 삶의 사례를 여성들의 공유지 수호를 위한 투쟁과 자급농업, 도시텃밭 등에서 찾는다. 자원의 공유재화(commoning)는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의 자산을 세계시장을 매개로 빼앗은 상품흐름과 우리의 재생산활동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때 우리의 재생산노동은 자본축적의 요구에 복속된 ‘노동력’ 생산만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저자와 라인보우가 모두 주장하는 것처럼, 공유재가 단지 공유하는 땅, 재화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공유재화가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공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즉, 공유재는 물질적 사물인 동시에 사회적 관계이며,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대한 공통적인 관리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우리가 새로운 집합적 생활양식을 만들어내야 하며, 당면한 사회경제적 위기가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강요한다고 말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혁명의 영점에 근접해있다는 말로 들린다. 지젝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유일한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공통적인 것’을 사유화하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활개치도록 놓아둔다면 인류의 자멸을 포함한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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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혼 動物魂 아우또노미아총서 43
맛떼오 파스퀴넬리 지음, 서창현 옮김 / 갈무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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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집을 표방하는 이 책, 『동물혼』(Animal Spirits)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시작한다. “무엇이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구성하는가?” 저자의 말을 계속 따라가보자. 이 책은 ‘동물혼이 어떻게 오늘날의 다중 개념에 속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긍정적으로 자극하는지 탐색한다.’ 정리하면, 동물혼이 다중이며, 동물혼이 공통적인 것(공유지)을 생산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핵심적인 열쇳말이라 할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은 무엇이며, 동물혼은 또 무엇인가?

마이클 하트는 사적인 것을 자본주의에, 공적인 것을 사회주의에, 그리고 공통적인 것을 코뮤니즘에 연결시킨다. 이때 공통적인 것이란 인간의 삶을 유지함에 있어 말 그대로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그러니까 우리가 서 있는 이 지구를 포함하여, 물, 공기, 삼림 등과 같은 자연적인 것들뿐 아니라 언어, 아이디어 같이 인간 노동의 산물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어떤 (비)물질적 사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위의 사적인 것-공적인 것-공통적인 것의 세 항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공통적인 것은 대상과의 어떤 관계로서, ‘소유될 수 없는 것으로 전제된 사용가치에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접근하는 형태의 점유관계’를 가리킨다. 이는 사적 소유도 공적 소유도 아닌 소유 자체를 지양하는 관계이며, 공유지에 대한 자율적인 생산/관리를 뜻한다. 이러한 공통적인 것은 하트에게 있어, 자본 안에서 자본에 대항하여 자본 너머를 상상하는 주요한 개념이다. 저자인 맛떼오 파스퀴넬리의 입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책의 독특한 지점은 그것을 생산하는 동물혼에 대한 이야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동물혼인가? 이 책에서 동물혼으로 옮겨진 animal spirits은 저자가 처음 사용하는 말은 아니다. 케인스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경제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적 충동”을 ‘animal spirits’라 불렀고(국내에서는 보통 ‘야성적 충동’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다스려져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개념을 전용하여 다중의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그는 animal spirits를 통제되어야 하는 부정적인 힘이 아니라 역사를 추동하는 살아 있는 힘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왜? 그것은 문화 영역 자체가 인간의 자연적인 공격성의 확장, 다시 말해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공격성, 악은 혁신과 혁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동물혼이란 다중의 근원적인 창조력을 의미한다. ‘동물몸은 다중들의 생산적 엔진이다.’

그러나 새로운 공유지를 둘러싼 지배적이고 추상적인 담론들, “지난 10년 동안 미디어 문화, 예술비평, 급진적 행동주의 그리고 학계를 지배해 왔던 분리의 하위종교”들은 비물질적인 것과 탈동물적인 것에만 강조점을 둔다. 또한 ‘창조적 공유지’로 대표되는 새로운 공유지에서 ‘창조성’은 선하고 순결하며 갈등이나 마찰이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창조도시, 창조산업, 창조경제…… 무언가 새로운 것이 ― 잘 보이지 않지만 ― , 새로운 경제 ―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 를 이루어 우리의 앞날을 밝혀줄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공통적인 것은 ‘오직 노동, 고통, 위험, 갈등을 통해서만 구성된다’. 착취와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공유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인간 역시 인간이란 종으로서 하나의 동물이라는 너무나도 간단한 사실을 상기해보면, 공통적인 것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실재의 물리적인 힘들과 공통적인 것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인 경제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 책의 각 장은 이 분리의 하위종교들이 감추고 있는 세 가지 영역에서의 분리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첫째가 디지털 네트워크와 자유문화, 둘째가 문화산업과 ‘창조도시’, 마지막이 전쟁 테러리즘과 인터넷 포르노의 미디어스케이프이다. 이 세 영역은 세 가지 형태의 공유지와 함께하는데, 이 공유지에는 세 가지 개념적 야수들이 늘 따라다니며 기생하고 있다. 디지털 공유지의 기업적 기생체, ‘창조도시’ 이면의 젠트리피케이션 히드라, 전쟁 포르노의 미디어스케이프를 지배하는 권력과 욕망의 머리 둘 달린 독수리가 그것이다.

이들이 기생체인 이유는 생산과정 외부에서 이윤을 착취, 아니 수탈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회관계망 서비스들은 사람들의 집합 자체가 생산하는 부를 갉아먹고, 젠트리피케이션 히드라는 사람들이 집합적으로 생산한 문화자본을 지대를 통해 착취한다. 이러한 기생적인 착취양식은 비물질노동이 지배적으로 되고 있는 현대 인지자본주의의 주요한 축적방식이다. 저자가 여기서 강조하는 부문은 “모든 비물질적인 공간들에는 그 공간들에 대한 물질적 기생체들이 있다”는 점이다. “모든 공유된 음악 파일들은 아이팟으로 귀결된다.” 저자는 신경제를 겨냥하는 정치적 행동주의가 언제나 허구적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물질적인 경제기반시설은 문제 삼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컴퓨터 화면 속의 캐릭터가 되지 않는 이상 물질적 기반을 버릴 수는 없다. 그건 인간이란 동물이 벗어날 수 없는 자체의 물질성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기존의 신경제를 겨냥한 정치적 행동주의는 물질적인 경제 기반시설은 결코 문제 삼지 않았다. 즉 이들은 컴퓨터 속 캐릭터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같은 디지털 공유지가 허울뿐인 공유지라고 비판한다. 그것이 가치창출의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물질적 생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공유지는 허구적 공유지, 즉 생산의 물질적 토대로부터 분리된 관념적인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공유지를 관념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담론들에 맞서 저자가 제시하는 동물혼은 ‘인류의 양가적이고 갈등적인 본능을 인정한다. 그 결과 이 개념은 비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생산의 삶형태적 무의식 ― 과학기술 이면에 흐르는 잉여/초과 에너지의 생리학, 자본주의 축적의 새로운 인지적이고 리비도적인 양식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본능적이고 ‘불합리한’ 힘들 ― 을 드러낸다.’ 자유 소프트웨어, 위키피디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집단지성의 성과는 명백하지만, 동시에 웹 사용자들의 일상적인 ‘자유노동’은 새로운 미디어 기업에 의해 착취당한다. 이러한 집단지성의 양가적 측면들 ― 때로는 새로운 공유지를 구성하면서도 때로는 자본과 공존하는 ― 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인지적 생산의 정치적 공간이 (단순히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경쟁적임을 강조한다. 인지적 생산물은 플로리다가 말하는 ‘창조계급’처럼 ‘아름다운 창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들의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생산이 창조적이고 인지적이 된다면, 또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이 된다면, 무엇이 갈등의 새로운 좌표이며 형태들인가?” 여기서 저자는 비물질 내전이라는 시나리오를 도입한다. 내전이라는 용어를 선택해야 하는 까닭은 “인지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이 명확한 계급의식이나 계급구성을 갖지 않으며 동일한 미디어 공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비물질 내전은 지식공유와 디지털 공유지라는 그 모든 수사修辭에도 불구하고, 인지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갈등들을 나타낸다. …… 비물질 내전은, 디지털에 대한 목가적인 이상향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지식 경제에 대한 손쉬운 찬양에 앞서, 문화 생산 영역이 인정해야 하는 조건이다. …… 비물질 내전에 직면한다는 것은, 집단적인 지식 생산의 어떠한 정치적 조직화도 …… 지식 생산의 어두운 측면들을 인식하고 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 공통적인 것에 대한 오직 강력하고 생산적인 정의만이 이렇게 출현하는 주체성들의 윤곽을 그리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 대의代議에 기초한 정치학을 전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공통적인 자원의 생산에서 재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물질 내전의 거울 속에는 공통적인 것의 기획이 존재한다.

요약해보면 저자가 동물혼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창조적 공유지, 지식공유, 또래공동생산(peer production) 등과 같이 갈등 없고 아름다운 협력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 같은 일들이 실제로는 힘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곳에는 언제나 물질적 기생체들이 살고 있다는 것, 이러한 지식생산의 어두운 측면들을 인식해야 새로운 정치적 조직화가 가능하다는 것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인지적 공유지에 대한 낭만적 상상 ― 여기에서 잉여가치와 착취의 문제는 고결하게 삭제된다 ― 이 아닌 역동적이고 투쟁적인 정의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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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카르타 선언 -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 아우또노미아총서 36
피터 라인보우 지음, 정남영 옮김 / 갈무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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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상품을 구입함으로써 충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 대다수 사람에게 자립의 삶이란 꿈에 가깝다.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몸뚱이뿐. 오직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만 살아가는 삶이 지배적인 형태다. 그것이 99%의 삶이다.

피터 라인보우가 쓴 '마그나카르타 선언'은 왜 이러한 삶이 현대의 지배적 형태가 되었는지, 다른 삶의 방식은 없었는지, 그것에 있어 마그나카르타 선언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피는 책이다.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는 커먼common을 기본형으로 하는 여러 단어다. ‘공통의’, ‘공통적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이 단어들을 역자는 대부분 음역하고 있는데, 그건 역자의 말처럼 “이 단어의 바탕이 되는 ‘공유지’the commons의 삶이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어 그 의미가 준거할 현실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시 대상이 사라졌으니 그것을 가리킬 언어가 마땅치 않은 건 안타깝지만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다시 저자의 질문을 따라가 보자. 왜 우리는 상품에만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가? 저자에 따르면 그건 우리가 공유지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18세기만 해도 잉글랜드의 들판은 대체로 개방되어 있었고 자작농, 아이들, 여성들이 커머닝commoning을 통해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쇠나 플라스틱이 아닌 나무가 물질문화를 구축하던 시대에 숲의 공유지는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었다. 숲은 난방과 조명, 건축자재, 신발, 쟁기손잡이 등 다양한 재료가 될 수 있는 나무를 제공해줌으로써, 자급농업의 토대를 제공해 준 에너지원의 보고이자 “민중의 안전망”이었다. 또한 사유화되지 않은 황지荒地는 사회적 보장으로 기능했다. 황지는 방목권이 없는 사람들을 커머너commoner로 만들었고, 유용한 산물을 주었으며, 다른 커머너들과 교류할 수 있는 수단을 주었다. 즉 황지를 거점으로 한 커머너들의 교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커먼즈가 단지 공유하는 땅, 재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물질적 사물인 동시에 사회적 관계이며, 다른 삶의 방식이었고, 공통적인 것에 대한 공통적인 관리를 뜻한다.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던 이 활동을 뒷받침한 문서가 바로 마그나카르타 선언과 삼림 헌장이다. 1215년 6월 존 왕은 템스 강 옆의 러니미드라 불리는 초원에서 반란을 일으킨 국왕봉신들과 마그나카르타의 63개 조항을 맹세로써 약속하였다. 헌장은 교회, 봉건귀족, 상인, 유대인들의 이익을 보호함과 더불어 커머너를 인정하였다. 공유지를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공유지에서의 삶은 종획enclosure에 의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구의 삼림지대들은 상업적 이익을 위해 파괴되었고, 전 세계의 원주민들-커머너들-이 수탈되었다.

“…… 교활한 유럽인들은 …… 삼림청이라는 거대한 상부구조를 세웠다. 모든 산과 구릉들, 그리고 미개간지와 방목지가 삼림청의 통제하에 두어져서 가난한 농부들의 가축은 땅 위의 어디에도 숨 쉴 곳이 없었다.”

세계의 공유지가 울타리 속으로 가두어진 것이다. “종획은 땅과의 정신적 유대를 파괴했고, 커머너들을 다양한 노동규율에 종속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예비작업을 했다.” 추방된 커머너들은 이제 도시의 공장에서 착취되는 노동하는 신체가 되었다. 이것에 있어 종획에 의한 커머닝의 근절은 절대적인 요소였다. 이와 함께 마그나카르타는 경제적 자립을 보장했던 삼림헌장과 분리되어 오히려 사유재산의 보호와 확대에 바쳐진 지배계급의 우상이 되었다. 저자는 이것이 미국에서 마그나카르타가 차지하는 모순적인 양상이라고 말한다.

마그나카르타가 대부분 정치적, 사법적 권리와 관련되어 있다면, 삼림헌장은 경제적 생존을 다룬다. 그러나 두 헌장이 분리되면서 삼림헌장은 사장되었고, 정치적 권리를 다룬 마그나카르타는 외려 착취를 정당화하는 법적 도구가 되었다. 이렇게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는 현상은 근대 국가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리되는 것과 일치한다. 공적인 것은 국가의 영역이 되었고, 사적 영역은 ‘자유로운 개인’이 경쟁한다는 시장이 되어 자본에 맡겨졌다. 커먼즈의 영역은 사라졌다. “땅은 도둑맞았다.” 이것이 상품 교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이 되기까지의 스토리다. 때문에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삼림헌장이 뒷받침된 마그나카르타이다. “정치적·사법적 권리는 경제적 토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답은 명백하다. 자본주의적 삶이 하늘이 내려준 불변의 법칙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것이 1%의 풍요를 위해 99%의 피와 땀을 요구하는 방식이라면, 커먼즈를, 공통의 부를 다시 구축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축적의 양상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공유지에 대한 수탈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한 산업자본주의가 노동력의 착취를 통해 성장했다면, 지금은 다시 수탈의, 그러나 새로운 수탈의 양상이 나타난다. 비물질 노동이 점점 더 지배적으로 되는 현대 도시에서 과거의 공장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메트로폴리스 전체가 공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젠트리피케이션은 대표적인 자본축적의 장치다).

이제는 삶 자체가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는 사람들의 창조적인 집합적 활동이 수탈되면서 역설적으로 자본축적의 도구가 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창조적인 활동이 차이를 생산할수록, 그 차이는 지대를 생산하고, 그것은 다시 그들을 착취하는 도구가 되었다. 공통적으로 생산되는 부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라는 울타리가 만들어 놓은 회로를 따라 흐른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도시는 새로운 수탈의 장소다. 우리의 숲은 어디에 있는가? 필요한 것은 이 차이가 자본주의적 축적 회로를 벗어나 다른 경로를 따라 흐르게 하는 일이다.

이제 이 도시에 황지는 없다. 울타리가 쳐져 있지 않은 대지는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가 커머너가 된다는 것, 커먼즈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 울타리에 박힌 못을 뽑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헌장이 왕의 영역에 제한을 가하고, 커머너의 영역에 자급적 생계를 제공하였듯이, 현재의 자본주의적 축적 회로를 가로지르고 공통의 것을 공통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을 새로이 발명하는 일이다. 그것은 국가에 의한 관리도, 자본에 의한 착취도 아닌 또 다른 길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공통의 감각을 발달시키고 실험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저자에 따르면 “공통권은 지역의 독특한 생태계 속에 함입되어 있다”. 공통의 감각은 단지 선언됨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우리의 방식은 부단한 실험의 연속일 수밖에 없고, 그 양상은 저마다 독특할지도 모른다. 그 독특함은 자본주의적 축적 회로를 벗어나는 독특함이자, 저마다가 자리한 생태계가 주는 독특함이다. 그러나 그 때의 차이는 지대로 가는 차이가 아닐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차이를 열어주는, 그러면서도 커머너로서 함께하는 삶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실험들이 이미 여러 도시의 광장에서 계속됐음을 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헌장을 써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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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 - 뉴욕, 거리, 지구에 관한 42편의 에세이 아우또노미아총서 40
이와사부로 코소 지음, 서울리다리티 옮김 / 갈무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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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코소의 새 책, <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는 <뉴욕열전>, <유체도시를 구축하라!>에 이은 그의 세 번째 뉴욕/도시론이다. 앞의 두 책이 거리에서 자라나는 다종다양한 활동들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이 책은 그보다는 조금 어두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저자의 말처럼 9.11 이후 강화된 보안체제 하에서 많은 운동들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 -> 애국 -> 테러리즘과의 전쟁’으로 이어진 9.11 이후의 흐름은 분명 미국 사회를 그리고 뉴욕을 국가의 일방적 밀어붙임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더해 2008년의 금융위기는 막대한 손실을 사회화하며, 민중들의 삶을 벼랑 끝까지 몰고갔다. 그럼에도 저자는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의 단면을 본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자본주의적 개발이 역설적으로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궁극적 형태인 ‘세계=지구적 부’와 그것의 공유 이외에는 어떠한 지상가치도 존재할 수 없음을 자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이란 누구에게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비물질적 자원, 지구상의 온갖 활동을 지탱하는 기반을 뜻한다. 때문에 공통적인 것은 삶에 선행하며, 그것의 가능성을 이루는 것이지만 현재의 도시화는 이 기반을 갈취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갈수록 피폐해져가는 민중들의 삶, 환경파괴로 위기에 직면한 지구가 그것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도시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는 저자가 강조하는 지점은 바로 거리의 삶이다. 저자가 계속해서 누각과 거리를 대립시켜 사고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긍정적 사고를 관철하기 위한 지반이다. 자본주의적 도시화가 공통적인 것을 파멸시키는 형태로 진행되어갈 때, 도시공간 내의 다른 힘 즉, 되돌아오는 거리의 힘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갈수록 확장되는 도시화를 단지 묵시록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뉴욕/도시론 삼부작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리의 힘, 즉 그 자체로 공통적인 부commons인 사람들의 집합신체다. 요컨대 운동으로서의 뉴욕에 주목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확장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저자가 세 권의 책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내용일 것이다.

누각과 거리는 어떻게 다른가? 저자가 누각으로 지칭하는 것은 ‘대규모 건물 및 교통기관 등의 상징적/기반적 시설’, 즉 스펙터클로서의 도시이며, 거리는 ‘사람들의 집합성과 관계성이 최대로 활성화된 상황/장소’, 즉 다중들의 삶 그 자체이다. 누각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힘이다. 우리가 뉴욕이란 도시를 생각할 때, 초고층 빌딩과 화려한 광고판 외에 달리 떠오르는 게 없다면, 그건 누각의 힘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거나, 그러한 주체로 계속해서 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9.11 이후 나타난 흐름은 바로 이러한 누각이 도시를 지배해 가는 과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 간에, 인종관계에, 계급 간에, 젠더 간에, 사유재산과 그 밖에 벽을 세우며’, 우리를 포획하는 스펙터클이다. 그 결과, “맨하튼의 다운타운에 남아있는 것은 건축일 뿐 민중들의 사회적 상호관계성의 공간적 생산은 붕괴했다.” 저자가 내리는 이러한 진단은 9.11 이후 뉴욕의 슬픈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저자는 도시의 파국을 예측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뉴욕이 20세기 후반 메트로폴리스의 모델이 된 것은 자본주의와 그로 인한 개발이 엄청나게 집중된 도시 뉴욕에서, 그것에 저항하며 다른 삶의 방식들을 구축해온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상호관계성이 붕괴한 뉴욕은 이제 더 이상 그 모델이 아니다. 적어도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그렇다. 대신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단일한 도시가 아니라 민중의 내부에서 일구어지는 도시네트워크이다. ‘지구상 어디에 있든 우리는 자신들의 장소(도시)와 다른 장소(도시)와의 관계를 살아가고 있다. 도시의 동일성/정체성에 관한 사고는 그 뿌리에서부터의 변환이 필요한 국면에 놓여 있다.’

세계화는 도시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도시든 다른 도시와의 관계 속에서만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본의 측면에서 보면 끝없는 도시 간 경쟁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체로 상품이 된 도시는 집합적 상징자본(하비)을 구축하기 위한 장이 된다. 그것은 지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전통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도시 공간의 상품화라는 회로 속으로 다양한 삶들을 가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역 주민, 예술가들의 다종다양한 활동은 지역을 새롭게 바꾸어놓지만, 그것이 가져온 지대의 상승은 새로운 가치화의 주체였던 이들을 내쫓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이 저자가 죽음의 도시(죽음을 향해 가는 도시)로 가리키는 양상이다.

그러나 관계로서의 도시는 새로운 가능성의 창출을 가져오기도 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스쾃운동은 이에 대한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90년대까지 뉴욕 도시운동을 주도해왔던 스쾃은 이제 종료되었다. 강화된 보안체제와 법규로 인해 이제 스쾃은 생겨나자마자 철거된다. 대신 불법점거squat는 이제 점거행동occupation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환되고 있다. 과거 특정 주체들의 운동이었던 스쾃이 점거행동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양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분산된 운동들이 점거행동을 통해 새로운 연관성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시네트워크란 바로 이러한 운동들 간의 연결이 아닐까? 2011년의 전지구적 투쟁순환은 아마도 지구적 도시네트워크에 대한 근래 가장 적합한 예일 것이다.

누각의 지배로 상징되는 도시화는 민중들의 삶 뿐 아니라 지구라는 공통의 가능성이자 공통의 극한=한계를 위험에 빠트린다. 책에서는 비록 간헐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도시의 생태학’은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생태학이 이야기하는 환경위기란 자연 환경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가따리가 이야기한 ‘자연 환경, 사회 환경, 정신 환경’의 세 영역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생태위기’를 뜻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공통적인 것’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코소는 ‘결정적인 인식론적 태도의 변경’을 주장한다. ‘그것은 인류/세계를 사고할 때, 더 이상 ‘대립/투쟁 모델’에 기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립/투쟁’은 영속하지도 않지만 완전히 ‘통합/해결’되는 일도 결코 없다. 대부분 일정한 강도와 긴장이 유지된다. 또한 다른 차원에서는 언제나 ‘절충/협조/야합’이 진행되고 있다. 요컨대 불가피한 공생 상태가 어떤 토대로서 분명히 개재해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지구라는 ‘공통적인 것’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얽힘 모델’ 즉 ‘절충/협조/야합’을 보다 고도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 이는 ‘공통적인 것’이 가진 숙명적인 선행성을 토대로 하면서, 언제나 도시, 그리고 도시화란 계쟁의 상태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럴 때 중요해지는 것이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자율적인 삶, 활동이다. ‘절충/협조/야합’이란 자본과의 타협 혹은 ‘온건한 탈정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으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서, 제도정치에 기대어서, 새로운 삶을 구축하는 일이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 중요한 것은 얽힘의 장에서 ‘공통적인 것’의 지반을 확장해나가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 ‘얽힘 모델’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바일 것이다.

지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가는 모든 삶, 활동의 기반, 즉 공통적인 것의 극단이다. 도시화가 이런 지구의 대부분을 잠식해 가고 있다는 사실은 메트로폴리스가 폭넓은 의미에서 자연이 되었다는 것을 즉, 삶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도시공간을 통해 ‘공통적인 것’을 둘러싼 투쟁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현대의 투쟁은 바로 ‘공통적인 것의 조직화’와 ‘공통적인 것의 망령’ 간의 대결이다. 신자유주의는 이 망령의 대명사다. ‘유일한 대안’이라는 명목 하에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적 양상들, 즉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 공공적 기반의 해체, 그리고 자본의 도시화로 인한 환경파괴는 우리가 서 있는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때문에 이 도시에서 공통적인 것의 구축의 필요성은 그 어느때보다 절실해지고 있다.

‘누각은 그것이 아무리 강력하게 보일지라도 거리의 부양가족 혹은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것이 기생충인 것은 그들의 부 자체가 거리의 집합신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 아니 그것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파괴적인 속성을 띠고 있다. 우리의 삶이, 지구가 위험해지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때문에 누각에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대항하는 거리의 삶이 필요하며, 이로 인해서만 ‘도시의 생태학’이 가능해 진다. 그것은 벽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활동일 수만은 없다. 새로운 도시는 공통적인 것의 네트워크로서의 도시, 단절과 분리를 극복하는 연결로서의 도시, 그 연결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확장하는 과정으로서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

뉴욕/도시론 삼부작을 통해 잘 드러나지 않는 거리의 삶에 주목하는 저자의 글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죽음을 향해가는 도시’를 이야기하는 이 책조차도 나에겐 그러했다. 그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도시 사이로 되돌아오는 거리를 발견하는 그의 밝은 감각 때문일 것이다. 책의 말미에서 그가 과제로 말하는 또 다른 ‘거리’ 형성의 과정들을 밝히는 것, 그리고 그러한 거리를 구축하는 일은 역시 그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의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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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주의의 폭력 - 부채위기를 넘어 공통으로 아우또노미아총서 41
크리스티안 마라찌 지음, 심성보 옮김 / 갈무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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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것의 전지구적 확산에 따라 새로운 국가들이 계속해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뉴스에 등장하지만, 그 대응방식은 늘 변함이 없다. 신용 긴축과 내핍조치라는 방식은 금융위기라는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처럼 늘 따라왔다. 그러나 그것의 일관된 수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기가 잠재하고 있는 것은 이 전지구적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이 잘못 이루어져왔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금융위기에 앞서 금융화에 대한 분석을 새롭게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 안또니오 네그리, 빠올로 비르노, 프랑코 베라르디 등과 함께 자율주의 핵심 사상가 중 한 명인 크리스티안 마라찌가 쓴 <금융자본주의의 폭력>은 바로 이 금융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시작하는 책이다. 책의 제목 때문에 금융자본주의가 가져온 폭력적 양상만을 이 책이 담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책의 제목보다는 ‘부채위기를 넘어 공통으로’라는 부제를 주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우선 저자의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따라가보자.

저자에 따르면, 금융위기는 늘 있어왔지만 이번 금융위기는 과거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20세기의 전형적인 금융화가 실물 경제와 금융 경제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적 관계를 바탕으로 했다면, 지금의 금융은 경제순환 전체에 걸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융이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과 동질적인 시대를, 그러니까 금융인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하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금융화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금융화 역시 축적의 장애에서 시작한다. 포드주의 생산양식은 1970년대 성장 위기를 맞이하여,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주주 관리자 자본주의’로 이행한다. “달리 말해, 경제의 금융화란 이윤폭이 감소한 이후, 자본이 이윤율을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자본이 직접적인 생산과정 외부에서 이윤율을 증대하는 장치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외부에서 이윤율을 증대하는 장치’라는 표현이다. 이 ‘외부’는 어디인가? 이 외부는 전통적인 방식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영역, 즉 공장을 넘어선 영역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삶의 영역 말이다. ‘지난 삼십년 동안 잉여가치 자체를 생산하는 과정이 사실상 변했다. 가치추출은 더 이상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장소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공장 문을 넘어 확장된다. 가치추출이 자본의 유통영역에 직접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치추출 과정이 재생산과 분배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삶의 영역에서 이윤율을 증대한다는 것은 금융자본주의 시대에서 생산과정이란 공장을 넘어 도시 전체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사회적 공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저자는 이러한 국면을 생명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금융화는 생명자본주의에서 전형화되는 가치생산의 외부, 그것의 이면이다.”

가치생산의 외부화, 즉 생산과정이 공장을 넘어 확장되는 과정에서, 이윤추출의 방식 또한 변화한다. 저자는 까를로 베르첼로네의 표현을 빌어, 이를 ‘이윤의 지대되기’ 과정으로 표현한다. 베르첼로네는 다른 글에서, “자본주의의 현재 전환은 임금, 지대, 이윤 간 관계의 완전한 변화와 병행하는 지대의 완전히 성장한 회귀와 확산”이라는 특징을 지닌다고 쓴 바 있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지대란 전-자본주의적 유산이며, 자본 축적의 진보적 운동에 대한 장애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점점 산업 자본주의 그 자체가 지대로 향하는 명백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에 따라 이 지대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생성을 나타낸다. 지식노동, 정동노동의 확산과 함께 가치-노동 시간 법칙이 위기에 빠짐에 따라 노동의 협력이 자본의 관리 기능에 점점 자율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노동의 협력이 공장 외부로, 자율적으로 됨에 따라 이윤의 착취는 명령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지대라는 장치이다. 이 지대는 노동 아니 차라리 삶의 행위들이라고 해도 좋을, 사람들의 사회적 협력과정으로부터 지대라는 형식을 통해 이윤을 추출한다. 생명자본주의 시대에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저자가 언급하는 ‘구글 모델’은 이에 대한 두드러진 예일 것이다(구글의 ‘애드센스’와 ‘애드워즈’가 작동하는 방식을 생각해보라).

이 지대는 모두의 삶에 필요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수탈 장치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17세기에 진행된 인클로저가 공유지를 사유화하면서 농민들의 삶을 근대 노동자의 그것으로 바꾸어버렸듯이, 금융 자본주의 역시 사회적 필요에 사적 소유를 대립시킨다. 저자가 예로드는 것은 2+28이라는 모기지 계약 방식이다. ‘모기지 이자는 처음 2년 동안은 낮게 유지되어 사람들을 끌어모은다음, 나머지 28년 동안은 변동금리에 따라 결정되어 통화정책과 경제 국면의 일반적 경향에 종속된다. 즉 2년 동안은 제한적인 사용가치의 통제구조(즉, 주택이용권)를 누리지만, 나머지 28년 동안은 추방/배제라는 극단적인 폭력적 효과를 수반하는 금융시장에 의한 교환가치 통제구조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금융 논리는 주택이용권과 같은 공통적인 것을 생산한 다음 이를 곧바로 분할하여 사유화한다.’ 이 폭력적인 사유화의 폐해는 익히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주택을 압류당하고 쫓겨난 사람들, 공통재에서 쫓겨나 벌거벗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다면 탈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하트와 네그리는 <선언>에서 ‘빚진 사람들’을 현대의 사회정치적 위기가 낳은 주체성의 형식 중 하나로 기술한다. 사람들이 빚을 지는 것은 금융의 수익성 논리에 따라 임금이 삭감되거나 아예 일자리를 잃고, 신자유주의적 전환과 함께 복지서비스가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녀교육을 위해, 실내에서 자기 위해-그러니까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병원에 가기 위해 사람들은 빚을 질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사회국가의 재분배 기능은, 축소됨과 동시에 케인스주의식 적자 지출의 민영화를 통해 강화된다. 다시 말해, 추가 수요는 민간 부채를 통해 창출된다.’ 공통재에 대한 접근이 사적부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채를 통한 수요 창출-특히 주택지분가치추출-은 미국의 경제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미상무부경제분석국은 주택지분가치추출의 증가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GDP가 평균 1.5퍼센트 성장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이 주택지분가치추출은 끊임없이 부동산 가격이 상승해야 가능한 일이다. 앞선 사람들의 수익은 끊임없이 참여하는 이후의 투기행렬에 의해서만 보장된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폰지사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 누군가 꿈에서 깨어나면 거품이 터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오는 피해는 금융화의 논리가 삶의 영역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만큼, 사람들의 삶에 파국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제 다시 앞의 문제로 돌아왔다. 공통재에 대한 울타리치기, 사회적 필요에 대한 폭력적인 사적 소유의 논리라는 문제 말이다.

경제를 탈금융화하면, 그러니까 다시 산업화로 돌아가면 괜찮은 것일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재산업화는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주장되었다. 이는 선량한 실물 경제와 사악한 금융 경제라는 적대의 논리에 기초해 있다. 이에 대한 저자의 답은 재산업화는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실물 경제와 금융 경제의 경계가 사실상 붕괴하는 상황에서, 과거로 회귀하는 방식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방식은 실물 경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금융화의 논리를, 그러니까 사적부채가 부과하는 억압을 그대로 뒤집는 것이다. 여기에 이 책의 특별함이 있다. 저자는 주택소유자지원대책을 논의하면서 방만한 대출의 함정에 빠진 주택소유자를 구제할 때 필요한 원칙을 제시한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가져오면,

이 조치[주택소유자 구제조치]는 적어도 맹아적으로 공통재에 관한 사회적 소유권 문제를 제기한다. 분명히, 이러한 권리는 오늘날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 즉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고 있다. 달리 말해, 오늘날까지 공통재에 관한 접근권이 사적 부채 형태를 취했다면, 당연히 이제부터는 그러한 접근권을 일종의 사회적 지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니까 사적 부채를 사회적 지대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서브프라임 위기는 은행의 채무를 공공채무로 전환시켰다. ‘어지러울 정도로 치솟은 공공채무는 납세자의 돈으로 쌓아올린 금융자본의 사회화 때문’이다. 이를 저자는 자본의 코뮤니즘으로 칭한다. ‘여기서 국가 즉 전 국민은 금융 소비에트의 필요에 봉사한다. 은행, 보험회사, 헤지펀드의 욕구에 복무하는 것이다.’ 사적 부채의 사회적 지대로의 전환은 금융 소비에트가 아니라 다중의 삶의 필요에 봉사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손실은 사회화하고 이익은 사유화하는 금융의 논리를 다른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당하게 주장될 수 있는 이유는 공통재에 대한 접근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통의 부를 창출하는 것은 헤지펀드가 아니라 다중의 사회적 협력과정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통재에 대한 유일한 접근 장치가 되어버린 부채를 권리로 전환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낯설지 몰라도 지대의 사회적 전유라는 맥락에서 타당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은행의 채무를 다중의 빚으로 전환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19세기 금융가 페레르를 ‘사기꾼과 예언가가 성공적으로 뒤섞인 캐릭터’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신용체계가 가진 이중적인 성격을 묘사하기 위함이었다. 신용체계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투기적 형식의 정점을 이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산 양식을 향한 전환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사적 부채의 사회적 지대로의 전환 역시 그러한 것이 아닐까. 금융화가 새로운 자본축적의 양식이 된 시대에서는 말이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새로운 공통의 통치 방식”이란 아마도 금융의 논리로부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뒤집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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