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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 - 뉴욕, 거리, 지구에 관한 42편의 에세이 아우또노미아총서 40
이와사부로 코소 지음, 서울리다리티 옮김 / 갈무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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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코소의 새 책, <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는 <뉴욕열전>, <유체도시를 구축하라!>에 이은 그의 세 번째 뉴욕/도시론이다. 앞의 두 책이 거리에서 자라나는 다종다양한 활동들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이 책은 그보다는 조금 어두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저자의 말처럼 9.11 이후 강화된 보안체제 하에서 많은 운동들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 -> 애국 -> 테러리즘과의 전쟁’으로 이어진 9.11 이후의 흐름은 분명 미국 사회를 그리고 뉴욕을 국가의 일방적 밀어붙임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더해 2008년의 금융위기는 막대한 손실을 사회화하며, 민중들의 삶을 벼랑 끝까지 몰고갔다. 그럼에도 저자는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의 단면을 본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자본주의적 개발이 역설적으로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궁극적 형태인 ‘세계=지구적 부’와 그것의 공유 이외에는 어떠한 지상가치도 존재할 수 없음을 자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이란 누구에게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비물질적 자원, 지구상의 온갖 활동을 지탱하는 기반을 뜻한다. 때문에 공통적인 것은 삶에 선행하며, 그것의 가능성을 이루는 것이지만 현재의 도시화는 이 기반을 갈취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갈수록 피폐해져가는 민중들의 삶, 환경파괴로 위기에 직면한 지구가 그것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도시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는 저자가 강조하는 지점은 바로 거리의 삶이다. 저자가 계속해서 누각과 거리를 대립시켜 사고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긍정적 사고를 관철하기 위한 지반이다. 자본주의적 도시화가 공통적인 것을 파멸시키는 형태로 진행되어갈 때, 도시공간 내의 다른 힘 즉, 되돌아오는 거리의 힘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갈수록 확장되는 도시화를 단지 묵시록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뉴욕/도시론 삼부작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리의 힘, 즉 그 자체로 공통적인 부commons인 사람들의 집합신체다. 요컨대 운동으로서의 뉴욕에 주목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확장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저자가 세 권의 책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내용일 것이다.

누각과 거리는 어떻게 다른가? 저자가 누각으로 지칭하는 것은 ‘대규모 건물 및 교통기관 등의 상징적/기반적 시설’, 즉 스펙터클로서의 도시이며, 거리는 ‘사람들의 집합성과 관계성이 최대로 활성화된 상황/장소’, 즉 다중들의 삶 그 자체이다. 누각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힘이다. 우리가 뉴욕이란 도시를 생각할 때, 초고층 빌딩과 화려한 광고판 외에 달리 떠오르는 게 없다면, 그건 누각의 힘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거나, 그러한 주체로 계속해서 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9.11 이후 나타난 흐름은 바로 이러한 누각이 도시를 지배해 가는 과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 간에, 인종관계에, 계급 간에, 젠더 간에, 사유재산과 그 밖에 벽을 세우며’, 우리를 포획하는 스펙터클이다. 그 결과, “맨하튼의 다운타운에 남아있는 것은 건축일 뿐 민중들의 사회적 상호관계성의 공간적 생산은 붕괴했다.” 저자가 내리는 이러한 진단은 9.11 이후 뉴욕의 슬픈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저자는 도시의 파국을 예측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뉴욕이 20세기 후반 메트로폴리스의 모델이 된 것은 자본주의와 그로 인한 개발이 엄청나게 집중된 도시 뉴욕에서, 그것에 저항하며 다른 삶의 방식들을 구축해온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상호관계성이 붕괴한 뉴욕은 이제 더 이상 그 모델이 아니다. 적어도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그렇다. 대신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단일한 도시가 아니라 민중의 내부에서 일구어지는 도시네트워크이다. ‘지구상 어디에 있든 우리는 자신들의 장소(도시)와 다른 장소(도시)와의 관계를 살아가고 있다. 도시의 동일성/정체성에 관한 사고는 그 뿌리에서부터의 변환이 필요한 국면에 놓여 있다.’

세계화는 도시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도시든 다른 도시와의 관계 속에서만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본의 측면에서 보면 끝없는 도시 간 경쟁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체로 상품이 된 도시는 집합적 상징자본(하비)을 구축하기 위한 장이 된다. 그것은 지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전통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도시 공간의 상품화라는 회로 속으로 다양한 삶들을 가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역 주민, 예술가들의 다종다양한 활동은 지역을 새롭게 바꾸어놓지만, 그것이 가져온 지대의 상승은 새로운 가치화의 주체였던 이들을 내쫓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이 저자가 죽음의 도시(죽음을 향해 가는 도시)로 가리키는 양상이다.

그러나 관계로서의 도시는 새로운 가능성의 창출을 가져오기도 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스쾃운동은 이에 대한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90년대까지 뉴욕 도시운동을 주도해왔던 스쾃은 이제 종료되었다. 강화된 보안체제와 법규로 인해 이제 스쾃은 생겨나자마자 철거된다. 대신 불법점거squat는 이제 점거행동occupation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환되고 있다. 과거 특정 주체들의 운동이었던 스쾃이 점거행동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양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분산된 운동들이 점거행동을 통해 새로운 연관성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시네트워크란 바로 이러한 운동들 간의 연결이 아닐까? 2011년의 전지구적 투쟁순환은 아마도 지구적 도시네트워크에 대한 근래 가장 적합한 예일 것이다.

누각의 지배로 상징되는 도시화는 민중들의 삶 뿐 아니라 지구라는 공통의 가능성이자 공통의 극한=한계를 위험에 빠트린다. 책에서는 비록 간헐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도시의 생태학’은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생태학이 이야기하는 환경위기란 자연 환경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가따리가 이야기한 ‘자연 환경, 사회 환경, 정신 환경’의 세 영역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생태위기’를 뜻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공통적인 것’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코소는 ‘결정적인 인식론적 태도의 변경’을 주장한다. ‘그것은 인류/세계를 사고할 때, 더 이상 ‘대립/투쟁 모델’에 기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립/투쟁’은 영속하지도 않지만 완전히 ‘통합/해결’되는 일도 결코 없다. 대부분 일정한 강도와 긴장이 유지된다. 또한 다른 차원에서는 언제나 ‘절충/협조/야합’이 진행되고 있다. 요컨대 불가피한 공생 상태가 어떤 토대로서 분명히 개재해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지구라는 ‘공통적인 것’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얽힘 모델’ 즉 ‘절충/협조/야합’을 보다 고도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 이는 ‘공통적인 것’이 가진 숙명적인 선행성을 토대로 하면서, 언제나 도시, 그리고 도시화란 계쟁의 상태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럴 때 중요해지는 것이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자율적인 삶, 활동이다. ‘절충/협조/야합’이란 자본과의 타협 혹은 ‘온건한 탈정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으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서, 제도정치에 기대어서, 새로운 삶을 구축하는 일이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 중요한 것은 얽힘의 장에서 ‘공통적인 것’의 지반을 확장해나가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 ‘얽힘 모델’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바일 것이다.

지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가는 모든 삶, 활동의 기반, 즉 공통적인 것의 극단이다. 도시화가 이런 지구의 대부분을 잠식해 가고 있다는 사실은 메트로폴리스가 폭넓은 의미에서 자연이 되었다는 것을 즉, 삶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도시공간을 통해 ‘공통적인 것’을 둘러싼 투쟁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현대의 투쟁은 바로 ‘공통적인 것의 조직화’와 ‘공통적인 것의 망령’ 간의 대결이다. 신자유주의는 이 망령의 대명사다. ‘유일한 대안’이라는 명목 하에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적 양상들, 즉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 공공적 기반의 해체, 그리고 자본의 도시화로 인한 환경파괴는 우리가 서 있는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때문에 이 도시에서 공통적인 것의 구축의 필요성은 그 어느때보다 절실해지고 있다.

‘누각은 그것이 아무리 강력하게 보일지라도 거리의 부양가족 혹은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것이 기생충인 것은 그들의 부 자체가 거리의 집합신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 아니 그것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파괴적인 속성을 띠고 있다. 우리의 삶이, 지구가 위험해지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때문에 누각에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대항하는 거리의 삶이 필요하며, 이로 인해서만 ‘도시의 생태학’이 가능해 진다. 그것은 벽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활동일 수만은 없다. 새로운 도시는 공통적인 것의 네트워크로서의 도시, 단절과 분리를 극복하는 연결로서의 도시, 그 연결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확장하는 과정으로서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

뉴욕/도시론 삼부작을 통해 잘 드러나지 않는 거리의 삶에 주목하는 저자의 글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죽음을 향해가는 도시’를 이야기하는 이 책조차도 나에겐 그러했다. 그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도시 사이로 되돌아오는 거리를 발견하는 그의 밝은 감각 때문일 것이다. 책의 말미에서 그가 과제로 말하는 또 다른 ‘거리’ 형성의 과정들을 밝히는 것, 그리고 그러한 거리를 구축하는 일은 역시 그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의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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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주의의 폭력 - 부채위기를 넘어 공통으로 아우또노미아총서 41
크리스티안 마라찌 지음, 심성보 옮김 / 갈무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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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것의 전지구적 확산에 따라 새로운 국가들이 계속해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뉴스에 등장하지만, 그 대응방식은 늘 변함이 없다. 신용 긴축과 내핍조치라는 방식은 금융위기라는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처럼 늘 따라왔다. 그러나 그것의 일관된 수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기가 잠재하고 있는 것은 이 전지구적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이 잘못 이루어져왔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금융위기에 앞서 금융화에 대한 분석을 새롭게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 안또니오 네그리, 빠올로 비르노, 프랑코 베라르디 등과 함께 자율주의 핵심 사상가 중 한 명인 크리스티안 마라찌가 쓴 <금융자본주의의 폭력>은 바로 이 금융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시작하는 책이다. 책의 제목 때문에 금융자본주의가 가져온 폭력적 양상만을 이 책이 담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책의 제목보다는 ‘부채위기를 넘어 공통으로’라는 부제를 주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우선 저자의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따라가보자.

저자에 따르면, 금융위기는 늘 있어왔지만 이번 금융위기는 과거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20세기의 전형적인 금융화가 실물 경제와 금융 경제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적 관계를 바탕으로 했다면, 지금의 금융은 경제순환 전체에 걸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융이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과 동질적인 시대를, 그러니까 금융인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하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금융화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금융화 역시 축적의 장애에서 시작한다. 포드주의 생산양식은 1970년대 성장 위기를 맞이하여,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주주 관리자 자본주의’로 이행한다. “달리 말해, 경제의 금융화란 이윤폭이 감소한 이후, 자본이 이윤율을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자본이 직접적인 생산과정 외부에서 이윤율을 증대하는 장치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외부에서 이윤율을 증대하는 장치’라는 표현이다. 이 ‘외부’는 어디인가? 이 외부는 전통적인 방식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영역, 즉 공장을 넘어선 영역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삶의 영역 말이다. ‘지난 삼십년 동안 잉여가치 자체를 생산하는 과정이 사실상 변했다. 가치추출은 더 이상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장소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공장 문을 넘어 확장된다. 가치추출이 자본의 유통영역에 직접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치추출 과정이 재생산과 분배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삶의 영역에서 이윤율을 증대한다는 것은 금융자본주의 시대에서 생산과정이란 공장을 넘어 도시 전체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사회적 공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저자는 이러한 국면을 생명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금융화는 생명자본주의에서 전형화되는 가치생산의 외부, 그것의 이면이다.”

가치생산의 외부화, 즉 생산과정이 공장을 넘어 확장되는 과정에서, 이윤추출의 방식 또한 변화한다. 저자는 까를로 베르첼로네의 표현을 빌어, 이를 ‘이윤의 지대되기’ 과정으로 표현한다. 베르첼로네는 다른 글에서, “자본주의의 현재 전환은 임금, 지대, 이윤 간 관계의 완전한 변화와 병행하는 지대의 완전히 성장한 회귀와 확산”이라는 특징을 지닌다고 쓴 바 있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지대란 전-자본주의적 유산이며, 자본 축적의 진보적 운동에 대한 장애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점점 산업 자본주의 그 자체가 지대로 향하는 명백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에 따라 이 지대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생성을 나타낸다. 지식노동, 정동노동의 확산과 함께 가치-노동 시간 법칙이 위기에 빠짐에 따라 노동의 협력이 자본의 관리 기능에 점점 자율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노동의 협력이 공장 외부로, 자율적으로 됨에 따라 이윤의 착취는 명령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지대라는 장치이다. 이 지대는 노동 아니 차라리 삶의 행위들이라고 해도 좋을, 사람들의 사회적 협력과정으로부터 지대라는 형식을 통해 이윤을 추출한다. 생명자본주의 시대에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저자가 언급하는 ‘구글 모델’은 이에 대한 두드러진 예일 것이다(구글의 ‘애드센스’와 ‘애드워즈’가 작동하는 방식을 생각해보라).

이 지대는 모두의 삶에 필요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수탈 장치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17세기에 진행된 인클로저가 공유지를 사유화하면서 농민들의 삶을 근대 노동자의 그것으로 바꾸어버렸듯이, 금융 자본주의 역시 사회적 필요에 사적 소유를 대립시킨다. 저자가 예로드는 것은 2+28이라는 모기지 계약 방식이다. ‘모기지 이자는 처음 2년 동안은 낮게 유지되어 사람들을 끌어모은다음, 나머지 28년 동안은 변동금리에 따라 결정되어 통화정책과 경제 국면의 일반적 경향에 종속된다. 즉 2년 동안은 제한적인 사용가치의 통제구조(즉, 주택이용권)를 누리지만, 나머지 28년 동안은 추방/배제라는 극단적인 폭력적 효과를 수반하는 금융시장에 의한 교환가치 통제구조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금융 논리는 주택이용권과 같은 공통적인 것을 생산한 다음 이를 곧바로 분할하여 사유화한다.’ 이 폭력적인 사유화의 폐해는 익히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주택을 압류당하고 쫓겨난 사람들, 공통재에서 쫓겨나 벌거벗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다면 탈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하트와 네그리는 <선언>에서 ‘빚진 사람들’을 현대의 사회정치적 위기가 낳은 주체성의 형식 중 하나로 기술한다. 사람들이 빚을 지는 것은 금융의 수익성 논리에 따라 임금이 삭감되거나 아예 일자리를 잃고, 신자유주의적 전환과 함께 복지서비스가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녀교육을 위해, 실내에서 자기 위해-그러니까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병원에 가기 위해 사람들은 빚을 질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사회국가의 재분배 기능은, 축소됨과 동시에 케인스주의식 적자 지출의 민영화를 통해 강화된다. 다시 말해, 추가 수요는 민간 부채를 통해 창출된다.’ 공통재에 대한 접근이 사적부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채를 통한 수요 창출-특히 주택지분가치추출-은 미국의 경제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미상무부경제분석국은 주택지분가치추출의 증가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GDP가 평균 1.5퍼센트 성장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이 주택지분가치추출은 끊임없이 부동산 가격이 상승해야 가능한 일이다. 앞선 사람들의 수익은 끊임없이 참여하는 이후의 투기행렬에 의해서만 보장된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폰지사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 누군가 꿈에서 깨어나면 거품이 터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오는 피해는 금융화의 논리가 삶의 영역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만큼, 사람들의 삶에 파국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제 다시 앞의 문제로 돌아왔다. 공통재에 대한 울타리치기, 사회적 필요에 대한 폭력적인 사적 소유의 논리라는 문제 말이다.

경제를 탈금융화하면, 그러니까 다시 산업화로 돌아가면 괜찮은 것일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재산업화는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주장되었다. 이는 선량한 실물 경제와 사악한 금융 경제라는 적대의 논리에 기초해 있다. 이에 대한 저자의 답은 재산업화는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실물 경제와 금융 경제의 경계가 사실상 붕괴하는 상황에서, 과거로 회귀하는 방식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방식은 실물 경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금융화의 논리를, 그러니까 사적부채가 부과하는 억압을 그대로 뒤집는 것이다. 여기에 이 책의 특별함이 있다. 저자는 주택소유자지원대책을 논의하면서 방만한 대출의 함정에 빠진 주택소유자를 구제할 때 필요한 원칙을 제시한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가져오면,

이 조치[주택소유자 구제조치]는 적어도 맹아적으로 공통재에 관한 사회적 소유권 문제를 제기한다. 분명히, 이러한 권리는 오늘날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 즉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고 있다. 달리 말해, 오늘날까지 공통재에 관한 접근권이 사적 부채 형태를 취했다면, 당연히 이제부터는 그러한 접근권을 일종의 사회적 지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니까 사적 부채를 사회적 지대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서브프라임 위기는 은행의 채무를 공공채무로 전환시켰다. ‘어지러울 정도로 치솟은 공공채무는 납세자의 돈으로 쌓아올린 금융자본의 사회화 때문’이다. 이를 저자는 자본의 코뮤니즘으로 칭한다. ‘여기서 국가 즉 전 국민은 금융 소비에트의 필요에 봉사한다. 은행, 보험회사, 헤지펀드의 욕구에 복무하는 것이다.’ 사적 부채의 사회적 지대로의 전환은 금융 소비에트가 아니라 다중의 삶의 필요에 봉사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손실은 사회화하고 이익은 사유화하는 금융의 논리를 다른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당하게 주장될 수 있는 이유는 공통재에 대한 접근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통의 부를 창출하는 것은 헤지펀드가 아니라 다중의 사회적 협력과정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통재에 대한 유일한 접근 장치가 되어버린 부채를 권리로 전환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낯설지 몰라도 지대의 사회적 전유라는 맥락에서 타당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은행의 채무를 다중의 빚으로 전환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19세기 금융가 페레르를 ‘사기꾼과 예언가가 성공적으로 뒤섞인 캐릭터’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신용체계가 가진 이중적인 성격을 묘사하기 위함이었다. 신용체계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투기적 형식의 정점을 이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산 양식을 향한 전환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사적 부채의 사회적 지대로의 전환 역시 그러한 것이 아닐까. 금융화가 새로운 자본축적의 양식이 된 시대에서는 말이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새로운 공통의 통치 방식”이란 아마도 금융의 논리로부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뒤집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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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분석 - 공간, 시간, 그리고 도시의 일상생활 카이로스총서 25
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 갈무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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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읽는다는 표현에 우리는 이제 어느정도 익숙한 것 같다. 여전히 그게 뭔지는 잘 모른다 해도 ‘도시 읽기’라는 말이 들어간 책도 꽤 나온 만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인 건 분명하다. 그럼 도시 듣기는 어떨까? 리듬이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은 어쩌면 도시를 듣기위한 책이다. ‘리듬분석가는 세계를 듣는다. 특히 사람들이 ‘웅성거림’이라고 치부하는, 그러나 의미들로 가득한 것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는 침묵을 듣는다.’ 그러면 왜 읽는 것도, 보는 것도 아닌 듣기인가?

   페터 회의 소설, <콰이어트 걸>에는 특별한 청각 능력을 지닌 주인공 카스퍼가 등장한다. 그는 상대방이 내는 소리의 빠르기, 높낮이 등으로 그 사람을 파악할 뿐 아니라 도시의 다양한 소리를 들으며 각각의 장소를 다르게 이해한다. 리듬분석이 단지 뛰어난 청각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카스퍼와 리듬분석가는 ‘볼 수 없는 것’을 듣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볼 수 없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건 우리가 죽은 사람을 볼 때, 그 위에 떠 있는 ‘죽음’이라는 사건과 같은 것이다. 페르파르트는 ‘볼 수 없는 것의 생태학’이란 글에서, 오늘날 서서히 ‘볼 수 없는 것’이 사라져 가는 듯한 새로운 정치 사회적 형태가 출현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지의 전적인 가시성 체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시성 체제를 르페브르는 현전과 현재의 구별로 이야기한다. 현재의 가시성들이 마치 현전하는듯 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마주리imagerie[사진, 영상 등]는 일상을 생산하고 주입하고 수용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 이마주리는 사진이 찍힌 인물에 접근하듯이 실재와 현전성에 접근한다. 그러나 겉모습은 닮았을지 모르나 깊이도, 두께도, 살도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스펙타클은 TV 화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르페브르는 정원을 예로 든다. 나무가 있고, 풀과 벌레가 있다. 이러한 정원은 항속성과 공간적 동시성 속에서 공존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동시성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표면을 뚫고 그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보라. …… 그저 바라보기만 하지 말고 주의를 기울여 들어보라. 각각의 풀과 나무들이 저마다 복수의 리듬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즉 “이 정원과 ‘대상들’을 다리듬적으로 보게될 것이다.” 이 ‘대상’은 정지된 ‘사물’이 아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본다.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죽음’이란 사건을 떠올린다. 이 사건은 시공간 속에서 어떤 리듬을 가진 움직임이다. 그 리듬을 따라가는 우리는 이 죽음이라는 사건과 연결된 전쟁, 질병, 사고 등과 같은 더 큰 사건으로, 사건의 무대로 연결된다. 때문에 부동의 상태에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자신의 리듬을 갖고 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태로 존재한다. 정지된 ‘사물’을 뚫고, 이 ‘볼 수 없는 것’을 듣는 것, 아마도 이것이 리듬분석이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면 ‘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어떤 카메라, 어떤 이미지 혹은 이미지의 연쇄도 이 리듬을 보여줄 수 없다.” 르페브르는 ‘인간은 세계의 척도’라는 말을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우리의 구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 구성은 칸트 식의 선험적인 범주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 우리가 소유한 도구들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펼쳐진 세계는 우리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르페브르는 ‘몸’을 리듬분석의 기준으로 삼는다. 리듬분석가는 자신의 몸을 통해 리듬을 배운 후에 외부의 리듬을 파악한다. “그의 몸은 메트로놈 구실을 한다.”

   몸이 분석의 기준이라면, 그것은 구성의 출발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르페브르에게 리듬분석은 그가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왔던 일상생활에 대한 연구의 일환이다. 이 일상은 시계를 통해 양화된 시간(선형적인 시간)과 생체적 리듬(우주적, 순환적 시간)의 상호작용 속에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산업생산의 노동이 지배적이 된 시대에서는 시계시간이 우위를 점하지만, 그것에 대한 투쟁 또한 첨예해진다. 그러면 다른 시간은 없는가? ‘전유된 시간’은 르페브르가 ‘당분간’이란 단서를 달긴 하지만 어쨌든 고유의 성격을 가진 시간이다. 이 시간은 어떤 활동이 우리에게 충만함을 가져다줄 때 도래하는 시간이다. 이 활동은 “자신 그리고 세계와 일치를 이루며, 외부에서 부과된 강요나 의무가 아닌 자기 창조, 재능의 일면을 포함한다.” 즉 시간을 전유하는 것은 자기준거에 기반한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세계의 구성이 우리의 감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니까 어쩌면 ‘볼 수 없는 것’을, 사건의 리듬을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닌지도 모른다. 앞에서 언급한 페르파르트는 ‘볼 수 없는 것’의 영역이야말로 본질적인 것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영역이 다양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으며, 특이화 과정이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볼 수 없는’ 영역에 있는 리듬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외부에서 부과된 강요나 의무가 아닌” 특이성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 말이다. 그것이 ‘전유된 시간’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그런데 르페브르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리듬은 실체도 물질도 사물도 아니며, 어떤 요소들 간의 관계도 아니기 때문이다. 리듬이라는 개념은 ‘실체적인 것-관계적인 것’의 측면을 모두 갖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 이상의 무언가를 내포한다. 이 무언가를 위해 르페브르는 에너지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이 에너지 또한 어떤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리듬은 시간-공간-에너지를 연결하는 고리이며, 리듬을 만든다는 것은 시간-공간-에너지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 된다.

   우리가 도시의 리듬을 듣는 일을 단지 음악 감상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리듬을 파악하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새로운 리듬을 형성하는 것이, 시간을, 공간을, 전유하는 에너지가 ‘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사건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사유는 그것이 실천 속에 진입하는 순간 완성된다. 즉, 사용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떠오른 장면은 이런 것이다. 한 해변가의 휴양지 마을에 있을 때, 갑자기 동네 전체가 정전이 된 적이 있었다. 화창한 낮이어서 앉아서 커피 마시고 노닥거리는 일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는데, 달라진 것은 소리였다. 크지 않은 마을 전체가 정전이 되자,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갑자기 찾아온 정적이 더 인상적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전기를 통해서 나오는 소리가 사라지자 주위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고, 하늘과 바다가, 바람과 숲이, 새와 고양이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때 그 소리들은 마치 새로운 힘처럼 느껴졌고,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자, 그 공간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변해버렸다. 익숙한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말이다. 물론 전기는 곧 다시 들어왔고, 다시 동네는 예전으로 돌아갔지만, 그 느낌은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새로운 리듬이었을까? 어쨌든 익숙했던 그곳에 알지못했던 다른 지평의 무언가가 있었던 건 분명하다.

   우리가 도시를 들어야 하는 건, 그것의 리듬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그건 우리가 가시성의 체계에 함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리듬이 분명히 어딘가에서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가 발견해야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이 되어야 하는 문제, 즉 발명의 문제이다. 그때 우리는 리듬분석이라는 르페브르의 개념을 새로운 리듬의 구성으로 다르게 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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