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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8월은 악마의 달
  • 에드나 오브라이언
  • 13,500원 (10%750)
  • 2024-10-18
  • : 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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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말엔 특히 아일랜드 작가의 책을 많이 읽는다. 에드나 오브라이언에서 시작해 북아일랜드 출신의 애나 번스, 다시 남 아일랜드의 클레어 키건과 또다시 에드나 오브라이언. 1주에 한 권은 아일랜드 작가가 쓴 책을 읽은 셈이다. 오브라이언은 1930년에 태어나 2024년 올해 여름에 별세했다. 천수를 다 했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듯. 생일이 지나지 않아 93세까지 살았는데, 요즘엔 90 넘게 사는 노인들이 많아 예전같이 호호 할머니 모습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오브라이언도 그러했기를 바란다.

  젊은 시절에 나는, 이가 다 빠져 볼이 홀쭉하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를 보면서, 이 할머니도 몇 십 년 전에는 불꽃 같은 사랑을 했고, 질투에 휩싸여 하늘이 무너지는 저주도 했을 터이고, 팽팽한 몸으로 밤을 세워 관능의 어지럼증도 숱하게 겪었겠지, 이런 건 추측도 해보지 못한 거 같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지. 늙은 적이 없었던 젊음의 자연스럽고 그래서 당연한 오만이었으리라.


Edna O'Brien


  <8월은 악마의 달>이 출간된 해가 1965년. 이이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사랑도 해보고, 결혼도 해보고, 당연히 출산도 해보았지만, 그러기 위하여 마땅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질투, 다툼, 기다림, 안타까움, 욕지기 같은 고통도 모두 겪어보았을 것이다. 이것들을 통해 인생과 문학은 바야흐로 전성기를 향해 극적인 도약을 할 시기. 앞으로 자기 앞에 60년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조금도 염두에 두고 싶지 않은 시절. 하지만 당시 교조적 가톨릭이 기성계급과 시민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어서, 오브라이언은 이미 몇 년 전에 발표한 소녀 삼부작 <시골 소녀들>, <외로운 소녀> 그리고 <행복한 신부가 된 소녀들>이 아일랜드 땅에서는 판매 및 출판 금지의 금서 딱지를 받게 된 것처럼, <8월은 악마의 달> 역시 판매 및 출판 금지 도서 목록에 제목을 올린다. 성애 묘사와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신성? 한자어로 써서 神聖을 모독했다고? 한 세대 후의 작가 클레어 키건에 비하면 이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경건할 수준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성애 묘사 역시 요즘엔 중학생들조차 심심해서 안 읽어볼 지도 모르겠다. 다 그런 거지 뭐. 세상이 바뀐 걸. 근데 올해 여름까지 살아 있었으니 60년 전에 자신이 당했던 금서 조치를 떠올리면서 얼마나 웃었겠어? 아흔다섯 살 할머니를 보면서 저 할머니가 당시에 성애 묘사의 달인이었으리라, 짐작이라도 할 젊은이들 있으면 세 명만 거수해보실까요?


  “엘런은 그가 자기 안에서 꽃줄기처럼 굳고 길어지는 것을 느꼈다. 부드럽고 또 단단하게. 그는 그 어떤 남자도 해내지 못한 방식으로 엘런을 사랑해 주었다. 남편조차, 엘런을 갈기갈기 찢어 갈망과 사랑과 고통과 후회의 순환 속으로 몰아넣은 남편조차 해내지 못한 방식으로, 그런 종류의 사랑은 결국 허망할 뿐이니까. (p.27~28)


  이 정도가 높은 수위의 베드씬이다. 조금 더 높은 수위도 있기는 하다. 이렇게 엘런은 이제 두번째 만난 휴 휘슬러와 밤을 보냈고,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엑스터시를 맛보았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로 순결을 벗은, 기념할 만한 8월이었다. 여성의 ‘진정한 처녀성’은 첫경험이 아닌 ‘첫 오르가슴’이라고, 그래서 아이 셋 낳은 마흔 살 아주머니도 그제서야 순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라고 1989년 충청북도 충주시 민방위 교육 강사가 충주시 여성회관에서 주장했다. 꽤 그럴 듯해 아직 기억하고 있다. 조금 비껴 말하면 엘런의 남편은 아내에게 아들 마크를 주었을 지는 몰라도 엘런의 처녀성을 없애 주지는 못했고, 앞으로 다른 여성을 만나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는 말. 세상의 많은 남자는 자기도 모르는 새 한 여성의 처녀성도 삭제하지 못하고 생을 마친다는 거다. 흠. 내 아내도 손주가 둘이나 있는 할망구인데 혹시 아직 처녀 아녀? 은근히 켕기네 이거….

  이런 얘기하니까 재미있네. 말 나온 김에.

  위에서 인용한 건, 딱 저 부분만 따와서 그렇지, 사실 앞 뒤 사정을 더 알면 훨씬 더 에로틱하다. 아무리 보수적인 아일랜드 문화계라도 저 정도로 설마 판매 금지를 때렸겠는가. 그런데 사실 보고 듣는 사람을 가장 애태우고 갈급하게 만드는 건 포르노 필름이나 동영상도 아니고 애니메이션도 아니다. 물론 내 경우에 그렇다는 건데 야설보다 조금 소프트한 에로틱한 은유의 문자들. 동영상은 이미 시청각으로 보는 사람에게 제공할 건 다 제공해서 뇌가 더 활동할 여지를 주지 않아서 다 그게 그거인 반면에, 문자로 쓴 에로틱한 묘사는, 읽으면서 등장인물이 어떤 모습과 자세를 하고 있는 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이를 뇌가 충분히 보완해주어 동영상을 볼 때보다 훨씬 더 흥분 수치가 상향한다. 최소한의 감각만 제공하는 은유적 자극제가 진정한 자극제다.

  하여간 에드나 오브라이언은 1960년 초기에 문제작을 연달아 발표했는데, 그게 하나같이 여성 속의 리비도 배출 욕구와 과정, 그리고 실행을 탐색하고 있어서 점잖은 아일랜드에 작지 않은 파문波紋을 일으켰고, 오브라이언의 진짜 작가 남편 언스트 게블러는, 이이가 에드나의 처녀성을 벗겨주었는지는 별개로 하고, 소녀들 3부작을 쓸 때부터 “계속 이 따위 글을 쓰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위협을 하더니 3부작이 다 나오자 정말로 이혼 소송을 했으며, 다음 해까지 진행한 소송에서 <8월은…>을 증거자료로 제출했지만 패소했다.


  잉글랜드 런던. 엘런은 별거중이다. 법적으로는 유부녀이고 다섯 살짜리 아들과 함께 산다. 여름철이라 아이 아빠가 와서 아이를 데리고 몇 주 동안 웨일스의 농촌으로 야영을 갔다. 두 해 전부터 남편과 별거중이지만 이제는 뾰로통한 평화 같은 것에 안착했다. 서로가 많이 포기해 평화를 찾았다는 얘기겠지. 이렇게 해서 스물여덟 살의 아이 엄마는 자유로운 상태가 됐고, 전에 딱 한 번 만난 휴 휘슬러라는 남자가 집에 찾아와, 연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하는) 미란다가 집에 눌러 앉더니 도무지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자기가 나와버렸다고 신세 한탄을 하러 왔다. 이이는 자기 잡, 일에 열중하는 사람이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잔뜩 있으며 아내는 기진맥진했을 때 미란다가 휴에게 접근했다고. 이후 이혼을 했든지, 별거중이든지 둘 가운데 하나다. 어떤 경우라도 잔뜩 만든 아이들 양육비 조달하느라고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 도리도 없기는 하겠다.

  그래서 이날 오후부터, 영국인답게 차를 대접하고, 혼자 있었다면 그냥 대충 때우고 말 저녁 식사도 요리 비슷하게 해서 함께 먹고, 와인과 위스키도 곁들이다가 처음엔 뜻이 맞아, 조금 후엔 입술이 맞아, 더 있다가 몸이 맞아, 식당 식탁에서, 응접실 소파에서, 그리고 최종적으로 침실 침대에서, 아들 마크를 키우는 스물여덟 살 우리의 엘런 세이지 여사는 드디어, 드디어 처녀성을 벗어서 내다버렸던 거였다.

  내가 (만들어서) 가끔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어떤 사람들은 사랑해서 섹스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섹스를 하고나서 사랑을 시작한다. 엘런 세이지는 두번째 경우였다. 겨우 두 번 만난 휴 휘슬러와 오후부터 다음날 정오까지 함께 지내고, 이제 헤어져야 할 때, 잠깐이 되겠지만 잠깐이라도 굳이 서로를 구속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다음 약속을 잡지 않고, 누구든지 생각나면 전화를 하기로 하고, 휴는 직장으로, 엘런은 식사 약속 때문에 외출을 한다. 이후 엘런은 지독한 고통 속으로 빠져버리고 만다. 뒤라스가 말한 지독한 고통.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고통. 먼저 전화하기는 어딘가 좀 어색하고, 그래서 기다리기만 하는데, 혹시 전화가 올까봐 미나리 한 단과 삼겹살 3백그램 사려고 동네 마트에도 못 가는 심정. 불행하게 이 때가 1960년대. 30년은 흘러야 휴대전화가 나온다. 이런 또는 비슷한 경험, 고통 없는 그대, 사랑을 논하지 말라.


  전화는 오지 않는다. 이제 사랑이라는 뜻의 저주받은 다른 이름의 것들,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오기 시작한 엘런. 엘런은 전화한다. 그리운 휴. 그의 깊숙한 바리톤 음성이 대답한다.

  “난 미란다를 사랑해요. 떠날 때마다 그걸 깨닫고 다시 돌아가 버릇하는군요. 어쩌면 나는 다 갖고 싶은 건가 봐요. 내 안에 너무 많은 죄책감과 책임감과 골칫거리가 있어요.”

  엘런은 죽을 만큼 용기를 내어 쿨한 척한다. “괜찮아요?”

  이 남자가 저지른 가장 사악한 짓은, 이제 겨우 엘런이 죽은 듯 살자고 체념했을 때, 딱 그때 다가와서 거짓된 희망을 건네어 하룻밤 동안 새 삶이라는 걸 준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든 일이다.

  심하게 낙심한 엘런. 이게 독자의 눈에는 님포매니악은 아닐지언정 남편과 휴 휘슬러로 인해 다친 심상을 다른 남자들과의 무분별한 쾌락으로 풀고 싶어하는 것 같이 보인다. 때는 8월, 절정의 휴가기를 맞아 엘런은 자기가 다니는 연극을 다루는 소규모 잡지사에 하기 휴가원을 내고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 칸으로 떠나기로 결정한다. 잘생긴 남자가 보이면 빼먹지 않고, 상대가 누구든 접근하리라 마음먹고. 오브라이언은 밝히지 않지만 하필이면 칸을 택한 것도 영화제가 열리는 유명도시라 미남들이 다른 곳보다 밀집해 있을 것 같았을까? 엘런에게 휴가는 일종의 남자 탐색 여행이 될 모양이다.

  실제로 엘런의 헌팅은 프랑스행 비행기 기내에서 시작한다. 호텔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오스트리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앞에서 옷을 차례차례 한 꺼풀씩 벗으며 사진을 찍히기도 하고, 괜찮게 생긴 호텔 종업원과 뜻을 모르는 은어를 썼다가 심한 터치도 당하는가 하면, 나이는 많지만 정도 많고 돈도 많고 손도 크고, 미국에서 온 큰 부자와 아무 느낌없이 하룻밤을 잤으며, 자상한 미국 배우 바비도 만나 굳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바비를 기어이 자빠뜨리기도 하는데, 하여간 내가 읽기로, 지중해에 도착한 이후에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앞부분의 남편, 아들 마크, 자신, 그리고 휴 휘슬러와의 연애에서 기대했던 조밀한 감정의 소묘에 미치지 못해 아쉽다. 비록 프랑스에서의 일이 본문 격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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