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 번역 : 권정생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
간만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아침입니다. 지난 연말부터 사무실 이전이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새로운 책장이 들어오고, 책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차곡차곡 챙겨두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수평으로 비껴가는 눈바람을 보며 인생이란 참 별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창 밖으로 내리는 눈들을 바라보면서 저 눈들이 곧바로 지상으로 낙하하는 것이 아니라 제 몸의 생김새와 바람을 타고 중력을 거부하며 다시 날아오르는 광경을 바라봅니다. 김 서린 창 밖 세상으로 사람이 걸었던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훤히 보입니다. 삶도 이와 같다면 참 좋으련만...
그러자 곧장 길은 인간에겐 문명을 의미하지만 자연에겐 죽음을 의미한다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마음은 차분하고, 정신은 명징하여 코끝에선 금방 코피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힘겨운 아침입니다. 안데스 산맥을 넘어 이곳까지 왔을 공장 커피 한 잔을 마십니다.
*
어렸을 때 스스로 삶의 방법론이라고 설정했던 세 가지 원칙이 있었어요.
"철저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살자!"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누군가 저에게 삶의 방법론에 대해 묻는다면 아마 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가드 올리고, 어금니 꽉 깨물고, 어깨에 힘 빼고 살자!"
제가 청소년기에 보았던 일본 애니메이션 가운데 <건담>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건담>의 주인공 "아무로 레이"는 인구폭발과 환경오염 등을 피해 개척한 우주 식민지 출신의 스페이스노이드로 15살짜리 평범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휘말린 전투에서 그는 우연치 않게 신형 로봇 '건담'의 파일럿이 되죠. 어른들이 모두 전사해버려서 비슷한 또래의 형과 선배들이 조종하는 '화이트 베이스'라는 우주전함에 친구들, 민간인들을 태우고 지구로 귀환해야만 하는 목적을 수행한다는 내용입니다.
마치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의 소년들처럼 자기들만의 힘으로 폐허가 된 우주 식민지 고향을 떠나 주인공은 끊임없이 전투를 하면서 지구 아마존에 있는 '쟈브로'라는 우주연방군 기지로 향해 가야만 합니다. 애니메이션상으로 그는 '뉴타입'이라는, 인류가 진화해 도달하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그려지지만 불과 15세의 소년은 눈 앞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혹은 그저 전쟁이란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통스러워 합니다. 또 그 자신도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는 스스로를 다그칩니다.
"내가 조금만 더 잘 싸웠다면... 내가 조금만 더 잘 싸웠더라면 저 사람이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
어느날 이 소년의 눈 앞에서 짝사랑했던 "마틸다"란 여성 장교가 자신을 구하고, 전사하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지구 귀환길에 나섰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의 가슴엔 무수한 상처들이 쌓입니다. 어른들은 너무나 멀리 있기에 아무도 그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소년과 일행은 갈 길을 방해하는 적들을 물리치고, 때로는 이해하면서 목적지인 지구 연방군 기지에 도착합니다.
소년은 기지에서 죽은 "마틸다"의 약혼자였던 정비장교 "우디"를 만납니다. 그는 "우디씨... 죄송해요. 제가 좀더 좀더 건담을 잘 조종했다면... 마틸다 씨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라며 스스로를 자책합니다. 그러자 약혼자였던 장교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그를 바라보며 냉정한 어조로 말합니다.
우디 : 잘난 척 말게! 아무로 군!
잘 들어. 아무로군! 난 자네 실력이 미숙해서 마틸다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건담 1기의 활약으로 마틸다를 구해내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만큼 전쟁은 만만한 것이 아니야.
아무로 : 하지만...
우디 : 온힘을 다했다면 된 거야.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하고 시시한 후회따위는 하지마. 나는 지금 마틸다가 목숨을 걸고 지킨 이 화이트베이스에 애착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수리와 개장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 사람은 어차피 그 정도 일밖에 할 수 없어.
*
가끔 저는 그리 대단한 것을 꿈꾼 적이 없음에도 왜이리 세상살이가 번다하고 힘든 것일까? '난 그저 누군가의 삶으로 위로받고, 누군가의 삶에 위로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라고 반문하곤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이 되지 않고,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지도 않으면서 다시 말해 나는 상처받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서도 누군가의 삶으로 위로가 되고, 누군가의 삶에 위로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생각해보면 제 삶이 힘겨운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서울과 중부 지방 최대 폭설이 내렸다고 합니다. '바람구두' 신고서 길 위로 나서기 참 좋은 날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알라딘 불매 카페 만들고, 그간 활동하면서 제 심정이나 태도는 충분히 보여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제 삶을 '길 위의 인생'이라 평하기 좋아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제 삶의 도반(道伴)이 있다면 이 길 어디에선가 또 만나겠죠.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떠났다가도 언젠가 바람이 불면 다시 돌아와 예전처럼 즐거울 날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책 많이 읽으시고, 모두들 건강하시길...
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
가고 가다 보면 가는 중에 알게 되고, 행하고 또 행하면 행하는 중에 깨닫게 된다.
- 노자