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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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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옛생각이 나서 황지우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들췄다. 책꽂이에 40년 꽂혀있던 묵고 묵은 시집. 생각나면, 혼술에 얼근해지면 한 번씩 들춰보려 했지만 사실은 여간해 다시 읽게 되지 않는 것이 책인지라, 그저 종이만 바싹 말라가던 시집.

  이 가운데 <활엽수림에서>을 읽으면서, 피식, 웃었다.

  여태 내가 즐겨 쓰고, 정말로 내 머리에서 만든 묘사인 줄 알았던 것들. 세상에나. 예컨대:


  "비인칭 주어로 살다."

  "생을 탕진한 죄"

  "무작정 살다."


  이게 다 황지우가 쓴 시 <활엽수림에서> 딱 한 수에 몽땅 나오는 거였다. 고백하노니, 정말 내가 만들어 쓴 구절인 것으로 알았던 것. 그래서 틈나는 대로 열심히 써먹던 구절이다. 웃기지? 앞으로 다시는 누구, 누구를 흉보지 못하리라.

  이 시에 이런 구절이 있으니:


  "새벽 기슭에 서서 부은 눈으로 눈 덮인 산을 멩하게, 바라보다."


  '멩하게' 다음에 찍힌 쉼표 ","에 연필로 동그라미 하나 그려놓은 스물네 살의 나.

  옛 시집을 읽는 재미가 퍽 좋다. 아직도 외우고 있는 시 <歸巢의 새. 2>가 이 시집에 실린 거였구나. "지 울음이 들릴락말락한 까마득한 달팽이管 속으로 날아가부럿다."  시 쓰는 고단함을 어찌 이렇게 쓸 수 있었을까.


  <같은 緯度 위에서>의 11행에 "<악으로> 詩를 쓰는 것이 아니다."에는 또 연필로 의문문이 보태졌구나. "愕?, 惡? 또는 깡다구?"라고. 웃기고 재미있다.


  그래도 나 같은 잡것들한테는 아마도 이 시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가 <심인>이었을 거다. 이거 한 번 올려보자.



  심 인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p.29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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