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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나보코프는 많이 읽은 줄 알았다. 근데 세어보니까 얼마 안 된다. <롤리타>, <재능>, <사형장의로의 초대>, <절망>, <창백한 불꽃>, <프닌>. 이렇게 장편소설 여섯 작품밖에 읽어보지 않았다. 근데도 무척, 꽤 읽은 듯한 기분이다. 아마 읽으면서 골치 깨나 썩이지 않은 책이 한 권도 없어서, 읽다가 갑자기 오리무중의 벌판을 더듬으며 가는 느낌이 들어, 읽다가, 읽다가 다시 저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은 경험이 많아, 나부코프, 하면 아예 지긋지긋했던 기억이 먼저 떠올라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근데 문제는, 이렇게 골치를 썩이면서도 읽을 때마다 색다른 재미를 발견한, 내게는 특별한 작가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골치 썩이면 썩일수록 엑스터시를 느끼는 피학적 취향은 없다. 나보코프를 고생고생하며 읽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고나서, 거참 특별한 경험이었네, 이 비슷한 각성, 각성? 맞아, 각성 비슷한 희한한 경험을 갖게 한 듯하다. 참 별난 작가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은, 이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영어로 쓴 첫번째 작품인데, 책을 읽는 내내 이 책 읽기 이전에 어디서 좀 본 듯한 기분이 자꾸 들어서, 나보코프를 읽을 때 거의 예외 없이 탁, 꽂히는 특유의 색이랄까, 맛이랄까, 아니면 멋이랄까, 하는 기분이 좀 덜 든다. 그건 작품의 구성이 화자 V가 자신의 죽은 이복형 서배스천 나이트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생전에 관계했던 사람들과 사랑했던 여자 등을 추적하는 구성이라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좀 흔한 플롯, 맞지?
서배스천 나이트와 그의 동생 V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
젊은 근위병이었던 서배스천과 V의 공동 아버지는 1890년대 초에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여우사냥 행사에서 아름다운 버지니아 나이트 양을 만나 순식간에 사랑의 화염을 불살랐다. 버지니아는 재산 깨나 있는 영국 신사 에드워드 나이트 씨의 딸로 근위병 장교이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위를 마땅하지 않게 여겼다. 장서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혼을 했고, 1899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옛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맏아들 서배스천을 낳았다. 아버지는 1904년부터 05년까지 있었던 러일전쟁 이후에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내 작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 때는 버지니아와 갈라선 이후였다. 첫 아내 버지니아 나이트는 좀 이상하고 경박한 여자여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즉각 남편과 아들 서배스천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이때 네 살배기 첫 아이는 파리의 한 호텔에서 유모의 형편없는 보살핌을 받고 있었는 데도.
그럼 계산을 해보자. 서배스천이 1899년 말일, 그러니까 지난 세기의 마지막 날 출생한 러시아인. 아버지는 1904년에 첫 아내에게 버림을 받은 다음해인 1905년 이후에 군인으로 성공을 해서, 1905년에 재혼을 하고 1906년에 둘째 아들 V가 태어난다. 맏아들과 이복동생 사이에 뭔가 있다. 한 세기가 바뀐 일이다. 서배스천은 생모 버지니아에게 침대차와 유럽횡단 급행열차에 대한 거의 낭만적일 정도의 기이한 열정을 물려 받았는데, 오랜 세월 유럽 국가가 되기를 갈망했던 반쯤 유럽국가이며 2등 유럽국가인 러시아인에서 간혹 볼 수 있는 탈 러시아를 실행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역시 돈이다. 서배스천의 외할아버지 에드워드 나이트 씨에게 버지니아가 무남독녀의 외동딸이라 그가 죽을 때 모든 재산을 전부 외동딸 버지니아에게 상속했고, 버지니아마저 일찍 죽어 그게 또 몽땅 서배스천에게 넘어왔던 거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서배스천은, 마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처럼, 부르주아 러시아 가정의 영적인 우아함과 기품에 유럽문화의 가장 훌륭한 유산이 결합되어 지적으로 세련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문학적으로 매우 특출해 16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모든 시는 나중에 거의 폐기했지만, 각 시의 밑에 서명은 잉크로 그린 조그만 검은 색 체스 말 나이트Knight를 그렸다. 1912년 말에 아버지가 결투하다가 가슴에 총상을 입어 이후 회복하다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1913년에 숨을 거두었는데, 훌륭한 군인이자 유머러스하고 활기찬 모험가 기질의 아버지의 성향까지, 모든 좋은 것들을 물려받은 서배스천은 나이가 차자마자 계모와 이복동생 V를 떠나 어머니의 나라 잉글랜드로 가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시인, 소설가로 조금씩 이름을 내기 시작한다.
근데 그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건, 1912년에 팔친이라는 경박한 남자가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첫번째 아내 버지니아에 대한 소문,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여간 헛소문인 것이 틀림없는 이야기를 쓸데없이 퍼뜨리고 다녔다. 이 소문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팔친을 찾아가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다. 피가 솟는 근위병 장교는 시절이 1912년 말, 이미 러시아에서 결투라는 단어가 사라졌건만, 자기 대리인을 보내 권총으로 결투하기로 정했다가, 그렇게 추운 날 아침, 눈 쌓인 숲 초입에서 가슴에 총알이 박혀 얼굴을 눈 속에 파묻은 채 쓰러져 버렸다. 자기 엄마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것이 틀림없으니 아무리 자기한테 잘 하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계모라도 낯짝이 있지 다 커서 성인이 된 다음에도 같이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 그래, 잘 떠났다.
그러나, 십대 시절까지 러시아에서 러시아 말을 쓰던 서배스천이 영국으로 가서, 영어를 쓰는 시인, 소설가를 하자니 이게 쉽겠느냐고. 아무리 엄마가 영국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서배스천의 영어 속에 든 러시아 억양과 자모음 발음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을 터. 이렇게 지우려 해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는 러시아인의 흔적을 버리지 못한 채 서배스천은 작가 생활을 유지하고, 책을 몇 권 내고, 당연히 젊었으니 풋사랑도 하고, 연애도 하고, 진짜 사랑을 했다고 믿었으나 상대방은 심각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이거 미리 이야기하면 안 좋은데 이왕 썼으니 지우지도 못하겠고, 하여간 그래서 좀 묘한 사랑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
서배스천의 생모 버지니아 나이트는 1904년에 남편과 아들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가면서 저절로 혼인관계를 청산하고, 1908년에 다시 나타나 자기 동서, 그러니까 서배스천의 계모이자 V의 생모에게 서배스천을 만나게 해달라고 무뚝뚝한 편지를 보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호텔 객실에서 아들과 서먹서먹한 상봉을 하고 돌아가더니, 다음해인 1909년 여름에 남프랑스 로크브륀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심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희귀 유전질환인 레만병으로 죽어, 시신을 런던으로 옮겨 장례식을 하고 매장했다. 그러니 세바스찬 역시 많지 않은 나이에 정확한 병명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심장병으로 거의 급사 수준으로 세상을 뜨는데, 이게 거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거라 더 이상은 말하지 못하겠다.
하여간 나보코프는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서배스천 나이트가 자기와 거의 비슷한 처지, 즉 러시아에서 낳고 십대까지 보낸 작가가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을 써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보코프가 태어난 해이며, 작중 서배스천이 출생한 1899년이라는 해도 한 세기를 마감하여 마지막 19세기 인간으로, 결국 평생을 20세기에 살면서도 19세기 사람일 수밖에 없는, 1899년, 아니면 1890년대 사람이 아니라면 수긍은 하되 그리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태도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즉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세대차이를 전제로 살아야 하는 팔자라면 말이 되나? 하여간 그런 생각도 들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읽기에, 초반에는 V. 나보코프답게 배 다른 형제와, 전처에 대한 헛소문 때문에 결투를 벌인 (다른 병과도 아니고) 근위병 장교 아버지의 가슴에 박힌 총알이라든지, 하여튼 참 나보코프다운 입심에 감탄을 하며 읽다가, 본격적으로 V가 서배스천의 과거를 탐색하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피시식, 또는 푸시식, 열기가 식어가면서, 나보코프의 문장들도 급속하게 사변적으로 변해버린다. (물론 많이, 많이 다르지만) 마치 마르셀을 읽는 것 같은 기분, 마르셀은 소음을 없애기 위해 코르크로 벽을 둘러친 방에 누워 세상 만물과 만인과 한 명의 탄압받는 유대인 장교에 관해 사색을 했지만, 서배스천의 행적을 찾는 V는 오직 한 인간, 사실 많은 부분이 나보코프 자신이겠지만, 서배스천에 관한 사색과 추측과 명상적 추적을 벌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 잡는다. 마르셀이 그러했듯이. 그나마 분량이 적어 다행이지 아주 골로 갈 뻔했다. 본문이 겨우 240쪽까지. 다른 책보다 시간을 두 배는 더 썼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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