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세계문학 시리즈입니다. 문학과지성사의 자존심으로 엮은 전집. 작가가 아무리 이름이 높더라도 그 작가의 결실 가운데 딱 한 작품만 골랐으니 작품의 품질이야 저절로 좋을 수밖에 없을 터. 한 작가 당 딱 한 작품. 20세기 중반까지는 이런 출판 기획도 드물지 않았지만 신자본주의의 절정기인 지금 시대에 고집을 꺾지 않기는 틀림없이 쉽지는 않을 듯합니다. 따라서 시리즈 2백 권 모두 엄정한 편집부의 고심 끝에 결정해 최고의 작품들을 선정한 결과물이겠지만 그래도 독자가 읽기에 정말 좋았더라, 하고 감탄할 수 있는 열 편을 고르려 합니다.

  제가 이 시리즈에서 나온 시를 제외한 모든 장르는 거의 다 읽은 거 같습니다. 이 가운데 번역 시하고는 아예 인연이 없어서 대산세계문학총서의 자랑인 다양한 고전 시 빼고, 나머지 목록 가운데 이 시리즈 출판물로 가장 감명 깊게, 재미있게, 또는 의미 있게 읽은 책을 리스트 업 했습니다. 그랬더니 열아홉. 더하기 1차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아쉬운 책과 다른 세계문학 시리즈를 통해 읽어 제외할 수밖에 없었던 책도 또 열아홉. 이 가운데 딱 열 편을 소개합니다.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2백번 작품, 울리츠카야의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은 지금 희망도서 신청 중이라 읽지 못했습니다만 이것도 혹시 기념할 만한 책 목록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 책은 다음으로 하자는 뜻입니다.



  작품 소개는 시리즈 번호 순으로 하겠습니다.



1.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 <페리키요 사르니엔토>


  라틴 아메리카의 세르반테스라고 상찬하는 모양인데 그것과는 별개로 매우 독특한 시각으로 쓴 진짜 고전 가운데 한 편이 바로 <페르키오 사르니엔토>이다. 페르키오 사르니엔토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옴쟁이 앵무새 새끼.’ 1810년대에 쓴 오래 묵은 작품이라고 곰팡내 날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인종과 계급 차별의 찬란한 반어법도 있고 뭐 그런데 다른 말 길게 할 거 없이 무척 재미있지만, 두 권 1천 페이지가 넘도록 비슷한 필체를 읽는 난관은 감안하셔야 할 것.



2.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


  이이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재미진 작가인 줄 알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문학과지성사 덕분이다. 소위 LDT, 레르몬토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내가 주장하는 러시아 3인방의 위명에 눌려 자꾸 순서가 뒤로 밀렸다가 정작 읽어보니 이게 웬일? 오블로모프의 게으름은 틀림없이 ‘천재성이 없는’ 조아키노 로시니의 도플갱어일 듯하다. 나도 나머지 삶을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을매나 좋을꼬? 이 책 역시 두 권의 빵빵한 분량, 감안하고 선택하시라.



3.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이 책, 내 최애 리스트 가운데 한 권인데 독자에 따라 호오가 있을 듯. 10년 전, 2016년에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선정했을 만큼 대단한 임팩트를 준 작품이건만 역시 소설은 독자의 결정이 최종 심판이다. 16세기 초반에 만든 돌다리. 다리를 만들 당시 보스니아 지역에서 튀르키예 소년병으로 편입한 시절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파란만장했던 다리와 주변 사람들이 겪어온 신난고난. 사람들이 당했던 착취와 죽음, 오해와 반목, 그러나 그 속에서도 언제나 건강했던 사람들의 초상.



4. 모옌, <홍까오량 가족> 또는 <붉은 수수밭>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작품의 전형. 예전에 있었던 창피하고 불행하고 참혹했던 과거에 관한 솔직한 기록. 1920년대부터 40년대 초반까지 강태공의 제나라 지역에서 있었던 항일, 국공, 토비의 난과 이 속에 끼어 죽을똥 살똥했던 인민들의 적나라한 모습. 그리고 남녀상열지사! 이 책 읽고나서 공리 나오는 영화가 이 책의 1`부에 그쳤다는 걸 알게 됐지 뭐야. 모옌 읽으려면 단연 이 책부터 들추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는 의견이 저절로 생길 것.



5. 엘리자베스 개스켈, <남과 북>


  요즘 문학동네 세계문학에서 <북과 남>이란 제목으로 새 번역이 나왔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첫 정. 이 책으로 하여금 나는 단박에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팬을 자처하게 됐다. 19세기 초반의 목사 부인께서 어떻게 이리 노동자들의 운동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진보적 시각을 갖추게 되었는지 말 그대로 깜놀, 했다는 거 아닌가. 스토리 하나 가지고 굳세게 작품을 밀고 나가는 힘을 보여주고, 결혼이 삶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도 은근히 눈치를 주는, 솔직히 이 정도면 명작 아냐?



6. 페터 바이스, <저항의 미학>


  아오, 이거 리스트에 올렸다가 욕만 한 태배기 먹는 거 아닌가 싶다. 세 권에 무지막지 건조한 문장으로 꽉 채워진 어마무시한 분량의 책. 문장 부호라고는 쉼표와 마침표 말고 다른 건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지옥의 순례길. 그러나 인내하시라. 생각도 못한 미학 강의와,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어찌하여 히틀러의 독일이 군비증강을 허용했는지 설명하는 명 강의를 들을 수 있을 터이니. 그러나 이 책의 백미는 예술품을 감상하는 미학적 시선이라 바이스, 이 엄하게 생긴 독일 양반한테 혹, 넘어가버렸다는 거 아닌가.



7. 리온 포이히트방거,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말로만 듣던 포이히트방어. 난 “~방거”가 아니라 “~방어”라고 배워서. 그건 그거고, 이 책은 작가 포이히트방거에 대한 나의 경외심을 심어주어 이후 <톨레도의 유대여인>과 <유대인 쥐스>를 사서 읽게 했으며 앞으로도, 장담하노니, 어떤 책이 나와도 끝내 찾아 읽을 것이라고 단단히 각오했다. 이미 세상의 태양이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대서양 북쪽의 섬나라와 이웃한 프랑스로 넘어갔음에도 세상 무능한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고야. 그의 타협하지 않는 삐딱한 세계관과 왕족을 희화화하면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시절. 하여튼 이 책은 대산셰계문학총서 가운데 틀림없이 추천작이다.



8. 마거릿 드레블, <찬란한 길>


  조선의 혜경궁 홍씨를 모델로 쓴 소설 <붉은 왕세자빈>의 작가 드레블의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 이 책이 다른 출판사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왔으면 모두 출판했을 거 같다. 1979년 12월 31일의 신년 파티가 작품의 시작이니 위에 소개한 작품과 비교하면 제일 현대물이다.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집권하고 다음 해인 1980년에는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등극해 천박한 신자본주의의 전성기를 마련하는 기념비적인 송구영신의 장이 1979년 12월 31일이겠지. 이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신개념의 고전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읽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후속작품의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



9. 윌리엄 매이크피스 새커리, <신사 베리 린든의 회고록>


  정말 우습게 알았던 새커리. 오래 전에 <허영의 시장>을 별로 인상깊게 읽지 않아 조금 실망하던 차에 제임스 미치너가 <소설>에서 반드시 평가절하해야 할 영국 작가 네 명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 바람에 우습게 알았던 작가. 그러다가 이 책 읽고 쌍코피 철철. 아오, 새커리가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가였구나! 대오각성해서 이 책 좀 읽어보라고 세계만방에 고했거늘 아직도 즐겨 찾아 읽는 독자가 별로 없는 것이 안타깝다. 신사 베리 린든은 말 그대로 신사 그 자체. 라고 주장하는 엽색 사기꾼. 이의 천방지축 설레발을 찾아 읽는 일이 이리 즐거울 수 있을 거란 걸 미쳐 몰랐던 인종이 나 말고도 무척 많을 걸?



10. 패트릭 화이트, <전차를 모든 기수들>


  호주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패트릭 화이트. 나도 아무 기대 없이 그냥 대산세계문학총서 라는 타이틀 딱 하나 보고 사서 읽었는데, 세상에 이게 웬 일? 한 방에 껌뻑 넘어가서 이이의 단종된 단편집 <불타버린 사람들>을 헌책방에서 사서 읽었고, 지금 새로 번역해 나온 두 권짜리 장편 <폭풍 한 가운데>를 희망도서 신청해서 기다리는 중이다. 말이 필요 없다. 아직 화이트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고, 그리하여 고조선 때인가, 당나라 때인가 을유문화사가 찍은 두 권짜리 <인간의 나무> 헌책도 사 읽어보려 했다가 활자가 너무 작아 이미 찌든 시력이 받쳐주지 못해 그냥 보관 중이다. 조여청사모성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열 권을 다 마쳤다. 그러면 뒷 번호에 배치한 작품들은 어쩌냐! 맞다 그래서 열 권에 딱 두 권만 더 보태자. 괜찮지?



11. 레일라 슬리마니, <타인들의 나라>


  2018년에 <타인들의 나라>라는 별 볼 일 없는 작품으로 공쿠르상을 받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가 대박을 친 작품. 작가 슬리마니 가계를 모델로 쓴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라는데, 이 책 읽어보면 2부와 3부가 왜 아직도 번역 출판되지 않았는지 한숨을 멈추지 못하리라. 알자스-로렌 지역이라 하면 예전 교과서에 나온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무대인데, 여기 출신 어린 아가씨 마틸드가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에서 징병당해 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 아민과 결혼해 모로코에 가서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 당연히 이슬람 문화 속에서 갖은 고초를 겪게 되는데 이게 무척 재미있다는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슬리마니를 다시 봤을 정도이니 한 번 읽어 보고 싶으시지?



12. 쥴퓌 리바넬리, <세레나데>


  이 책을 얘기하지 않고 대산세계문학 200을 마치기는 정말 아쉽다. 인종, 종교, 피부색, 젠더, 핸디캡, 지위, 국적에 관한 모든 차별을 반대하는(것처럼 읽히는) 정서 안에서, 유대인 여성을 사랑하는 아리안족 노 교수의 끝내 잊지 못하는 사랑 때문에 독자는 눈물이 앞을 가릴 것이다. 부르주아 출신의 좌파이고 진보적 성향의 작가는 이 막시밀리언 바그너 교수와 나디아의 사랑 이야기에 보태 진정한 문학에 관한 논의도 보태고 있으니, 아마도 이 책을 읽은 독자는 나처럼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명저 <미메시스>를 찾아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 냉혹한 한파가 몰아치는 보스포루스 해변에서 미친 듯이 한 여인을 위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노 신사. 그 잔영이 쉽게 가시지 않을 듯.


.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