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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옌롄커? 그렇다. 흥미로운 작가라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처음 옌롄커를 읽을 때는 이 양반이 말하는 것에 도무지 적응을 하지 못해 참 별나게 소설을 쓴다, 헛웃음을 친 후 일단 멀리 했다. 그러다 무슨 연유가 있어 다시 읽고, 또다시 읽은 다음에 비로소 무릎을 탁, 치며 아하, 옌롄커의 독특한 문법이 이렇구나, 감을 잡을 수 있었으니, 나도 참 늦게 깨닫는 형광등이다.
옌롄커는 1958년, 소위 58년 개띠 작가. 중국의 20세기는 청나라가 망하고 민국과 대일전쟁과 내전을 거쳐 1949년에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이후 마오 정권에서 대약진운동, 대기근, 문화혁명, 개혁개방에 이르는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시간을 보냈다. 급격한 역사적 변혁 속에 상대적으로 문화적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어서, 아방가르드 문학을 지칭하는 선봉先鋒문학은 80년대 들어와 마윈, 위화, 쑤퉁 같은 이들의 독특한 문체의 실험으로 시작했다고 중국의 바이두 백과는 설명한다.
내가 중국의 ‘선봉파’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되었다. 위화, 쑤퉁, 마윈 같은 작가의 독특한 문체 정도는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수준이라 여겨서 그저 중국스럽다, 뭐 이런 정도로. 그래도 소설하나는 참 재미나게 썼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그런데 난데없이 등장해서 내 귀싸대기를 후려친 작가가 있었다. 찬쉐. 이이의 책을 읽고 정신을 차릴 수 없어서 잘 쳐다보지 않는 ‘해설’을 보니 찬쉐를 일컬어 ‘선봉파’의 일원, 또는 기수라고 했다. 음. 그렇군. 그렇다고 당장 찬쉐한테 열광한 건 아니다.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찬쉐의 소설 가운데 한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다. 알겠는데, 찬쉐가 내 취향에도 맞고 카프카 또는 크러스너호르커이와 비슷한 것도 알겠지만, 그들과 비교하지 못할 만큼 선뜻 읽기가 부담스럽다. 찬쉐를 읽고 감탄한 다음에 옌롄커를 읽으니, 이이의 독특한 문체가 이제는 친숙한 거였다. 찬쉐가 선봉파, 그러나 위화, 쑤퉁, 마윈과 차별되는 선봉파라면, 옌롄커는 소프트한 찬쉐 진영의 선봉파 일원일 수 있겠다 싶다. 아, 서재 친구님들, 지나가다 들른 나그네들, 이 말 믿지 마시라. 완전한 아마추어 독자의 헛소리니 행여 이런 얘기를 옮기지 마시라. 심각하게 창피당할 살煞이 있으니.
찬쉐와 옌롄커의 공통집합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초현실적 관점이라고 본다. 이 의견은 옌롄커의 <작렬지> 독후감에도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주인공의 상태에 따라 지형지물과 건물과 심지어 천기天氣까지 휘까닥 바뀌는 장면. <해가 죽던 날>에서도 이런 표현이 자주 출몰한다. 찬쉐의 작품에서도 연인의 마음에 따라 6층 아파트가 갑자기 45층 스카이라운지로 변하기도 한다. 미리 염두에 두고 읽으면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을 터.
<해가 죽던 날>에서는 집단 몽유 증세가 발현한다. 집단 몽유? 그렇다. 이미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사탄 탱고>와 <저항의 멜랑콜리>에서 경험했던 바이다. 개별적 인간 한 명의 몽유 현상, 꼭 이름을 ‘몽유’라고 하지 않지만 그와 비등한 현상은 카프카 이후 숱한 작가들이 사용했으니 익숙할 터이고. 물론 집단 몽유 현상도 헤르만 브로흐 같은 이들도 간혹 사용해 그리 낯선 건 아니지만, 옌롄커의 집단 몽유는, 하이고, 읽어보면 참으로, 정말로 중국스럽다. 오해하지 마시라. 지금 “중국스럽다”라는 표현을 멸칭이나 비하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옌롄커의 중국스러움은 그가 천착해오고, 그 결과 숱한 노작들이 중국 내에서 판매 금지 판정을 당하게 만든 20세기 중국의 유니크한 환경에 대한 지독한 은유니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해번의 카프카>에서 그랬다. 세상의 모든 것은 메타포라고. 그러나 그는 중국의 현대사를 메타포로 한 방에 조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면에, 옌롄커는, 했다.
(오늘 서문이 왜 이렇게 장황해? 논문 쓰니?)
중국의 중심은 중원이라고, 중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면 중원召南의 중심 자오란 현은 중국, 중화사상에 입각해 세상의 중심이다. 자오란 현의 가오톈 진鎭에 속한 가오톈 촌村이 작중 무대. 때는 바야흐로 음기와 양기가 마구 뒤섞인 삼복더위 음력 6월 6일 용포절龍袍節. 얼마나 덥고 건조한지 벌레들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가 몸이 한 마디씩 끊겨 가루가 되어버렸단다. 화자는 리녠녠李念念.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은 십대 초반의 소년이며 다분히 러시아 소설에 등장하는 유로지비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는 착한 심성이어서 사람들은 ‘바보 녠녠’이라고 부른다. 담을 마주한 옆집 아저씨, 베이징에 살고 있지만 가끔 집에 와서 작품을 쓰는 옌롄커 아저씨만 샤오녠녠(小念念)이라 불러준다. 오뉴월 뙤약볕이 얼마나 지독하고 모진지 온열질환에다가 더위로 인한 스트레스로 싸움박질을 멈추지 않아 요즘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수를 헤아리지 못해 녠녠의 집인 ‘신세계 장례용품점’은 옷장 안에서 벌레가 슬고 있던 재고마저 몽땅 팔려 나가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아버지 리톈바오李天保는 15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키지만 천둥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게 다다. 반면에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괜찮은 용모를 가지고 있으나, 안타깝게 젊어서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전다. 어머니는 마음 깊은 곳에서, 만일 자신이 다리를 절지만 않았어도 좋은 사람이기는 하더라도 결코 남편, 리톈바오하고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는 회한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아느냐고? 5백쪽이 넘는 분량의 소설에서 한 번쯤 이렇게 말을 하지 않았겠어? 아니더라도 가오톈 진 최고 부자의 누이동생이라면 당연한 거다.
외삼촌 샤오邵는 18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에 화장장을 운영한다. 맞다. 죽은 사람을 불살라 뼈만 남기고 그걸 쇠몽둥이로 빻아 골분으로 만들어 유족에게 건네는 사업, 당시 중국의 장례의식은 거의 전부 매장이었지만,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사람이 죽을 때마다 매장을 하면 나중에 국토가 전부 무덤이 될 것이 틀림없어서 당국은 매장을 금지하고 화장으로 전환했다. 게다가 공산 전체주의 시절이었으니 시책은 즉각 시행했다. 하지만 시골 사람들이 이제 막 죽어 슬픔에 싸인 자식들이 부모를 어디 쉽게 화장을 할 수 있었겠을까? 가장 중요한 “남의 눈”이 보고 있는데 말씀이지. 그래서 녠녠의 외삼촌 샤오 화장장장火葬場長은 매장 사실을 고발한 사람한테 4백 위안의 보상금을 지불하겠다고 광고를 했고, 당시 선풍적으로 짓기 시작한 기와집이나 이층집을 꿈도 꾸지 못해 장가들기도 벅찼던 짧은 키의 리톈바오가 정말로 동네 사람들의 불법을 밀고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모은 돈으로 남부럽지 않은 기와집을 번듯하게 올린 직후에 샤오 화장장장의 키 큰 누이를 아내로 맞을 수 있었던 거였다.
화장 시설 초기라서 요즘같이 전기로電氣爐가 아니고 시신에 석유를 뿌린 다음에 불 태우는 방식이었는데, 사실 말이 좋아 화장이지, 비위가 약하신 분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불의 온도가 높지 않아 수분과 단백질과 지방으로 구성된 고기를 태우는 일하고 그리 크지 않아서, 태우는 과정에 사람의 기름이 졸졸 흐르게 된다…고 한다. 외삼촌 샤오 장장은 이 시신 기름을 모아 드럼통에 담아 현과, 향과 성의 여러 공장에 내다 팔아 부수입을 챙겼는데, 사람의 기름이야말로 참으로 다양한 방면으로 재가공하거나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매우, 매우 우량한 자재/재료였단다. 조금 역겨울 소지가 있어서 사람, 시신의 기름을 사용하는 용도는 소개하지 않겠다.
리톈바오의 아버지도 죽었다. 예전에 당연히 극비리에 매장 사실을 신고했음에도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리톈바오가 자기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자고 아예 나발을 불기 시작했고, 톈바오는 죽은 자기 아버지를 남의 도움 없이 직접 업어서, 한겨울에 화장장까지 옮기다가, 동네 사람들이 이를 가여이 여겨 사실은 오해가 아니었지만 오해인 줄 알고 오해도 풀 겸 합심해 할아버지 시신을 화장장까지 운구해 화장을 시작했다. 톈바오는 이때 처음으로 시신을 태울 때 시신 기름이 나오는 것과, 그것을 모아 비싼 값에 판다는 걸 알게 되고 쇼크를 먹어, 손위 처남, 그러니까 샤오 장장에게 시신 기름 전량을 자기가 사겠다고 선언했다. 샤오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다리를 저는 누이의 복지를 위해 무척 싼 돈만 받기로 하고 이후 1천 위안 이상으로 가격이 올랐음에도 십년이 넘도록 같은 가격으로 전량을 매부에게 넘겼다. 리톈바오는 그걸 다시 좋은 가격으로 팔아 부자가 되는 대신, 바러우 산맥의 줄기로 짐작되는 폐광에 십년이 넘도록 모아 두었다. 당연히 나중에 처리하겠지. 어떤 용도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십년 세월동안 죽은 사람들의 기름이니 어찌 함부로 쓸 수야 있겠는가?
하여간 그해 음력 6월 6일에 가오톈 진에서 몽유는 시작했다. 샤夏씨 아저씨의 아버지가 꿈 속에서 도랑에 빠져 익사하는 것으로 시작해 숱한 사람들이 소환을 당하는 것처럼, 향촌의 진과 푸뉴산 산맥을 이어 곳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꿈 속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세상과 천하가 전부 몽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소설 속의 허구겠지만, 이런 몽유 현상이라니. 1100년 이래로 가오톈 진에서 몽유하는 사람은 매년 여름마다 있었지만 이렇게 집단으로 몽유하는 건 듣느니 처음이고 보느니 처음이었다.
옌롄커 좀 읽어서, 집단 몽유로 현대 중국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이 은유의 규모가 실로 경악스럽다. 처음엔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는 감각하지도 못하고, 잊은 지 오래된 저 까마득한 시절의 바람, 경험, 후회 같은 것을 꿈 속에서 실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사고도 나고 진짜로 죽기도 한다. 물론 그럴 때마다 녠녠의 장례용품 상점은 호황을 누리지만. 그러나 몽유가 퍼지고, 진의 많은 사람들이 몽유로 인해 일탈행위를 하는 것을 본 ‘깬 시민’들은 몽유를 핑계로, 자기도 몽유 중이라고 칭하며 절도, 강도, 약탈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정의의 사나이 리톈바오와 그의 아들 리녠녠은 별의 별 수단을 다 해 잠든 사람들을 깨워 강도와 약탈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집, 상점을 지키라고 하지만, 거대한 몽유의 손톱은 심지어 작가 옌롄커에게도 마수를 뻗친다. 옌롄커는 작품을 쓰기 위해 스스로 몽유를 선택한다. 극소수의 누군가한테는 몽유가 잃어버린 꿈과 생존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반면에 거의 모든 사람한테는 집과 재산을 털리고, 육체까지 잃어버리는 재앙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진 밖에 사는 사람들은 쇠붙이와 몽둥이로 무장을 하고 진을 약탈하기 위하여 마치 좀비 집단처럼 진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키 작은 리톈바오와 그의 아들 샤오녠녠은 어찌할 것인지. 몽유하는 자와 좀비. 비슷하다. 그러다가 몽유하지 않는 자와 좀비도 비슷해진다. 사는 게 다 그렇다. 옌롄커, 이 자는 미친 거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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