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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유작. 작년에 마르케스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 나왔다고 잠깐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나기는 한다. 그럼 그때 왜 안 읽고 지금에서야 읽었을까? 그것도 작품이나 작가를 특정하고 고른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서가 사이를 빈둥거리다가 고른 얇은 책이었으니. 왜 얇은 책? 희망도서가 입고되기 직전. 내 회원증으로 세 권, 아내 회원증으로 두 권. 이 가운데 두 권이 벽돌이라 또다른 벽돌을 한 권 더 고르면 두 주에 벽돌 세 권과 ‘안 벽돌’ 세 권을 해치우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어서, 의도적으로 ‘안 벽돌’을 고르고 있던 중에 눈에 들어왔다.
나는 유작이나 유고집 미발표작품 같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도 그래서 작년에 고르지 않았을 수 있다. 유고집은 작가가 평생 이 작품을 발표할까 말까 고민하거나 발표하기에는 수준이 너무 낮은 졸작이라고 생각해온 B급 작품일 경우가 많다. 유작은 작가의 입장에서 완성하지 않은 작품일 때가 많고. 그래서 유작이나 유고집이 대박인 경우를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2008년, 81세 때 자신이 150페이지 분량의 짧은 ‘연애 소설’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한다. 이미 1999년 콜롬비아 시사 주간지 《캄비오》에 작품의 1장을 발표했다고 했으니 벌써 9년 동안 작품을 들고 쓰거나 수정 중이라는 거였다. 이 이야기는 무려 40페이지에 육박하는 부록 가운데 “편집자의 말”에 나오는 건데, 책의 프롤로그로 붙어 있는 마르케스의 두 아들 로드리고와 곤살로 가르시아 바르차의 이름으로 하는 말을 듣자면, 노년의 마르케스는 기억력에 상당한 문제가 있어 이들의 아버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오래 수정을 했으나 “기억은 내 원자재이자 도구야. 그게 없으면 아무것도 없지.”라고 말하던 아버지는 결국 “이 책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없애 버려야 해.”라고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최후 결정을 했다고 한다. (p.7~8)
이 최후 결정과 부록으로 실린 편집자의 말은 서로 모순된다. 편집자는 2004년 7월에 마르케스의 최종 수정이 끝났다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 있다. 작가가 어느 한 쪽에만 말한 내용을 다른 쪽이 모를 수도 있고, 같은 말을 듣는 사람이 자기 입장에 가깝거나 이익이 되게 해석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법정에 가서 다툴 마음까지는 나지 않으면 뭐 속으로 한 번 째려보고 끝나는 거지. 근데, 만일 정말로 마르케스가 2004년 7월에 최종 수정이 끝났다고 변호사나 공증인한테 언질을 주었다면, 왜 책은 2023년, 20년 후에나 출간되었을까?
프롤로그라는 타이틀을 달고 두 아들이 하는 말과 편집자의 말을 합해보면, 이 작품은 결국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출판을 포기한 작품인데, 작가가 출판을 포기했거나 말거나, 편집자와 두 아들이 다른 마르케스 열광자 및 책이 나오면 떡고물이라도 조금 집어 잡수실 수 있는 인사들의 격려에 힘입어, 세계 각지에 산포되어 있는 마르케스 숭앙자에게 마르케스가 출판하기 원하지 않았던 작품을 읽어볼 기회를 준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이 악의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건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건조한 단어만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결국 사는 일이다. 진정으로 출판하지 않기를 바랐으면 원고를 없애버렸겠지. 작가 역시 조금은 출판하고 싶은 미련이 “틀림없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나는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이미 늙은 마르케스가 쓴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읽고 그의 노년 작품에 실망하고 있었던 터라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8월에 만나요>는 연애소설이다. 근데 사실 연애까지는 아니고 카리브해를 낀 라틴 아메리카 사람의 시선에서 보면 당연히 중장년인 46세의 유한여성 AMB, 아나 막달레나 바흐가 매년 한 차례, 절정의 피서기 8월 16일이 되면 처음엔 모터보트, 후엔 여객선으로 타고 섬으로 들어와 이미 예약한 택시를 타고, 시장에 들러 예약한 꽃 파는 아주머니한테 글라디올러스 한 다발을 사서, 예약한 호텔에 가 체크인을 한 후, 어머니가 묻힌 공동묘지에 가서 글라디올러스를 헌화한 후, 호텔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예약한 택시로 선착장에 가 타고 온 여객선을 다시 타서 집에 가는 행로가, 이 여성 아나 막달레나 바흐의 일년 중 1박2일의 루틴이었다.
아버지는 피아노 선생이자 40년 동안 지방 음악원의 지휘자였고, 어머니는 몬테소리 초등교육에 혁혁한 공을 세운 유명한 교사로 자기 기질을 관리할 지성과 능력을 딸 AMB에게 물려주었다. 이들 사이에 하나 있는 아들은 수도로 진출해 국립 오케스트라 1st 첼로의 수석으로 일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모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는데 첼로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아나 막달레나 역시 모든 악기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악기 연주에 별로 관심이 없고 맨발의 가르델 수도회에 들어가기를 꿈꾸다 이루지 못해 대학에서 예술과 문학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도메니코 아마리스를 만나 사랑을 하고, 약속을 하고,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한 날의 늦은 밤까지 자기의 어느 성감대라도 손을 대 본 남자는 없었다. 맨발의 수도회 입회 희망자였으니 어떤 면에서 당연했을 수도 있겠지. 이후 딸을 낳고 살아온 28년 동안 남편 외의 어느 남자와도 한 침대에 올라본 적이 없다. 말 그대로 사랑하는 남자와 더할 수 없이 화목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다. 정말? 아니, 일단 말로는 그렇다는 거다.
어머니는 투병 중, 숨이 넘어가기 불과 3일 전에 왜 이 섬에다 묻어달라고 했을까? 육지에서 모터보트를 네 시간이나 타고 와야 도착하는 가난한 섬. 해변에는 어업이나 불법행위를 해서 먹고 사는 빈민촌이 밀집해 있고, 이 벨트를 뚫고 언덕 쪽으로 올라가야 호텔과 방갈로 등 본격적인 휴양지가 나오는 전형적인 카리브해의 한철 휴양지. 어머니를 매장하기 위하여 처음 섬에 도착해 매장을 한 다음, 호텔 방에 들어 창을 열고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바다를 보는 순간 막달레나는 어머니가 왜 이곳에 묻어달라고 했는지 이해했다고, 오해했다.
섬. 이곳이 “유일하게 외로움을 느낄 수 없는 고독한 장소”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매년 8월에 이곳으로 돌아와 어머니 묘소에 평소 어머니가 좋아한 글라디올러스 한 다발을 헌화하겠다고 결심했다. 글라디올러스는 섬에 어울리지 않는 비싼 꽃이지만, 오래 전에 백인 한 명이 이 꽃을 좋아하여 섬에 구근을 가져와 저렴한 인건비로 작지 않은 농장에서 길렀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섬에서는 글라디올러스를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살 수 있던 것.
글라디올러스가 왜 이 섬에서는 싸게 살 수 있었을까? 다른 섬에서는 볼 수도 없을 만큼 비싼데 하필이면 이 섬에서 집중 재배되는 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독자의 의심도 함께 커진다.
그건 그거고. 아나 막달레나가 46세였던 8월26일. 택시를 타고, 시장에서 글라디올러스 한 다발을 사서, 이제는 낡은 호텔 2층의 203호에 짐을 푼 다음, 어머니 묘소에 가서 헌화했다. 이제 일정이 끝났다. 남은 것은 저녁을 먹고, 내일 아침 배에 오를 때까지 가져 온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읽기만 하면 된다. 먼저 저녁을 먹기로 한다.
호텔의 레스토랑에 들어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주문한다. 옆 테이블에는 브랜디 한 병과 술잔만 하나 올려놓은 남자가 혼자 앉아 있다. AMB가 그걸 보고 자신이 마시는 유일한 술인 얼음과 진토닉을 한 잔 주문한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마주치고, 남자가 AMB의 자리에 합석한다.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고 중요한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남자. 일정 끝났다는 말을 어렵게도 한다. 스페인계 미국인 토목기사라고 하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즉, 믿기지는 않는다. AMB의 책을 언뜻 보더니 브램 스토커 말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라>로 주제를 바꾼다. 반갑다. 독자인 나도 제일 좋아하는 <드라큘라>가 프랜시스 코폴라의 것이라서. 내 마음도 알아차린 AMB는 남자를 자기 방으로 초대한다. 2층 203호예요. 계단 오른쪽에. 문 두드리지 말고 그냥 들어오세요.
먼저 서둘러 방에 들어 옷을 바닥에다 훌훌 벗어던진 다음 욕실에서 샤워할 시간까지는 없을 것 같아 성기와 겨드랑이 그리고 부어오른 발가락만 얼른 씻는다. 몸에 타월을 두드리자마자 방문을 두드리는 남자. 문 밖에 그가 서 있다. AMB는 말 없이 그를 끌었고, 서둘러 그의 몸에서 옷을 벗겨냈고, 침대로 밀어버린 후에 자기가 위로 올라가 즐겼다. 남편 도메니코 아마리스의 것 말고 다른 남자의 신체 어느 부문이라도 자기 몸의 한 부분 속으로 들어온 첫번째 경험이었다.
조금 후 또다시 AMB가 시도해 한 번 더 했고, 새벽이 밝아올 즈음, 남자의 몸을 한 번 더 더듬을 때, 남자는 자신이 자는 척하는 걸 AMB도 눈치채게 함으로써 거절해, AMB는 오랜만에 숙면에 빠져들었다. 늦게 잠을 깨 정신차려보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자기 옷이 가지런히 개켜져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드라큘라> 책에 끼어 있는 무엇? 미국 화폐 20달러였다.
하룻밤의 대가로 받은 20달러. 몇 년도의 일인지 몰라 20달러가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녔는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자칭 토목기사라는 남자가 46세의 여자를 사서 하룻밤 내내 즐긴 대가로 적정하다고 여긴 값이겠지. 생전 처음 남자를 만나 유혹하고, 자기가 주도적으로 즐긴 결과로 아나 막달레나 바흐는 돈을 받았으니, 그리하여 훗날 자기 딸에다 대고 자기 딸한테 “창녀야!”라고 말하게 될 지도 모르고, 자기 스스로 모멸스러운 창녀가 된 듯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후 AMB는 매년 8월 섬에 올라 어머니 산소에 성묘할 때마다 꼬박꼬박 남편 아닌 남자의 몸을 탐하게 된다. 여태까지는 그냥 모르고, 알려 하지 않고 살던 일상을 캐면서. 예를 들어 남편은 음악을 배우러 오는 여대생들의 유혹에서 자유로웠을까? 그리하여 혼인의 순결을 지켰을까? 이렇게 시작한 숙고는 점점 확장해, 자신처럼 맨발의 가르델 수도회에 들어가고자 해서 결국 들어가고야 마는 딸의 몸은 정결할까? 세상이 복잡해지고 만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보다는 괜찮았지만, 재미있었더라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위대한 대표작들과 비교하는 건 족탈불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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