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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인생의 친척
  • 오에 겐자부로
  • 8,100원 (10%450)
  • 2005-05-24
  • :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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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에 히카리는 오에 겐자부로와 이타미 유카리 사이에서 1963년에 태어난 맏아들이다. 날 때부터 두개골에 문제가 있어 그쪽으로 뇌수가 흐르는 뇌헤르니아 증상으로 인한 장애를 가져야 했다. 젊은 오에 겐자부로는 아기가 평생 정신과 신체 일부에 장애를 갖고 살아야 하는 조건으로 수술을 해서 살려야 할지, 그냥 방치해 서로 불행한/불행할 것처럼 보이는 생을 일찌감치 포기할 지 선택해야 했다. 당시 진퇴양난의 번민과 방황은 1964년 작품 <개인적인 경험>에 그대로 실려 있다.

  결국 히카리와 함께 사는 생을 결정한 겐자부로는 두 번에 걸친  수술과 계속된 치료로 거의 잃어버렸던 히카리의 시력을 회복하고, 간질증상을 완화하는 약을 평생 복용하면서 특수학교를 졸업, 작곡가로 이름을 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이렇게 성장하기 위하여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겐자부로의 책에서도 수시로 등장하는 누이동생 나츠미코와 남동생 사쿠라마도 자신의 생활 일부를 양보하는 등의 영향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장애인이 집안에 있으면, 당연하겠지만 장애인도 사회적 약자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약자를 좀 더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장애인, 이 가운데 특히 히카리 같은 정신지체가 있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순수한 심정을 갖고 있으리라는 일종의 선입견이나 바램을 가지고 있기 십상이다. 물론 조금은 그렇다. 반면에 뇌의 성장과 발달이 늦어 이미 큰 몸집을 하고 있을지언정 여전히 양보나 포기 같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기 힘든 고집 같은 것을 부려 가족들을 화나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경우도 많다. 즉 장애가 있음으로 해서 피할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추함과 뒤틀리고 비뚤어진 마음도 장애아만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 선함과 마찬가지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뒤틀리고 비뚤어진 것을 오에 겐자부로는 ‘독나무’라 부른다. 나무는 나무이되 독이 든 나무. 정신장애가 있는 자녀를 키우는 건 독나무를 품고 사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인생의 친척>은 허구이다. 그런데 특히 오에 겐자부로가 쓰는 허구는 지극한 사소설적 경향을 띄고 있는 작품이 많아서 소설 안에 실제 자기 가족의 경험을 담기도 한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히카리와 같은 특수학교에 다니는 친구 어머니인 마리에 여사를 등장시키는데, 이 인물이 실제로 생존했으며 책에 나온 대로 살다가 간 실제 인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독자는 그렇게 믿어도 좋고, 나처럼 틀림없이 허구 인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아마도 허구일 터이지만.

  일본에서 이름이 꽤나 난 ‘나’ K가 구라키 마리에 씨와 친해진 일은 K, Kenzaburo가 도쿄 스키야바시 공원에 제법 큰 텐트를 설치해놓고 단식투쟁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물론 3일을 기한으로 한 단식투쟁이라서 처음부터 죽음을 불사한다는 의미는 없었지만 한국의 젊은 시인을 반공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에 넘겨 사형을 선고해버린 처사에 항의 의사를 이런 방식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정말 있었던 퍼포먼스. 당시 한국의 젊은 시인은 실제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시인 김지하였다. 당시 오에 겐자부로는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일로 사형을 당하는 것보다는 (시를 쓰다 사형을 받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이야기인 것 같은 생각도 들어, 아마도 조금쯤 부러워했을 수도 있겠다. 하여간 이때 구라키 마리에 씨는 재일한국인 청년 세 명과 함께 겐자부로의 텐트에 자원봉사자로 등장해 처음으로 친하게 된 것. 텐트에 들어와 슬그머니 식물성 영양 음료, 걸쭉한 상태로 보아 음료라기보다 죽에 가까운 물질이 오에의 목을 타 넘어가게 만들기도 했단다. 뭐 보통 단식투쟁은 이렇게 하는 거라나?

  당시 K의 맏아들 아카리는 산겐자야 근처 파랑새 장애아 학교 고등부에 다니고 있었고, 마리에의 큰아들 무산은 중등부였는데, 장애 성격이 비슷하고 둘 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 교사가 두 학생과 학부모를 특별히 소개하여 친하게 지냈다. 물론 일본의 경우도 학생과 학부모 할 때의 학부모는 엄마들을 말한다. 무산에게도 동생이 있다. 미치오. 귀엽게 생기고 머리도 총명해 거의 모든 이들로부터 쉽게 친해지고 좋은 인상을 받는 아이.


  이제부터는 무산의 엄마 구라키 마리에에게 집중해야갰다. 소小부르주아의 딸이다. 아버지는 은퇴한 경영자였는데 일찍 죽으면서 마리에에게 상당한 현금성 자산과 이즈 고원에 있는 별장(그리고 다른 부동산 한 건)을 마리에에게 남겼다. 똑똑한 머리에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미국에서 근무하게 되어 뉴욕에 살며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건 아니라서 음악은 포기하고 그것만큼 사랑했던 학문인 영문학을 선택해 특히 <현명한 피>의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를 공부한다. 하필이면 내가 무지하게 싫어하는 작가를.

  마리에는 이혼 여성, 돌싱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 마리에의 이혼이 남편과의 불화나 가정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일종의 탈출의지로 행해진 의사결정으로 보이지 않는다. 평생 천주교에 천착했던 플레너리 오코너. 글쎄 나는 많고 많은 작가 가운데 오코너를 전공했다는 것도 겐자부로가 제시한 한 가지 팁으로 여겼다. 마리에는 무산을 출산한 일을 무엇(절대자?)이 자신에게 속죄를 요구한 일이라 생각했고, 이 속죄를 위한 생활에 애꿎게 남편과 정상아인 미치오까지 끌여들일 필요는 없다고 믿었던 거였다. 물론 이혼을 협의할 때 남편에게 이걸 노골적으로 내밀지는 않았겠지만, 한편으로 황당하게 이혼당하고 있는 남자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 결국 마리에가 무산과 함께 살고, 남편은 귀엽고 공부 잘하고 사교성 있는 미치오를 데리고 나가 집을 얻었다가, 한 여자를 만나 다시 가정을 이루었다.

  말과 뜻은 혼자 무산을 키워보려 했겠지. 무엇을 속죄해야 하는 지도 모르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요코하마에 있는 여자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마리에가 진짜로 혼자 힘만 갖고 무산의 뒷바라지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친정엄마의 보조를 받아야 했는데, 친정엄마가 조금씩 치매 기운을 보이자 전남편과 미치오가 매주는 아니지만 주말에 들러 무산과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당연히 둘째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거겠지. 이렇게 살다가 하루는 미치오가 학교에 가다가, 버스에 올랐는데 평소 미치오를 괴롭히던 중학생이 물론 폭력을 쓰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불쑥 얼굴을 내미는 바람에 미치오가 기겁을 했고, 그래서 버스에서 뛰어내려 앞뒤 가리지 않고 길을 건너다가 정상속도로 운행하던 화물차에 치었다. 미치오의 두뇌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하반신은 영원히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됐고, 새엄마는 그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이제 무산에 이어 미치오, 그리고 혼자 남을 전남편까지 마리에 씨가 온전히 돌봐야 할 그래서 속죄에 대한 보속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살았다. 날 때부터 지체가 있는 무산은 세상 자체가 그렇거니 살 수 있었지만 미치오는 그러지 못했다. 여기에 높은 지능까지 있어서 형인 무산을 세뇌, 혹은 가스라이팅을 했을 것이다. 몇 년의 세월이 필요했겠지. 그러던 어는 날. 아이들이 사라졌다. 힘이 좋은 무산이 미치오의 휠체어를 밀고, 미치오가 밝은 표정으로 행인들에게 기꺼운 친절을 유도하며, 외할아버지가 엄마한테 물려준 이즈 고원의 별장으로 갔다. 이즈 고원은 전형적인 리아스 식 해안.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곧바로 바다로 이어진다. 원래는 무산이 미치오가 탄 휠체어를 전속력으로 밀어 함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어야 했으나, 마지막에 미치오가 휠체어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무산은 휠체어에서 떨어져 양쪽 팔로 귀를 막은 상태로 그대로 돌진, 먼저 벼랑에서 떨어졌는데, 이것을 본 미치오가 자기 힘으로 휠체어를 밀고 앞으로 나가다가 바퀴가 돌인지 나무뿌리인지에 걸려 멈추자, 뉴턴의 2법칙에 의하여 몸을 앞으로 기울여 휠체어와 함께 역시 벼랑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마리에와 전남편 앞에 무엇이 남았을까? 슬픔과 고통이겠지. 자식이 죽으면 부부는 많이 이혼한단다. 슬픔과 고통을 서로에게 쏟아 부어 서로 견딜 수 없어 헤어지고 마는 거겠지. 그러나 이 커플은 그러지 않았다. 아빠는 직장을 때려 치우고 아들의 죽음의 순간을 연상하며 서서히 폐인이 되어갔고, 엄마는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아들들의 빈 곳을 채우려 하지만 그건 애초에 가능하지 않는 일이었다.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아 아들 둘을 자살이라는 형식으로 잃어버린 엄마 마리에 여사의 뒤를 좇는다. 겐자부로 부부와 장애아 부모라는 공통점이 이 모색에 더 타당성을 부여하고.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지식인. 먹물 오에 겐자부로. 이이는 자식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예이츠의 시와 발자크의 소설과 플래너리 오코너의 신앙과, 마리에 여사의 마지막 무대였던 멕시코 시골농장을 거론하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세상 종말 전쟁>까지 인용해야 했다.

  “미국인들은 그다지 좋은 의미로 쓰지 않는 말이지만 naïve한…”

  이 묘사는 오에 겐자부로의 책 가운데 내가 기억하는 것만 세번째 나오는 구절이다. 잘난 척하는 방면에서는 한 치의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 “악마처럼 거만한 오에 겐자부로.” 이건 내가 아마 네번인가 다섯번째로 이 작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당연히 좋은 의미에서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별점 4개는 아깝다. 그렇다고 5개까지는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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