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생한 클라우디아 피녜이로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로 아르헨티나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단다. 그러나 이이의 필모그래피가 2013년 이후로 기록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이후 소설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인기있는 시나리오 작가라면 박스오피스를 위하여 범죄와 스릴, 서스펜스의 유혹을 완전히 떨치기는 힘들 지 않을까 싶다. 이이의 소설 역시 주로 범죄와 미스터리물이 많다고 하는데 오늘 독후감을 쓰는 <엘레나는 알고 있다>도 엘레나의 딸 리타의 사망 사건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아직 중증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수준의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70대로 짐작할 수 있는) 노인 엘레나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행 아침 열 시 기차를 타기 전까지 1부, 기차를 타고 수도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20년 전에 한 번 만나 은혜를 베푼 이사벨의 집에 도착하는 것까지가 2부, 이사벨의 집에서 두 여인이 대화를 나누며 작품 전체의 그림이 완결되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독후감 쓰기가 난처하다. 앞 문단에서 밝혔듯이, 이 작품 역시 한 명의 죽음, 딸 리타가 성당의 종탑 가로대에 종을 칠 때 쓰는 밧줄을 걸고 목을 맨 상태에서 자기가 딛고 선 의자를 발로 차 자살을 해버린 이후의 일을 그렸다. 리타의 엄마이기도 한 엘레나는 자기 딸이 자살할 이유가 없으며, 무엇보다 천둥, 번개를 두려워해 비 오는 날엔 성당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는 것이 큰 버릇이어서 그날 굳이 성당을 찾아 목을 맬 이유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엘레나의 상태를 설명해야겠다. 엘레나는 파킨슨병 환자다. 파킨슨병이기는 한데 손과 발을 경련하지 않는다. 처음엔 이것이 좋은 징조인 줄 알았건만, 경련을 하지 않는 파킨슨병은 병의 진행속도가 경련하는 파킨슨병의 케이스보다 훨씬 더 빠르다고 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붙어 보통의 파킨슨병 환자의 증상에 술에 취한 사람처럼 걷는 실조증, 혈압이 불안정한 자율신경장애, 기억장애, 환시, 심각한 요실금 등을 동반하는 파킨슨플러스에 걸려버린 상태다. 이미 약을 먹지 않으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도, 걸을 수도,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후에 내의를 치킬 수도 없는 단계까지 왔다. 하지만 엘레나는 아무리 불편해도 여전히 살고 싶으며, 그것도 사람답게 대우를 받으며 살고 싶어서 요양병원에 입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자기 집에서 근 50년간 살았던 것처럼, 결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딸 리타와 함께, 말이 함께지 내용상 리타의 보살핌을 받으며, 간혹 딸한테 구박도 받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리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성당에서, 비가 우르릉쾅쾅 내리는 날에 성당까지 가서 목을 매달았다니 이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리타는 천둥과 번개를 두려워했다.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는 굳이 묘사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미 죽은 남편, 리타가 다니던 가톨릭학교에서 교사는 아니고 직원으로 일하던 리타의 아버지가, 성당 종탑 꼭대기에는 피뢰침이 있어서 동네의 거의 모든 번개가 종탑에 떨어지고, 빗물은 굉장히 우량한 전도체라 강한 전기가 성당 마당의 젖은 땅을 타고 흘러 생명체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한 이후로, 리타는 비가 오는 날엔 결코 성당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던 거였다. 그런데도 비가 억수로 오는 날을 골라 성당 종탑에서 목을 맸다니 엘레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던 터였다. 하지만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고, 허리도 기역(ㄱ)자처럼 휜 데다가 목의 근육마저 경직되어 머리도 들지 못해 땅만 바라보고 다녀 늘 침을 흘리는 늙은 환자의 말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리타의 자살 사건을 수사한 형사도, 성당의 주임신부도, 리타가 다니던 가톨릭학교 교장도.
시신 확인을 위해 시체 안치실에 가서 리타를 보니, 리타의 목 주변에 밧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살갗은 자주색으로 변한 데다 올이 풀어진 황마 밧줄에 긁혀 있었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져 있었으며 혀도 빼물고 얼굴도 퉁퉁 부어 오른데다가 몸에는 똥냄새가 심했다. 검시관 말에 의하면 운이 없었다고. 그나마 운이 따라주면 목뼈가 부러져 곧장 숨이 끊어지는데 리타는 목뼈가 버티는 바람에 질식으로 천천히(고통스럽게) 죽었을 거라 한다. 목을 매고 질식으로 죽는 사람들은 보통 발작을 일으키다가 똥을 누는 바람에 시신에서 냄새가 심하다면서. 리타의 주검을 보며 엘레나는 리타가 결코 자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누군가 리타를 비가 오는 밤에 성당 종탑까지 유인해 목을 걸어 자살로 위장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엘레나가 그렇게 확실하게 믿고 있지만 심각한 파킨슨병 때문에 운신을 할 수 없어 20년 전에 리타와 엘레나에게 큰 신세를 진 이사벨을 찾아가 그이에게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결심한 거였다.
20년 전인 1981년, 그때는 엘레나도 파킨슨병 이전이라 신체 건강한 시절이었는데, 리타가 출근하는 길에 평소 경멸해 마지않는 산파의 집 근처에서 땅바닥에 앉아 구토를 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이사벨을 발견했다. 이사벨은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구토를 하고 또 구토를 하는 것이 한눈에 봐도 심한 입덧이었다. 시간에 맞춰 학업 시작 종을 쳐야 하는 리타는 그런 이사벨을 두고 직장인 가톨릭학교로 바삐 갈 수 없었다. 이사벨이 입구에 막 도착한 산파의 집에서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 보다는 아이를 지우기 위해 찾는 여자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리타는 이사벨에게 다가가 몸을 닦아주고, 위로해주다가 어떻게 이사벨의 손에 든 메모를 보았는데, 산파의 이름 ‘올가’와 집 주소를 적은 것이었다. 단번에 임신중단을 위해 산파의 집에 온 것을 알아차린 리타는 이사벨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안 돼요. 절대 하지 말아요. 후회하게 될 테니까. 그건 대죄예요. 당신의 아이를 생각해봐요. 지금 당신의 몸 속에는 생명이 꿈틀대고 있어요. 어린 생명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면 당신도 생각이 바뀔 거예요. 당신도 그 아이를 원하게 될 거라고요. 절대로 아이를 죽이지 말아요. 안 그러면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보내게 될 거예요. 수술을 한 이들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해요. 낙태 당한 아기들이 여자들 머릿속에서 계속 운다고요.
리타는 이때 이사벨의 약지에 낀 반지를 발견한다. 결혼한 유부녀였던 거고, 남편과 상의하지 않고 낙태를 위해 수도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까지 온 거였다. 리타는 이사벨을 거의 반강제로 자기 집으로 데려왔고, 엘레나와 함께 이사벨을 다시 추슬러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사벨 부부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런 적이 있었다. 이후 엘레나는 딸 훌리에타를 낳아 이제 벌써 열아홉 살이 되었다. 엘레나도 알고 있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부부와 훌리에타, 이렇게 셋이 웃으며 찍은 사진을 동봉한 연하장을 보내왔으니. 결국 엘레나 모녀가 훌리에타라고 하는 큰 축복을 이 부부에게 베푼 것이니, 리타의 억울한 죽음을 엘레나 대신 해결해달라고 하는 것이 어찌 빚을 갚는 일이 아닐 수 있을까?
그리하여 이날, 21세기 초입의 어느 날, 엘레나는 힘겹게 일어나 허리와 목을 펼 수 없기 때문에 극도로 어려운 일인 처방약 레보도파를 물과 함께 삼키고, 그나마 말을 잘 듣는 오른발을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 들어 올려 허공에 내디디면서 왼발을 어느 정도 지났다 싶으면 거기에 발을 내려 놓는다. 그리고 이번엔 왼발을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 들어 올리면서… 짧은 장편소설 한 권의 시간적 배경이 될 하루를 시작한다.
이 작품이 우리나라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함께 2022년 부커-인터내셔널 상의 최종 심사까지 올라 <저주토끼>와 나란히 미역국을 먹었다. 며칠 전에 읽은 예니 에르펜베크도 <카이로스>도,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불가리아어로 쓴 <타임 셸터>도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는데, 부커-인터내셔널 상은 영어로 번역한 외국소설, 즉 비영어소설의 영어 번역 책에 주는 상이다. 이런 경우에, 예를 들어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엘레나는 알고 있다>를 스페인-한국어 번역으로 읽어야 할까, 스페인-영국-한국어 번역으로 읽어야 할까? 큰 문제는 아니지만 궁금하다.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역본은 원본과 달라도 너무 달라 차라리 다른 작품일 정도라고 한 소설가(든가 평론가)가 기고한 글을 읽은 이후에 좀 헛갈린다.
아울러, 이 책은 상당한 수준의 페미니즘 소설이다. 범죄,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어울릴 정도이다. 위에 쓴 전반적 스토리는 피녜이로 특유의 범죄-추리 기법 상 결론을 말할 수 없어 이 책이 왜 페미니즘 소설인지 말할 수 없었을 뿐이다. 다만 책 좀 읽는 독자는 1부와 2부를 읽는 동안 결말을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결말 부근까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좀 아쉽다. 그래도 대단한 반전이 도사리고 있는 결말일 터이니 이 책을 선택하는데 주저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스토리를 더 소개하는 건 좋지 않다. 즐기시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