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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목련정전
  • 최은미
  • 13,500원 (10%750)
  • 2015-10-15
  • : 1,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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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강원도 인제 출생. 내 처 할아버지가 인제에서 면장을 해 자셨는데 어디인고 하면, 지금은 소양강 댐에 수몰된 남면이라 소위 잃어버린 고향이다. 그래도 처갓집 사람들은 인제출신이라 하면 쌍수를 들고 반가워하며 한바탕 주민등록과 가족관계 증명에 관해 침을 튀어야 나머지 정상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하여간, 어쨌든 반갑다는 말이다. 나는 인제 버스터미널 뒷골목 막국수 집 돼지 수육과 막국수가 내가 먹어본 모든 수육, 막국수 가운데 최고로 친다. 아직 하는지, 벌써 접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그게 언제야, 20년은 확실하게 넘은 이야기이니. 춘천에서는 장미촌 옆에 있던 전통의 실비 막국수와 요즘엔 뻘건 양념 안 올린 부안 막국수집이 괜찮았고. 웃긴다. 인제 출생, 터미널 막국수집, 막국수 하면 춘천. 이게 뭐라고? 의식의 흐름? 그래. 그까짓 것 아무거나 흐르기만 하면 되는 거다.

  1978년생이니 외환위기로 나라 전반에 마른 수건까지 쥐어짜던 시절에 정말 우울한 20대를 지낸다. 와중에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등 재난까지 골고루 목격하고, 심지어 노무현의 대미 자유무역협상과 이에 따른 후속조치인 이명박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느라 촛불까지 켠 시대를 고스란히 보내는 와중에 2008년이 와서 서른살이 되었고 단편소설 <울고 간다>가 현대문학 신인상에 덜컥 당선을 하여 등단을 한 최은미. 최은미에게 서른살은 작가로서의 복이 터지는 기점이었나 보다. 2014년에 (큰 돈은 아니지만)대산창작기금 받고, 2014년과 15년에 젊은작가상, 2017년에 또 젊은작가상, 2018년에 대산문학상, 2021년에 현대문학상, 같은 2021년에 한국일보문학상까지 수집했다. 햐. 이거. 준다는 거 안 받을 수도 없고, 그러다보니 다른 작가는 평생 하나 받을까 말까 하는 이들이 쌔고 쌨는데 혼자만 줄창, 거의 해마다 굵직한 상을 받으니 좀 미안한 감도 들고 그러면서 또 글을 쓰겠지.

  이 책 《목련정전目連正傳》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간 각 문예지에 발표한 것을 2015년에 모아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결실이다. 모두 아홉 편의 단편소설을 실었다.


  이제 눈이 그리 좋지 않아 <지위 게임>의 책등spine을 <자위 게임>으로 읽어 인간의 정치와 도덕적 신념 체계 구축이 자위행위와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을까 잠깐이지만 정말로 고민해본 적이 있을 정도라서 《목련정전》이라 한글로 제목 쓰고 바로 아래 작은 글씨로 한자어 目連正傳를 붙인 걸 까무룩 보지 못해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목련 꽃 그늘 아래”와 관련된 아주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작품의 모음집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되게 흔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최은미라는 작가를 기억하고 있어서 선뜻 골랐는데, 아오, 최은미보다 약간 아래 젊은 작가들과의 사이에 굵고 검은 선으로 줄을 긋고 “여기는 내 땅” 하면서 확실하게 자기 영역을 만든 작가였다. 그래서 반가웠다. 비록 내 스타일하고는 맞지 않아서 앞으로 자주 찾아 읽지는 않을 것 같지만, 다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해서, 언젠가 한 번 말했듯, 한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씨 다른 형제 자매 같은 등단 동기/동문들하고 차별되는 개성을 가진 작가인 것이 좋았다. 내 취향이 아닌 것이 아쉬웠다.

  굳이 스타일을 표현하자면, <피로 물든 방>, <매직 토이숍> 그리고 <써커스의 밤>을 쓴 앤젤러 카터 족族으로 나눌 수 있겠으나, 카터와는 동서양과 활동 세기century가 다른 만큼 가까운 친족으로 보기는 힘들다. 같은 DNA를 상당한 부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

  한 때는 나도 앤절라 카터 그룹에 가입한 것을 자축하고는 했건만, 카터의 책을 읽고나서 벌써 4년 가까이 됐고, 그동안 새로운 작품 번역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아 연속성이 끊어져 그랬는지 이제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공포스럽고 조금은 엽기 그로테스크 정도만 생각날 뿐 스토리는 싹 증발되어 버렸다. 물론 나는 그걸 방지하기 위해 지금처럼 독후감을 쓰는데, 앤절라 카터를 읽지 않고도 책 읽는 걸 포함해 일상생활에 별로 불편함이 없이 지내니 그걸로 됐지, 구태야 다시 카터 독후감을 꺼내 확인할 필요까지 느끼지는 않는다.


  최은미는, 흠, 엽기다. 진짜 엽기. 마치 우화 속의 괴물이나 유령 또는 산 사람들의 악의가 한데 뭉쳐 만들어 생명을 얻은 집단 친절. 악의가 뭉쳐 친절을 만들었다고? 그렇다. 훗날 더 큰 복수를 위하여. 유럽 고딕 소설의 경우엔 이런 비정상을 위하여 중요 등장인물의 외모에 특이점, 예를 들어 키가 무척 큰 여자 아이, 난폭하다고 이름이 난 기사 같은 인간들을 무대에 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최은미도 간혹 그렇기는 하지만 굳이 특징으로 보이는 수준은 아니고 그들이 주인공도 아닐 경우도 많다.

  두 번째 실린 <라라네>의 주인공 라라는 키 110센티미터에 몸무게 17킬로그램, 분홍 파자마 차림에 맨발이며 금발머리 마른 인형을 안고 있다. 집이 아니라 바깥에서. 즉 도망간 거다. 라라의 머리카락 길이는 50센티미터 정도여서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져 있지만, 아뿔싸, 옆통수 쪽을 엄마가 가위로 난도질을 해놓아 쥐가 파먹은 것처럼 보인다. 라라는 유치원에 다니니까 만 다섯살 (그러니까 이 소설책이 나올 때는 여섯 살이라고 부르던) 정도 되겠다. 집에 엄마, 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엄마가 함께 살던 전남편은 술만 마시면 강아지로 돌변해 처자식과 가재도구를 두드려 망가뜨리는 데 선수여서 깨끗하게 이혼해버리고, 이후 너무너무 자유스러워진 엄마는 이후 마흔살이 될 때까지 총 네 명의 남자와 약 320번의 섹스를 즐기며 살았는데, 다섯번째 남자와의 섹스에서 결정적으로 피임에 실패해 라라를 낳고, 일년에 두 번씩 다섯번째 남자의 조상을 위하여 조기와 산적을 굽고 전을 부치는 신세로 바뀌면서 몸도 퍼지기 시작했다. 엄마 이름은 전나경. 전남편 사이의 딸이자 사실 이 집안을 안에서 꾸리는 유리는 휴대전화에 엄마는 이름이나 ‘엄마’라는 명칭 대신 “전나”라고 써 놓았다. 전나 재수없어서. 집안 일도 나 몰라라 하고 대낮에 해가 뜨도록 “전나 쳐 자서.”

  씨 다른 동생 라라를 아침 먹이고, 이 닦이고, 세수 씻기고, 머리 빗긴 다음에 손잡고 유치원 셔틀에 태워 보내고, 오후에 시간 맞춰 셔틀 오기 전에 기다렸다가 집에 데리고 와, 손 씻기고, 밥 먹이고, 노는 거 보고, 같이 놀기도 했다가, 저녁 먹이고, 재우면 그게 언니 보다는 엄마-언니에 가깝지 않겠어? 고등학교 다니다가 고등학교부터 이게 도무지 인간 사는 집단 같지 않아 때려 치운 데다가, 라라하고 나이 차이가 무척 나니까, 유치원 학부모, 요새 학부모가 어딨어 다 학모지, 학모. 학모들이 엄마야? 아이고 그럼 몇 살에 임신해서 몇 살에 난 거야? 넘 그렇다. 뭐 이런 수다를 떠는 것도 다 알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만큼 애늙은이가 된 지도 오래다. 그런 거 다 반응하면 제 명대로 못 산다는 것쯤 벌써 통달한 유리. 근데 언젠간 유리는 깨지지 않나?

  이런 라라는 한 편으로 도시빈민이기도 하고, 엄마한테 정이 떨어져 집 짓는 일로 될 수 있으면 먼 지방으로 오래 걸리는 작업판만 쫓아다니는 라라의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지만, 늘 라라 곁에 있는 게 아니라서 그리 도움이 되지 않고, 엄마는 제쳐놓고 생각해야 마땅한 마당에 그나마 믿을 건 언니 하나인데 아무리 언니라도 한 다리 건너 언니면 아이가 바라는 엄마급 애정을 줄 수는 없는 법. 그래서 라라는 늘 애정에 굶주려 있기도 하다.

  근데 라라의 유치원에 머릿니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라라도 유치원에서 머릿니를 옮아와 만날 유리와 유리 친구 도미가 라라의 머릿니 구제를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어디 그게 쉽나. 게다가 어린시절부터 주로 인형을 갖고 놀기 좋아한 라라가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머리카락이 길고 긴 라푼젤이었던 만큼 자신의 긴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빽빽 울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 라라는 당연히 유치원에서 왕따를 당했고, 그래도 인형 비슷한 캐릭터에 정을 주며 꿋꿋할 수 있었는데, 인형만 가지고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는지, 언제부터인가 책상 모서리나 의자 가로대 같은 것으로 자기 다리 사이를 마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끔 조금씩 이후 점점 자주, 그러다가 지금은 아이들이 다 보는 데서도 자주.

  머릿니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모른 척하던 엄마는 라라가 유아 자위에 몰두한다는 유치원 선생의 전화를 받고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올라, 너 벌써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래? 결국 일찌감치 남자 만나서 아무렇게나 아이 낳고 나처럼 살게 되는 거야! 집에 딱 하나 있는 재봉가위를 찾아 날 선 가위날을 라라 얼굴에 대고는, 전나 무섭게, 유리더러 라라의 몸을 누르고 있으라 해놓고 썩둑썩둑 라라의 오른쪽 옆통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어찌어찌 엄마의 전나 겁나는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던 라라는 맨발로 꼭대기층 빌라에서 뛰어내려 그길로 사라져버리고, 라라를 쫓아 내려간 씨 다른 언니 유리는 동네에 보이는 사람한테 마다 외친다:

  키 110센티미어, 몸무게 17킬로그램. 분홍 파자마에 맨발이예요. 이름은 라라고요, 못 보셨어요?”


  이 <라라네>가 그래도 좀 순한 맛이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죽어 지옥에 떨어진 엄마를 기어이 천국으로 올려보낸 목련目連을 비유한 현대물 <목련정전>은 불교적 의식을 오늘에 되살려 현대인의 집요한 복수 집념을 우화적으로 쓴 표제작이다.

  목련, 목련木蓮꽃 할 때의 목련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 138, 139번으로 낸 <목련구모권선희문目連救母勸善戱文>을 참고하시는 것이 좋겠다. 2025년에 출간한 따끈따끈한 책이다. 재미는 없다니까 알아서들 하시고.

  최은미는 나하고 맞지 않아서 비록 나는 높은 별점을 주지 못하겠지만, 이이와 합이 맞는 독자들은 기꺼이 최은미 클럽을 개설할 정도로 자기만의 영토를 지니고 있다. 앞으로 나는 최은미의 땅을 기웃거리는 수준이겠지만, 진심으로 바라노니, 앞으로도 번창하시라. 번창하기 바란다.




다만, 아쉽게도 내 취향과 워낙 거리가 있어서 별점을 셋밖에 주지 못했다. 내가 불민한 탓이니 작가나 팬을 비롯한 주위 분들의 양해를 바라마지 않는다. (흠. 내가 점점 소심해지고 있군. 그래도 얻어 터지는 거보다는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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