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랠프 왈도 엘리슨은 1913년 3.1절날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태어났는데, 아빠 루이스 앨프리드 엘리슨이 당시 흑인답지 않게 소설 읽기를 즐겨하는 바람에 당시 유명 소설가 랠프 왈도 에머슨의 이름을 따 둘째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아버지는 랠프가 세 살 때 사고로 죽고, 1920년대 들어 인디애나주로 이사한 앨리슨 가족은 20년대 흑인 가정답게 고생깨나 했으며, 랠프 엘리슨 역시 버스 차장, 구두닦이, 호텔 보이, 치과 보조원 같은 일을 섭렵하면서도 열공, 닥공을 감행해 “미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가 되었고, 조각가이자 음악가이자 문학 교수로서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역자 해설)
1936년에 뉴욕으로 옮긴 20대의 엘리슨은 긴 세월동안 복잡한 관계를 맺은 리처드 라이트와 인연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쪽으로 가도 괜찮은 밥벌이를 할 정도의 실력이었던 음악, 조각과 조금, 많이는 아니고 조금 멀어지기 시작한다. 리처드 라이트가 누군가. 미국 흑인 문학의 1세대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 <미국의 아들>에서처럼 라이트의 작품은 폭력도 한 방법이라며 흑인의 저항성을 중요한 흑인 문학적 요소로 생각한다. 반면에 엘리슨은 저항보다는 백인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폭력이나 차별을 그대로, 물론 문학적 시각으로 보여주려 한다. 이런 방법상 문제로 라이트하고 관계가 복잡해진다는 뜻이다. 정치적으로 라이트는 공산주의에 적극적이어서 공산당에 입당했고, 엘리슨은 입당해서 당 내 일을 하기도 했지만 조용한 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소비에트가 아프리칸 미국인을 배신했다고 판단해 이에 대한 반발로 엘리슨은 미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게 할 <보이지 않는 인간>을 썼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인간>은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의 190번과 191번으로 짧지 않은 품절기간 동안 그걸 읽어보려고 동네 헌책방을 기웃거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 작품이 미국 공산주의, 라기 보다는 미국 노동조합에 들어가 열성적으로 일하며 인정받지만 결국 드러나지 않는 차별을 발견하는 흑인 이야기이다. 요즘 자주 사용하는 말 “투명인간 취급” 당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참전을 결정한 미국의 군대에 지원한 랠프 엘리슨.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흑인도 전투에 참가했다는 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입대한 흑인병사한테 미국과 미군은 총기를 지급하는 걸 꺼려했다, 라는 증거가 많다. 주로 태평양 전쟁에 배치된 흑인 병사들은 일본군과 직접 싸우는 것보다 보급품 하역 같은 힘을 쓰는 일에 많이 투입되었다. 랠프 엘리슨 역시 신체검사 결과 1A 급을 받아 당연히 징집될 줄 알았는데 전쟁터가 아닌 미국 상선에 입대해 국제화물과 승객관리 일만 잠깐 하다 왔다. 여전히 미국은, 버스 안에서 덩치 우람하고 알통이 울퉁불퉁한 젊은 백인 남자가 서 있는데 재수없고 기분 나쁘게 임신한 흑인 여자가 좌석에 앉아 있다는 이유로 겁나게 두드려 패던 시기였다. 이러니 보이지 않는 인간이 어디 한 둘이었겠어? <보이지 않는 인간>을 출간한 1952년에도 미국은 이하동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은 1953년에 전미 도서상과 전미 신문제작자 협회가 주는 러스웜 상을 받았으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상징”의 자격으로 시카고 디펜더 상을 받는 큰 영예를 얻었다. 이게 랠프 엘리슨한테 크고 큰 부담으로 작용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리처드 라이트나 제임스 볼드윈처럼 투쟁적이지 않고 문학 자체에 중점을 둔 엘리슨한테는 소설작업이 차별적인 세상에 대항하는 무기가 아니라 성취해야 할 지향점이었기 때문에 전작 <보이지 않는 인간>을 능가하지 못하는 작품이라면 차마 발표하기를 꺼려했던 결벽증 비슷한 증세였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이후에 장편소설 한 편도 완성하지 못한 채 죽는다. 책 뒤의 작가 연표를 보면 1999년에 “존 F. 캘러헌이 랠프 엘리슨의 두 번째 장편소설 『준틴스(Juneteenth)』를 편집하여 출간했다.”라고 나오는 바, 결국 엘리슨의 미완성 유고, 쓰던 중에 죽어서 미완성이 아니라, 쓰다가 만 작품을 편집해서 출간했다는 말이다.
이 소설집 《집으로 날아가다》도 초판 출간이 1996년이다. 이 책도 “유고 단편집”이라고 표현했는데, 194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잡지에 발표했던 것도 있고, 쓰기는 했지만 발표하지 않고 책상 서랍에 꿍쳐 두었던 것을 새로 실은 것도 있다. 당연히 어디다 싣지 않고 보관만 했던 것은 잡지 발표작보다, 기분상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덜 좋다. 딱 한 편 빼고. 맨 앞에 실린 <광장의 파티>. 이 단편은 화자 ‘나’가 백인 소년이다. 찬 겨울비가 내리는 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에드 삼촌의 집에 오더니 광장에서 파티가 열린다고 소리쳤고, 삼촌은 나더러 함께 가서 보자고 불러 소슬소슬한 비를 맞으며 광장까지 뛰어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광장에 가서 보니까, 보잘것없는 모닥불 앞에 검둥이 청년이 웃옷을 벗은 채 불을 쬐고 있었으며, 청년을 둘러싼 백인 남자들이 욕설과 악담을 퍼부었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크게 바람이 불어 전신주가 부러지면서 전선이 끊겨 바닥에 닿았고, 젖은 땅을 따라 고압의 전류가 운이 좋지 않은 백인 여성의 발을 타고 전신을 관통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흑인 청년한테 휘발유를 쏟아 붓고 그냥 불을 붙여버렸다. 다중의 백인들이 흑인 한 명을 불태워 죽이는 현장. 이것을 광장에서 벌이는 파티라고 한 거다. 평소 같으면 백인과 흑인이 거의 같은 수로 시간을 보내는 평화로운 광장. 그러나 이런 미친 테러를 규탄하거나 막고자 하는 흑인은 이 시간에 광장에서는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머지 작품들도 좋다. 위에서 말한 “덜 좋았다” 하는 것은 랠프 엘리슨 치고 좀 덜 좋았다는 뜻이지 품질이 처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거의 같은 주제로 쓴 단편 열넷을 재미있게 읽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수없이 얘기한 바와 같이 뭐? 맞다. 꽃노래도 삼세번. 그런데 비슷한 열네 작품을 한꺼번에, 앉은 자리에서 읽어보시라. 엉덩이 배기는 건 다음 문제고 눈알 쏟아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