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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jin's Book Story

1. 낮은 해상도로부터(서이제. 문학동네. 2023. 376쪽)

: 단편집. 조금은 싱겁다고 할까. 약간은 유치한 작품도 있었지만 내용이나 필력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단편 속에서 화자가 계속 바뀌는 건 처음 한두 번이라면 새롭고 흥미로웠겠지만 단편집 전체에서 반복되다보니 너무 피곤했다. 



2. 랩 걸(호프 자런, 김희정 역. 알마. 2017. 412쪽)

: 도서관에서 이제야 내게 차례가 돌아왔다.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역시 저자의 입심이 대단하다. 저자의 소설을 먼저 읽어서 잘 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설보다 이 책이 훨씬 재밌었다. 과학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에 대한 편견과 평가 절하로 인한 부당한 대우를 고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사실 이런 내용만 가득할까봐 걱정스럽기도 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걸 굳이 되풀이해가며 읽기에는 당시의 내가 많이 지쳐 있었어서). 저자 자신이 가진 과학에 대한 열망과 헌신, 좋은 파트너를 만난 행운과 가진 것 없이 맨땅에 머리 부딪치면서도 과학을 할 수 있기에 누린 행복이 가득하다. 나무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이 많지는 않지만 나올 때마다 저자가 얼마나 그 얘기를 쓰면서 재밌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에서 저자 인생의 전반에 걸쳐 거의 다 털어놓아서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에세이 한 권 더 내줬으면 좋겠다. 



3. 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민지형. 안전가옥. 2023. 312쪽)

: 부잣집 입주 가사도우미 재이. 이 바닥에서 일할만큼 일해서 눈치가 빤하다. 지금 일하는 이 집은 사모는 매일 운동을 다니고 사장은 최근 IT 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호라이즌 사의 전 이사로 늘 유유자적이다. 어느날 사장이 호라이즌 사의 최신형 기기인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들여온다. 일정 시간에 걸쳐 자신의 뇌를 스캔해서 기억을 업로드한 후 그 기억으로 들어가 다시 체험을 할 수 있는 기계. 사장이 며칠간 골프 여행을 떠나자 재이는 호기심에 사장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보는데, 부인과의 아름다운 첫만남과 침대에서의 기억이 있다. 사장이 여행하는 동안, 그간 엄격한 자기 관리의 모습을 보였던 사모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사장의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사용해 보더니 사장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 갑자기 사장을 부엌칼로 난도질하고 자살한다. 재이는 충동적으로 사장의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챙겨 그 집을 나오고, 호라이즌 사의 이사인 리사가 접촉해 온다.


기억은 주관적이다. 기억은, 무엇도 증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하는 점은 기억의 주관성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자신의 상황과 위치와 해석에 따라 아름답게도 또 비참하게도 남는 기억. 그 기억을 영상으로 만들어 공유하고 사고파는 근미래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다. 기억은 미화되거나 왜곡될 수 있지만 그걸 공유하고 매매하는 인간들은 그런 점은 간과한다. 그 어떤 행복한 기억도 이면은 다를 수 있음을. 그래도 이 소설 속 많은 끔찍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비록 소설 속일지라도 사회가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졌다는게, 쓰레기를 그래도 치웠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작가는 아마도 사람들에게서 작으나마 선함을 보았나 보다. 그게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4.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애슐리 엘스턴,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25. 440쪽)

: 에비는 남자친구 라이언의 같이 살자는 말에 행복과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라이언은 이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고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자기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완벽한 남자다. 비록 가난한 에비를 의심하는 라이언의 오랜 친구들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지만 에비는 이제 라이언의 제안을 수락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비가 살고 있다고 라이언이 알고 있는 집을 세팅해야 한다. 단기임대로 빌린 초라한 아파트를 생활감 있게, 라이언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병들과 에비의 직업에 맞는 책들로 말이다. 사실 에비는 에비가 아니다. 만들어진 인물이다. 실제의 '나'는 루카 마리노. 홀어머니 밑에서 행복하지만 어렵게 자라다 엄마를 암으로 잃고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도둑질을 하다 걸려 '스미스 씨'에게 발탁되었다. 라이언은 이번 작업 대상이고 에비에게는 자신이 변해야 하는 인물의 설정과 서사만 전달될 뿐 이 작업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모른다. 라이언과 함께 참석한 경마 대회에서 라이언의 옛 친구를 만난 에비는 그 친구의 애인이 본인을 루카 마리노라고 소개하자 불안을 감출 수 없다. 자신과 비슷한 외모에 자신의 고향 이름을 대며 그곳에서 홀어머니와 살다 엄마를 암으로 잃었다고 말하는 그녀.


초반부터 도파민 폭발이다. 루카의 지략과 흔들리는 마음, 자신을 루카라고 소개하는 여자와 스미스의 정체에 마냥 순진하지만은 않은 라이언까지 흥미를 놓치 못할 요소들이 계속 등장한다. 중간에 살짝 늘어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결말까지 내 맘에 딱 들었다. 해피엔딩을 만든 게 루카 자신이라는 점이 특히 더.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읽은 범죄 소설이었다.



5.  죽이고 싶은 아이 1. 2(이꽃님. 우리학교. 2021,2024. 200쪽, 216쪽)

: 고등학교 1학년 서은이가 벽돌에 머리를 맞아 숨진 채 발견된다. 그것도 학교 뒷마당에서. 용의자는 서은과 가장 친했던 주연. 주연이 서은과 전날 다투었다는데, 주연은 도무지 그일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진실은 주연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1,2권이 시간차를 두고 출간됐지만 그냥 한꺼번에 읽었다. 어차피 이어지는 이야기였어서. 이 소설은 관계와 숨은 진실에 관해 이야기한다. 흔히들 남녀 관계는 본인들만 아는 거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늘 생각해왔다. 둘 사이의 일은 둘만 아는 거지. 하지만 그 관계 내에서도 둘 사이의 입장과 판단은 다르다. 여기서 각자가 품은 진실이 달라진다. 소설에서는 '모두가 믿는 게 곧 사실'이라고 얘기한다. 이건 현실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 그런데 그게 늘 일어나는 일이라고, 남들이 다 믿으니 그게 곧 진짜라고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가도 되는 걸까? 이 모든 일이 지나가고 난 뒤에 남은 사람들은, 특히 당사자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모두들 사건의 진실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모든 '사건'은 결국 사람의 일이고 늘 사람이 그곳에 있다. 하지만 그건 늘 잊히지. 주연과 서은, 그리고 모든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팠던 이야기였다. 



6. 숲의 신(리즈 무어, 소슬기 역. 은행나무. 2025. 696쪽)

: 에머슨 캠프는 유서 깊은, 나름 잘 조직된 캠프이다. 이혼 가정의 트레이시는 아빠와 아빠의 애인에 의해 이 캠프에 합류하게 되는데, 오랫동안 여름마다 여기에 왔던 아이들에게 섞이지 못하고 겉돌지만 역시나 자기처럼 뒤늦게 들어온 바버라와 친해진다. 바버라는 이 캠프 부지의 소유자인 반라 가문의 딸이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다. 그런데 어느 아침 일어나보니 바버라가 침대에 없다. 당연히 캠프와 반라 가문이 지내고 있는 '독립독행'의 사람들은 물론 마을 전체가 나서서 그녀를 찾는데, 사실 바버라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반라 가문의 아이가 사라진 적이 있다. 모두가 사랑했던 어린 베어. 이야기는 오래전과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중간쯤 읽는데 갑자기 짜증이 치솟아서 잠깐 덮었다. 정말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여성들이 계층, 직업, 성향, 상황에 상관없이 남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착취당하고 휘둘리고 심지어 누명까지 뒤집어쓰는 구나. 지겹다, 정말.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형사 조도, 캠프의 지도교사로 일하고 있는 가난한 루이즈도, 심지어 상류층의 앨리스도 본인의 뜻이나 능력보다는 젠더로 평가받는다. 이야기는 범죄 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다. 하지만 바버라의 실종은 맥거핀에 불과하다. 문제는 소위 상류층이라는 인간들의 위선과 계급 의식, 성차별 그리고 욕망. 진실이 모두 드러난 뒤에도 그들은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변할까. 그래서 미지근한 결말이 이해가 됐다. 그게 최선이었겠지. 다만 새로 드러난 진실을 견디는 것도 결국은 여성의 몫일 거라는 거. 그게 마음이 아팠다.



7. 사랑의 입자(김리리,김민령,김진나,신현이,이금이,전삼혜,정은숙. 문학동네. 2018. 220쪽)

: '사랑'을 테마로 한 청소년 단편집. 전삼혜의 이야기는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지만 다시 읽으니 또 새롭고 좋았다. 주제인 사랑은 물론 성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이나 남매간의 애정, 때로는 로봇의 애정까지 이야기한다. 다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신현이.



8. 킬 유어 달링(피터 스완슨, 노진선 역. 푸른숲. 2025. 360쪽)

: 웬디는 요즘 남편 톰이 점점 밉살스러워진다. 영문학자이자 작가인 남편이 같은 학교 교수들을 초청해 파티를 연 날, 고질적으로 문제가 되어 왔던 술을 역시나 과하게 마신 톰은 자신이 새로운 소설 집필에 들어갔으며 그건 살인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말한다. 직감적으로 그들이 공유한 비밀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아챈 웬디는 톰에 대해 살의를 품는다. 이야기는 그들의 현재에서 조금씩 과거로 역행하며 진행된다.


그들의 비밀을 알아채는 건 그닥 어렵지 않다. 사실 읽으면서는 이 책이 범죄 소설이라기 보다는 그저 중년 부부의 저물어가는 인생과 결혼 생활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술에 의존하는 톰과 그가 꼴보기 싫지만 그럼에도 결혼 생활을 지켜나가고픈 웬디.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과 헤어져 있던 기간의 삶, 그리고 재회. 굳이 이들이 함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이들의 인생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각자 조금씩 어긋나는 기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하는 좋았던 기억. 하지만 책 중반에 또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이야기는 여전히 과거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챕터 끄트머리의 작은 반전. 사실 맘에 드는 반전은 아니었지만 역시 스완슨이구나 하긴 했다. 재밌게 읽었다. 



9. 내일을 위한 힌트(기준영. 문학동네. 2025. 268쪽)

: 순한 단편집. 화자들이 다 순하고 이야기들이 다 순하다. 물론 사건과 갈등이 없는 건 아니고 역경과 고난도 주어진다. 하지만 그저 묵묵히 견뎌나갈 뿐이고, 착하게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반짝이지 않아도 칙칙하지는 않게 생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정말 모든 이야기들이 다 좋았다.



10. 디 아더 와이프(마이클 로보텀, 최필원 역. 북로드. 2025. 528쪽)

: 오래전부터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조 올로클린. 16개월 전 아내를 수술합병증으로 떠나보내고 지금은 아직도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한 10대 작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대학 신입생인 큰 딸은 멀지 않은 도시에 있다.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가보니 아버지는 그냥 쓰러진 게 아니라 뒷머리를 둔기로 가격당했다고 하고, 아버지의 침상 옆에는 낯선 여자가 앉아 있다. 그녀는 자신이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아버지의 다른 아내라고 말한다. 올리비아 블랙모어는 외과의였던 아버지의 예전 환자였고 장래가 기대되는 테니스 선수였지만 사고를 심하게 당했고 아버지가 그녀를 수술하고 재활을 도왔다. 조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걸 고민하는 한편 올리비아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다.


초반, 상간녀의 당당함에 혼자 열받았다. 조가 그녀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됐고. 남자들이란... 그저 예쁘면 호감이지. 설사 그게 아버지의 정부라 해도 말이다. 올로클린 시리즈의 9권이라는데 이런 시리즈물의 첫 권이 아닌 작품을 처음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내가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꾸준히 읽었다면 조에게 더 공감했을까? 사건 조사는 느리게 진행되고 중간중간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의심을 더하지만 범인은 가까운 데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도 잘한 건 없고. 솔직히 말하면 제목으로 낚았네, 싶다. 시간이 좀 아깝기도 했고. 



11.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조나탕 베르베르, 정혜용 역. 열린책들. 2023. 624쪽)

: 1888년 뉴욕. 스물여섯 살의 제니는 동네 시장에서 마술 공연을 하며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다. 어느날 공연에서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가 나타나 마술 공연의 트릭을 찾아내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눈앞의 지폐에 흔들린 제니는 신사와 함께 본 공연의 술수를 바로 알아차리고, 후에 신사가 준 주소로 찾아가는데 그곳은 당대에 유명했던 핑커턴 탐정사무소. 신사는 로버트 핑커턴이었다. 로버트는 제니에게 현재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심령술사 폭스 자매의 속임수를 알아내는 임무를 함께하자며 거액을 제시한다. 당시 폭스 자매의 교령회는 종교 집회만큼이나 열렬한 팬들을 몰고 다녔고, 핑커턴 탐정사무소는 아버지 대의 영광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제니는 교령회에 참석하지만 속임수를 알아내지 못하고, 무대 뒤에서 자매 중 둘째인 마거릿이 성희롱을 당하는 걸 구해주며 그녀에게 신뢰를 얻는다. 한편 로버트의 동생 윌리엄은 거친 인간으로, 마술사인 제니를 고용하는 걸 못마땅해하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폭스 자매의 비밀을 폭로하겠노라 하고 먼저 비밀을 밝혀내는 쪽이 핑커턴 사무소의 경영을 맡기로 하자고 로버트에게 제안한다.


마술과 심령술, 탐정 기술 등이 엮여 있지만 이건 가족의 이야기이자 제니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주제들이 좀 산만하게 섞여 있다. 각 챕터 첫머리에 제니의 아빠가 쓴 마술 교본이나 핑커턴 지침서 등이 등장해서 챕터의 방향을 알려 주긴 하지만 폭스 자매, 제니 그리고 핑커턴의 서사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불쑥 튀어나온다. 사실 내 독서를 가장 시큰둥하게 만든 건 제니였다. 제니의 우왕좌왕이 그녀에게 공감하기 힘들게 했어서. 아마도 저자는 제니의 휴머니즘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거 같은데 그 부분에 있어서도 제니는 임무와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갈팡질팡이다. 물론 이런 점에서 제니의 성장이 보여지기는 하지만... 조금만 더 정돈된 스토리였다면, 차라리 분량을 줄여서라도 단순화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2. 메르헨(연여름. 아작. 2024. 184쪽)

: 갑작스런 폭설에 전철에 오른 남자. 우연히 14년 전 인연을 만난다. 자신이 나호인지 은호인지 맞혀 보라는 듯 웃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는 일부러 틀린 답을 말하고, 둘의 기억은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60세 이하의 죽은 자를 되살려 낼 수 있는 세계. 그렇게 재생인은 죽음 직전까지의 기억만 가지고 깨어나 센터에서 적응 기간을 거쳐 사회로 나온다. 남자는 센터에서 일하는 직원이었고, 은호는 쌍둥이 언니 나호가 깨어나자 나호를 만나러 센터에 갔다가 남자와 처음 맞닥뜨린다. 재생인에게 일어나는 부작용 때문에 재생인들은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상황에서, 은호는 나호가 죽기 전부터 둘이 함께해 오던 집필 작업을 마무리하길 원한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 사실 재생인이라는 설정 외에는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좋은 건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 떄문. 그리고 쌍둥이 자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할 거리를 주고, 거기에 작가 특유의 차분함이 배어나오는 문장들이 서정성을 더한다. 이 작가를 좋아해서 즐겁게 읽었다. 다만 다음에 읽을 작품은 좀더 깊었으면 좋겠다. 



13. 오컬트 포크 호러(박해로. 북오션. 2024. 248쪽)

: 샤머니즘 기반의 호러 연작 소설집. 가상의 지명인 수낭면을 중심으로 토속적인 분위기의 작품 3편이 있다. 가벼운 걸 읽고 싶어서 집어들었는데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서... 작가가 가진 주제의식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세 작품 다 한번쯤은 들어본 이야기에 문장력도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필력이 달리는 글들. 



14. 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서미애. 엘릭시르. 2024. 448쪽)

: 작가의 초기 단편집. 사실 이 작가의 명성에 비해선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별로 안 읽어와서 기대가 컸는데, 초기 작품들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이 작가의 특성인건지 여성 캐릭터들이 다 너무 나약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여성혐오적인 편견을 바탕으로 쓴 작품들도 몇 편 있어서 더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도 가장 좋았던 건 <살인 협주곡>.



15. 워터멜론 슈가에서(리처드 브라우티건, 최승자 역. 비채. 2007. 252쪽)

: 매일 다른 색의 태양이 뜨는 워터멜론 슈가의 이야기. 워터멜론을 끓여 생긴 슈가로 원하는 걸 만들고, 워터멜론 송어 기름으로 램프를 태우며, 아이디아뜨(iDEATH)에 모여서 식사를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호랑이들이 있었고, '나'는 호랑이들이 부모님을 잡아먹은 걸 기억한다. 내게 어쩔 수 없다고 얘기하면서, 내 산수 숙제를 도와줬던 걸. 나는 책을 쓰고 있지만 진전은 없다. 그래도 마을의 누군가 물으면 난 계속 쓰고 있다고 대답한다. 오늘도 삐걱거리는 널빤지를 밟으며 다리를 건너 마가렛이 나를 찾아오지만 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응답하지 않는다. 마가렛은 '잊혀진 작품들'로 가버렸다. '잊혀진 작품들'에는 인보일 일당도 살고 있다. 친구 프레드가 찾아와 플린이 식사 준비 담당이라고 얘기하고, 난 아이디아뜨에 가서 모두와 함께 식사를 한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배어나오는 핏물을 감출 수 없다. 편안하게 읽고 있다가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 사실 이 작품의 많은 상징들에도 불구하고 난 그저 이상향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호랑이들이 살점을 뜯어먹었던 기억이 있을지언정 물 속에 관을 묻고 워터멜론 송어가 눈맞춤을 하는.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사람의 잔인함은 사람을 죽인다. 꼭 물리적으로 힘을 가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Ideal과 Death는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16. 종말까지 다섯 걸음(장강명. 문학동네. 2025. 212쪽)

: 종말을 소재로 한 짧은 소설들. 5개의 챕터인데 각 챕터의 첫번째 작품들이 연작이고, 차례로 각 챕터의 키워드(부정 - 절망 - 타협 - 수용 - 사랑)를 구현한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와 상당히 비슷하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가 그런 듯. 각 챕터에 속하는 소설들은 키워드를 구현하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익숙한 소재를 끌어다 쓴 경우가 많고 대부분은 그걸 뒤틀었다. 작가의 시각은 맘에 들었지만 다 재밌진 않았다. 그래도 지루해질 만 하면 챕터가 바뀌면서 궁금했던 이야기가 계속되어서 잘 읽었다. 



17. 기억을 비추는 환등열차(심은정,최현유. 안전가옥. 2024. 424쪽)

: 수현은 삼도천을 건너는 환등열차 안에서 깨어난다. 판결대를 향해 가던 환등열차는 갑자기 악귀의 공격으로 사고가 나고 함께 있던 담당 차사 원정의 도움으로 열차 밖에 내던져진 수현은 다행히 삼도천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기억의 일부를 잃게 된다. 악귀가 가져가 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임시로 차사 일을 하게 된 수현. 살아있을 때 위기협상가였던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다른 승객들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주면 자연히 수현의 기억도 돌아올거라는 말에 원정과 함께 일을 시작한다.


요즘 유행하는 소위 힐링 소설류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이야기들의 장점은 뚜렷하기에 그냥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려 했는데, 초반부터 수현 때문에 열받았다. 어떻게든 자신보다 어린 여성은 경력이 길든 경험이 많든 상관없이 상사로도 선배로도 절대 인정 못하겠다는, 존댓말도 못 쓰겠다는, 어떻게든 이겨먹어야겠다는 한국 남자 특유의 꼬장이 정말이지... 그렇다고 각 에피소드들이 뭐 그렇게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랬다.



18. 펄프픽션(조예은,류연웅,홍지운,이경희,최영희. 고블. 2022. 256쪽)

: 한국형 펄프픽션을 표방하는 앤솔러지. 다 독특하긴 했지만 가장 주제에 부합했던 건 홍지운. 가장 좋았던 건 최영희. 사실 조예은 때문에 집어들었는데 너무 평범해서 조금 실망했다. 그래도 필력은 여전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걸로 만족. 



19. 인어의 걸음마(이종산,이유리,전삼혜,이서영. 서해문집. 2021. 168쪽)

: '다름'을 소재로 한 청소년 대상 앤솔러지. 전삼혜 때문에 대출했는데 보니 이미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은 거였지만 즐겁게 다시 읽었다. 근데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같은 부분에서 열받네 - 작중 인물이 얄미워서. 표제작은 과연 표제작다웠다. 그래서 가장 좋았고. 나머지 작품들도 좋았다. 



20. 베리 따는 사람들(아만다 피터스, 신혜연 역. 서사원. 2024. 408쪽)

: 1962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사는 원주민 가족은 여름 한 철 블루베리 따는 일을 하기 위해 미국 메인 주의 한 농장으로 온다. 아버지는 이 농장에서 감독관 역할을 하며 일을 해오곤 했고 엄마는 여름 노동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막내딸 루시가 사라진다. 방금 전까지 바로 위의 오빠 조와 함께 냇가에 있었는데... 한편 어린 노마는 자꾸만 악몽을 꾼다. 오두막과 커다란 바위. 노마가 악몽을 꾸면 엄마는 두통에 시달리고, 노마는 엄마를 위해 자신의 의문을 눌러야 한다. 집에는 노마의 아기 때 사진이 한 장도 없는데, 예전에 집에 불이 나서라고는 하지만...


조와 조의 가족들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마음 아팠다. 원주민으로서의 그들의 지난한 삶은 루시의 실종으로 더 큰 아픔이 된다. 그들이 백인이었더라도 루시를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루시는 그냥 실종된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받을 상처에서 한두 개 쯤은 덜 받을 수도 있었겠지. 조의 삐뚤어짐도 마냥 아프기만 했다. 누구보다 조의 마음이 이해되었기에. 나 자신을 착한 그들에게서 제거하고 싶은 마음. 처음부터 내가 없었더라면 그들에게 닥칠 불행은 훨씬 적었으리라는 믿음.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은 후에는 조에게 평안이 온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을까? 그들이 견뎌 온 길고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이야기 밖의 독자들은 그들의 행복한 앞날을 상상하고 싶겠지만, 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는 것을 멈출 수 없을 것만 같다. 



21.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김기태. 문학동네. 2024. 336쪽)

: 작년에 명성이 꽤 자자했지만 난 왠지 기대가 되지 않았는데, 도서관에서 눈에 띄어 들고 왔다. 기대가 없어서인지 전반적으로 재밌게 읽었지만 딱히 새로울 것은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하지만 사회와는 분리될 수 없는 이야기들. 주인공들이 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읽는 사람도 크게 복잡할 게 없다는 게 이 이야기들의 장점이자 단점. 장편이 출간되면 읽어봐야겠다.



22. 저편에서 이리가(윤강은. 민음사. 2025. 172쪽)

: 이제 전세계는 커다란 얼음 덩어리이다. 수시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반도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지역은 크게 세 군데. 가장 남쪽의 '온실 마을'에서 생산된 식량은 유안같은 짐꾼들에 의해 중부 '한강 구역'으로 이송되고, 한강 구역에서 생산된 무기들은 국경인 '압록강 기지'로 이동한다. 유안은 이동 범위를 압록강까지 넓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이장의 말에 그건 한강 구역의 일이 아니냐며 한강 구역에 간 김에 짐꾼인 화린에게 따진다. 하지만 화린은 한강 구역의 구역장의 뜻임을 알려준다. 내친김에 함께 압록강 기지로 이동하는 둘. 거기서 유안은 원래 한강 구역 출신이자 화린의 친구인 기주, 그리고 대륙군의 탈영병 출신인 백건을 만난다.


해피엔딩일지 아닐지 조바심내며 읽었다. 해피엔딩이기를 바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전쟁통에, 이 눈보라 속에 그게 가능할까...? 그런데, 해피엔딩이 뭔데? 이들에겐 그저 생존이 해피엔딩인가? 혹은 잘, 의미있게 죽는 거? 아니,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죽음에는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이들이 살아남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저편에서 들리는 짐승의 소리는 과연 이 눈보라 속에서도 생명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일까, 아님 이들의 목숨을 가지러 오는 맹수의 모습을 한 죽음일까? 그럼에도 희망을 본 건 나만은 아닐 것이다. 



23. 춘천 사람은 파인애플을 좋아해(도재경. 열린책들. 2024. 312쪽)

: 즐겁게 읽은 단편집.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아서 좋았다. 작가의 의도는 어떠했을지 모르겠으나 내게 각 작품들 속 장소가, 장소의 이동이 꽤 의미있게 다가왔다. 서울과 파리(<그가 나무 인형이라는 진실에 대하여>), 춘천 집 뒤의 숲 속 공터(표제작), 화재가 난 마을의 유일하게 불타지 않는 집(<마인드 컨트롤>), 우크라이나와 그 밖의 나라들(<방독면을 쓴 바나나>), 카트만두(<노르웨이와 카트만두 사이>) 등. 의미있는 장소로의 이동을 통해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상황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이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건 이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삶이란 그렇게 끊임없이 이별하고 이동하는 것인지도.



24. 내일의 엔딩(김유나. 창비. 2024. 156쪽)

: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자경은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교사로 일하며 자경을 키운 아버지는 이제 뇌경색으로 투병 중이다. 자경은 회사를 옮기고 알바를 하면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힘에 부친다. 


여성과 돌봄 노동에 관한 흔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이야기 속 자경은 여러 가족 중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돌봄 노동을 떠맡은 건 아니기에. 그러나 홀로 돌봄으로 인해 한 개인과 가정을 지탱하기 힘들어지고 그럼으로써 사회적으로도 고립될 수 밖에 없게 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생활에 치이고 경제적으로 허덕이면서 자꾸만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지 못하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입을 닫을 수 밖에 없게 되는 자경의 모습은 단순히 안쓰럽다고 말할 수 만은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난 후의 그녀의 모습도. 그래도 작가는 자경에게 희망을 준다. 다시 사람에게 손 내밀 수 있게. 늦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역시 난, 사람으로 채우는 건 따뜻하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그렇게 따뜻하게 끝나서 다행이었고, 좋았다. 



25. 나무를 훔친 남자(양지윤. 나무옆의자. 2024. 276쪽)

: 특이하고 괴상하지만 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죽어가는 나무가 불쌍해서 회사에서 나무들을 빼돌리고(표제작), 부당한 노동에도 자신만이 할 수 있고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에 잠도 자지 않고 쿠키만 구워대고(<알리바바 제과점>), 자유를 위해 부유함을 포기하고(<우리 시대의 아트>), 수조에 갇혔지만 도망치치도 않고(<수조 속에 든 여자>). 도저히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지만 이것이 이들이 이 사회를 견뎌내는 방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이들의 모습을 짜증내지 않고 그저 지켜볼 수 있었고. 누구나 자신만의 상처를 핥는 방법이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이런 주제들에서 조금은 벗어난 <인류의 업적>. 



26. 두리안의 맛(김의경. 은행나무. 2024. 292쪽)

: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명의 인간은 그저 교체 가능한 부품임을 이야기하는 단편들. 작은 부품 하나일 뿐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빛나게 꾸려가고 싶어하는 소시민들의 안간힘이 보여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따뜻함이. 이 작가는 처음 읽는데 읽을수록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들에게 너무 공감되어서 읽는 게 오히려 힘들기도 했지만 잘 읽었다.



27. 그녀를 지키다(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정혜용 역. 열린책들. 2025. 6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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