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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지 마, 아이야
  • 응구기 와 시옹오
  • 10,350원 (10%570)
  • 2016-05-23
  • :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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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말부터 매년 가을만 되면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도 숱한 매체에서 노벨문학상 후보 리스트에 올려놓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던 작가 가운데 한 명이 케냐의 키쿠유어(語) 소설가 응구기 와 시옹오였다. 1938년생이니 87년을 살다가 갔다. 우리나라에도 온 적 있다. 박경리 문학상을 받았다.

  케냐의 나이로비 북부 농촌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 시옹오 와 응구기는 아내가 네 명, 자녀가 스물여덟이 있었는데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는 세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n번째 자식이었다. 불운이 이 가정을 덮친 것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이 자기들 마음대로 정한 “제국 토지법”에 따라 시옹오 집안 소유의 토지가 전부 압류되어 영국에서 배 타고 식민지로 온 백인의 소유로 넘어간 일이었다. 많기도 한 이복 형제 가운데 한 명은 2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참전해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죽었고, 다른 형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1952~1960년에 있었던 마우마우 봉기 당시 “영국 군인들의 정지하라는 말을 듣지 못해서” 영국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다른 형은 당시 마우마우 단에 들어가 영국 및 식민지 정부와 투쟁하다 죽었으며 응구기 와 시옹오의 친엄마 역시 당시에 영국인과 이들에 협조하는 케냐인으로 구성된 시민군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이 모두 <울지 마, 아이야>에 나온다.

  케냐 원주민들의 일부다처제 식구들은 어머니가 달라도 형제 간의 정은 친 동기간의 정보다 전혀 못하지 않아서, 이런 가정사에도 불구하고 어리지만 공부 잘하는 응구기 와 시옹오만큼은 끝까지 공부를 시키려고 모든 형제들이 나서서 도왔단다. 내전 기간 동안 죽임과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기숙학교에 다니던 응구기 와 시옹오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학교를 그만두지 말라고 할 정도로 이복형제들이 이이의 교육에 집착했다고 한다.


  <울지 마, 아이야>에 이런 정황들이 모두 나온다. 아버지 응고토는 1차 세계대전에 소년병 신분의 영국군으로 참전해 백인병사를 위해 군수품을 나르고, 도로를 닦는 등의 일을 하고 돌아왔지만 이 사이에 집안의 토지 전부가 “영국 제국 토지법”에 따라 영국인 하울랜즈의 소유로 넘어가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울랜즈에게 고용되어 농장 일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애초부터 비극을 품고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응고토의 두 아들, 첫번째 아내 은제리의 장남 보로와, 주인공 은조로게의 친어머니 뇨카비가 낳은 첫아들 므왕가가 역시 영국군으로 참전해 이집트, 예루살렘, 미얀마 전투에 투입되어 므왕가는 돌아오지 못했고, 이야기(구술문학)하기 좋아하던 보로는 우울한 청년이 되어 돌아왔다.

  이들 가족이 사는 집은 ‘자코보’라는 이름의 케냐 원주민의 땅 위에 지은 것으로 당연히 땅 임대료를 지불해야 했다. 자코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당시 원주민들의 눈으로 보기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살면서 아들은 나이로비에 있는 고등학교를 거쳐 런던으로 유학으로 보내고, 주인공 은조로게보다 한두 살 덜 먹었지만 정상적으로 학교에 입학해 후에 같은 반이 되는 딸 므위하키도 나이로비에 있는 여자 기숙학교에 다닌다. 흑인 자코보가 땅을 소유하고 있고 하울랜즈의 농장에 비하면 그리 볼품없지만 그래도 제법 큰 농장을 가지고 있다면, 식민지 시절에 이런 인간은 백이면 백 친영국파라고 보면 된다.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동족을 고발하고, 사적인 감정으로 없는 일을 있다고 해서 곤욕을 치루게 하는 인간. 어디에도 있다. 식민지 조선에 있었듯 식민지 케냐에서도 이하동문이다. 그리하여 은조로게의 바로 위 이복형 카마우가 말한다.

  “백인은 백인일 뿐이야. 하지만 백인이 되려는 흑인은 고약하고 잔인하지.”

  외국인투자법인의 외국인 사장은 뭐 그런대로 사장질을 한다. 자기도 낯선 고장에 와서 사장질 하려면 현지인들 눈치를 안 볼 수 없거든. 그러나 한국인 사장은? 눈 뜨고 보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 요즘에야 시대가 달라져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지, 여전할 지도. 아마 조금은 그럴 걸? 주인 마님보다 더 무서운 게 그 집구석 청지기라잖아.


  이 작품은 응구기 와 시옹오가 스물네 살에, 우간다 마케레레 대학에 적을 두었을 때 쓴 아주 초기 작품이다. 그래서 소년 은조로게를 주인공으로 하고, 이 아이가 열여덟 살의 청년이 될 때까지를 그린 일종의 성장소설을 썼다. 불운하게 이 시기가 케냐의 마우마우 봉기 기간과 겹쳤고, 작가 자신이 고스란히 이 때를 겪은 만큼 젊은이 답게 식민 모국인 백인 영국인과 부영附英 흑인의 원주민에 대한 학살과 고문을 고발한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들의 만행이 아니라 케냐 사람들의 저항이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케냐 흑인 가정이 어떻게 무너지고 말았는가, 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당시가 식민 시절이었으니 등장인물을 극단적 선악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던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선한 쪽은 당연히 약자인 케냐 사람들과 특히 응고토 가족 구성원이고, 악한 쪽의 극단은 백인이자 응고토의 토지를 모두 흡수해버린 영국인 뜨내기, 그러나 지금은 지역의 최고 권력자인 하울랜즈와, 이의 악마적인 흑인 하수인 자코보.

  작게 보면 응고토 가족, 크게 보면 케냐 사람들의 최초 불만은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것부터 시작한다. 전쟁에 나가 영국을 위하여 싸웠건만 돌아온 건 토지 몰수였다. 이제 자기 땅이었던 곳에 고용되어 농장 일을 해야 하는 현지인. 그럼에도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에 대하여 항의라도 하면 곧바로 해고되는 난감한 상황에 빠져, 이들이 선택한 것은 집단 파업이었다. 작중에서도 나이든 응고토는 파업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가, 파업 현장에 나와 이들을 해산시키려 위협하는 자코보에게 정면으로 나서 맞서는 바람에, 자코보 땅 위에 지은 집에서 쫓겨나고, 그것보다 더 험한 건, 자코보로하여금 앙심을 품게 만든다. 그러니까 총 파업이 두번째 전환점이 되는 셈.


  세번째이자 결정적 파국은 위에서 여러 번 이야기한 마우마우 봉기이다.

  응고토의 첫번째 아내 은제리는 차례로 보로, 코리, 카마우 세 아들이 있고, 두번째 아내 뇨카비는 전쟁 나가서 죽은 므왕기와 주인공 은조로게, 이렇게 두 아들, 합해서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 가운데 보로와 코리가 마우마우 단에 (한꺼번에는 아니지만) 입단해 영국인과 케냐 하수인으로 구성된 시민군과 싸운다. 싸우긴 싸우는데, 주인공의 친형들이니 그냥 싸우는 정도가 아니다. 그동안 자기 딸 므위하키와 은조로게가 은근히 은은한 사랑을 꽃피우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다양한 방법으로 응고토를 위시하여 이이의 아들들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던 자코보를 죽여버린다.

  한 가족의 가장의 의무 가운데 제일 무거운 의무는 가족을 지키는 일. 이 암살이 자기 아들 중에서 카마우가 한 일일 것이라고 오해한 응고토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시민군 총사령관으로 변신한 전 직장이자 오래 전에 자기 땅이던 “하울랜즈 농장”의 주인 하울랜즈에게 자기가 한 일이라고 자수해버린다. 이미 파업할 때 응고토를 해고해버린 하울랜즈는 이것이 거짓 자수인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응고토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다. 죽기 바로 전까지. 그리고 먼 곳의 기숙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은조로게까지 학교에서 체포해 펜치로 고환을 조이는 등의 극한 고문을 해 감히 주인공이 반 정도 넋이 나가게 만들었으니, 하울랜즈, 무사하게 소설을 끝내기는 글렀다.

  아니나 다를까, 고문으로 몸이 엉망진창이 된 채 집에 실려온 지 며칠 만에 아버지 응고토가 죽어버리고, 공부 잘하는 막내 은조로게는 반쯤 정신이 나가버렸으며, 성실한 카마우는 감옥에 갇혀 언제 나올지, 벌써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야밤을 틈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응고토의 침상에 그림자처럼 나타난 맏아들 보로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귀신처럼 사라져 영국 백인, 하얀 귀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해버린다. 작품 중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둘째 아들 코리는 일찌감치 마우마우 단에 들어가버려 소식도 없다. 이제 이 집안에 남은 유일한 남자는 은조로게.

  응구기 와 시옹오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은 케냐 사람들. 흑인들은 화해를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어떻게? 스물네 살의 작가, 훗날 매해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자 목록에 들 “아프리카 문학의 거인”으로 빛나지만 아직 구상유취한 신삥 작가는 별로 세련되지 못한,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해서, 뻔한 방식을 선택해 “가능하지 않은 화합”을 주장한다. 역자 황가한은 이 방식을 아프리카 문학의 최고 거봉이자 후대 아프리카 출신 작가들의 롤 모델 치누아 아체베의 대표작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오콩고와 비교하며 이들의 앞에 그나마 희망이 남아 있음을 강조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근데 “화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 건가? 짧은 작품이니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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