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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을 8년 5개월 만에 읽었다. 그때 쓴 독후감을 다시 보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좋다, 얼굴에 철판 깔자. 시간이 지나면 같은 텍스트를 읽고 감상이 바뀌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사용하는 말버릇이 바뀌는 것도 자연스러울 터, 괜히 창피해하지 말자.
중세. 1차 십자군 전쟁부터 시작해 르네상스 시기 전까지. 암흑의 시대라고 일컫는 5백년. 기사도라는 이름의 허례와 왕실, 귀족의 사치를 위하여 모든 사람들을 지옥의 고통으로 협박하며 노예생활을 강제하던 시기. 오직 죽은 다음에야 어린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천국의 행복을 미끼로 전쟁과, 약탈과 중세를 서슴지 않았던 야만의 시절을 이들은 살았다. 그러나 중세를 살던 당사자들은 “탄생, 결혼, 죽음과 같은 주요 사건들은 성스러운 의식에 따라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당연히 아주 적은 소수의 왕가와 귀족들에 국한해서 그랬다는 것이리라. 그들의 신비롭게 빛나던 출생으로 시작해 결혼을 통과해서 죽음까지 이어지는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과 틀에 박힌 말의 되풀이, 무수한 의식과 서식, 은근하게 진행되는 사후 지옥행에 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 오직 부와 영예에 집착하는 탐욕만이 횡행한 유럽의 5백년. 우리는 그것을 중세라고 부른다.
동서문화동판에서 찍은 《중세의 가을》. 이 책을 번역한 이희승맑시아가 누군가? 이 출판사에서 번역작업을 한 많은 사람이 이미 고인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오래전에는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을 일본어 중역이 아니었을까 하는 증명되지 않은 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희승맑시아는 2010년에 고려대대학원 불문과에서 공쿠르 형제의 작품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2010년 대학원 졸업이면, 군대 3년을 포함해도 21세기에 대학에 입학했다고 짐작할 수 있어서, 1980년 이후에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대학원생 시절에 이 《중세의 가을》을 번역하여 초판을 2010년 12월에 출간하니, 독자는 20대 청년이 작업한 것을 읽은 거다. 여기까지는 직접 확인했다. 이후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희승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르시아Marcia라는 가명 또는 소위 닉네임으로 강남의 어학 학원에서 강사를 했다 한다. 한 번 더 말한다. 어학 학원 강사는 인터넷에 흐르는 정보이며, 확인한 바 없다. 어쨌거나 이래서 역자 이름이 ‘이희승맑시아’가 된다는 것.
그런데 본문이 끝나고 뒤에 붙은 해설 “하위징아의 생애와 《중세의 가을》”은 이렇게 시작한다.
“1966년 9월 27일 아침,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 북부의 중심 도시 호로닝언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하위징아의 고향을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계획한 네덜란드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p.514)
무려 61쪽에 달하는 해설은, 아쉽게도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았다. 8년 전에 나는 당연히 이희승맑시아라는 노학자가 1966년에 하위징아의 고향을 방문했었겠거니 싶었다. 1966년이면 우리나라 박정희 정권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감하던 해인데, 하위징아라는 사학자를 연구하기 위해 귀한 달러를 써가며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정도니까 박정희 군사정권도 인정했던 상당한 권위자, 석학이거나, 이름으로 비추어 보아 우리나라 출신의 유럽이나 미국에 사는 학자 정도로 생각했다. 어때, 그럴 듯하지? 지금은 더 이상 아니다. 누군가가 쓴 《중세의 가을》의 해설/논문을 그대로 혹은 61쪽으로 편집해 번역한 것으로 본다. 원본이 누구의 해설/논문이냐고? 내가 알면 귀신이게? 짐작도 못하겠다.
책은 “중세의 가을” 즉 중세가 쇠퇴기에 접어든 15세기에 집중한다. 물론 15세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당연히 중세가 싹튼 시절부터 중세 안에 있었던 거의 모든 정치, 전쟁, 궁전, 사랑, 기사도, 신앙, 예술과 미학 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운데 5백년, 물론 이전 5백년과 이후 5백년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히 신앙이었다. 신앙 오리엔티드 에이지. 모든 길은 신앙으로! 하다못해 사랑의 표현까지 그렇다. 시인 페노렐의 노래:
사람들이 ‘신의 어린 양(Agnus Dei)’을 읊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성 크레페(Saint Crepais)에게 믿음을 나타내고
교회 두 기둥 사이에서
그녀는 나에게 달콤한 페(paix믿음)을 주었네.
나는 이 ‘평화의 입맞춤’에 굶주려
사랑에 빠진 나의 심장은
그녀가 너무도 빨리 멀어지자 당혹스러웠다네.” (p.183)
위에서 페paix는 평화의 입맞춤으로 사람들이 차례로 작은 조각(성물이겠지)에 입맞추는 것을 뜻하는데, 키스를 하기 위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혹시 모르지, 중세 시절에는 부부가 침대 위에서 합법적인 성생활을 즐기기 전에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팍 꿇고 두 손으로 모아, “오 천주여, 지금부터 부부가 간음하고자 하오니 제발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고 앙망기도를 했을 지도.
농담 같다고? 물론 농담이 7할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나는 8년 반 전에 독후감에서 이렇게 썼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아직도 건설중인 독일 쾰른 성당과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석조 고딕 건물에 현혹되는 아시아인의 유럽동경. 나는 그걸 정말 아쉽게 생각한다. 기독교의 신이 이루 셀 수 없는 노동자들, 자기가 만든 아들 딸들의 생명을 죽여가며, 그들로부터 착취한 자금으로 만든, 그토록 화려한 신전에서 자신을 찬미하기를 바랬을까?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성서를 읽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어미의 태내에서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삶의 고해를 견뎌내고 있는 동안 질투의 하느님은 어느 다른 신보다도 화려한 성막을 짓게 하고, 솔로몬 임금 시절엔 눈부시기 견줄 바가 없는 성전을 금과 은으로 치장해 건축했으며, 제사장에게 에봇이라고 칭하는 당시 수준에서 최고로 화려한 제사 복장을 갖추게 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황소 2만2천 마리와 양 12만 마리를 태웠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이 거대한 무리들이 불에 타는 동안 발생하는 미세먼지를 흠향하고 있었던 거다. 8년 전에 나는 순진했다.
이들의 후예가 바벨탑보다 약간 낮은 높이로 예배당을 지으면서 백성들한테는 사후 천국, 생전 지옥의 진리를 설파한 시절이 바로 중세. 프랑수아 비용의 《유언집》에 어머니를 기리며 지은 <성모의 발라드>에 나오는 대목.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가련한 노파,
글자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네.
나는 교회당 안에서 바라보네.
그림 속의 천국에는 하프와 비파가 있고,
지옥에서는 죄인이 유황불에 고통받네.
이는 나를 두렵게도 하고, 또 즐겁고 기쁘게도 한다네. (p.248)
지옥의 유황불이 없는 중세를 모든 권력자, 왕실, 귀족, 성직자는 지탱할 수 있었을까? 유황불 없는 지배를? 어미의 태에서 나오자마자 지옥의 유황불은 시작하고 있었다. 백성의 삶 자체가 지옥의 유황불이었으니까. 그러나 학습만큼 무서운 것도 없어서, 이들은 죽은 후 영속하게 될 사후세계에서 지옥의 유황불에 탈 걱정만 했을 뿐. 이런 맹목적인 신앙은 저절로 성물 숭배를 발생시켰고, 어이없게도 가장 위대한 성직자,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조차 죽은 후의 치욕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중세 말기 백성들의 성물 숭배, 그건 예를 들어 여태까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 명백한 최후의 만찬에 쓴, 사용했다고 알려진 성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오른쪽 가슴, 간을 찔러 검은 피를 흘러내리게 했던 성창, 마지막으로 입었던 (십자가에서 정말로 마지막으로 입었던 고쟁이 말고) 겉옷인 성의를, 다만 한 조각이라도 갖고 싶어하는 어린 백성들의 숭배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중세 시대엔 그게 꼭 일반 백성이 아니라 귀족들도 비슷한 생각이 있었던 거였다. 이후 세월이 지나 그리스도 성물 말고, 성인으로 축성된 성직자들의 유물, 더 나가서 심지어 유골, 뼛조각 하나라도 갖고 싶어하는 성향이 거의 폭력적인 수준으로 증가해 기원 11세기를 여는 해인 1000년 무렵 움브리아Umbria 산속에 사는 사람들은 성 로뮈알드를 때려죽여 그의 시신 일부나마 집안의 신주단지 대신 갖고 싶어 했단다. 여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걸려든 거다.
“1274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탈리아 포사누오바Fossa nuova 수도원에서 숟가락 놓았을 때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값비싼 (이 단어를 다시 확인했다, ‘값비싼’이라 했다. 간혹 팔아먹기도 했던 모양이다.) 성유물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스승의 몸을 글자 그대로 가공, 보존했다고 한다. 목을 자르고 그 시체를 삶아 조리했던 것이다.” (p. 250)
근데 왜 책의 제목을 《중세의 가을》이라고 했을까? 앞에서 이야기했다. 하위징어가 단전에 힘을 모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15세기, 이 암흑의 절정기에서 암흑의 다음 단계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거다. 르네상스, ‘르네쌍스’는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종로1가에 있던 고전음악 감상실 이름이었지만, 하여간 르네상스의 태동은 “당연하게도” 중세시대에 발아하기 시작했던 것. 그것을 포착하기 위한 하위징아의 서술이 《중세의 가을》이리라.
책 좀 읽는 독자들은 동서문화사 또는 동서문화동판을 좀 우습게 아는데 사실 이건 출판사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어쨌거나 믿음을 주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이 책, 놀랍게도 20대 역자 이희승맑시아의 젊은 문장으로 읽는 《중세의 가을》은 매우 매끄럽다. 간혹 “너무” 매끄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연히 역자의 우리말 실력을 높게 평가해야 하겠지만, 원래 텍스트를 쓴 하위징아의 문장 역시 놀라울 정도라고 한다. 나는 안다. 법학자, 사학자 가운데 글 써서 먹고 사는 시인, 작가보다 훨씬 명문장을 휘날리는 인물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것을. 요한 하위징아도 글 좋은 사학자였던 거였다.
읽어 보시라. 잘 몰랐던 세계를 보는 눈이 떠지는, 깜박 놀랄만한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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